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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우위썬(吴宇森)의 작품활동 복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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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우위썬(吴宇森)의 작품활동 복귀?!

hanyuku 2022. 4. 20.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얼마 전 홍콩의 대감독 우위썬(吴宇森)이 할리우드 영화 <침묵적야만(沉默的夜晚)>이라는 영화로 돌아왔는데요. 주연은 조엘 키너먼과 <자살소대(自杀小队)>의 릭 플래그라고 하며, 비교적 특이한 점은 이 영화가 대사 없이 평범한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으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가 복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우위썬 감독이 할리우드 감독으로 20년 만에 복귀한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우위썬이 할리우드에 입성한 것은 지난 1993년 <종극표파(终极标靶)>이며, 2002년의 <풍어자(风语者)>이후 떠났으니 시기상으로 딱 20년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캐스팅이나 영화 장르를 막론하고 마치 우위썬이 찬밥을 심하게 볶아놓은 느낌이라고 하는데요. 우위썬의 지난 2016년 작품 <추포(追捕)>이후로 6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관건은 <추포>에 이어 <태평륜(太平轮)>까지 말할나위 없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자원과 캐스팅, 그리고 투자가 눈에 띄게 점점 작아지는데, 자신의 명성을 빌어 투자금이 얼마 안 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의미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변검(变脸)>을 재촬영하고, 우위썬은 미국판 <첩혈쌍웅(喋血双雄)>에서 하차한다는 뉴스까지 나왔는데요. 글로벌 대감독에서부터 현재 우위썬 감독의 명성이 점점 더 하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벌써 36년이 된 <영웅본색>의 영향은 얼마나 컸을까요? 성룡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946년생인 우위썬은 2022년에 이미 76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1975년에 데뷔작 <철한유정(铁汉柔情)>으로 감독으로 데뷔했는데요, 당시 홍콩 영화시장에서의 화제는 무협영화와 액션영화가 주였습니다. 이런 영화들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영화 인생에서 최고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우위썬의 진정한 절정기 작품들은 중국 전통 액션극이 아니었기 때문에, 쉬커 스튜디오(徐克工作室)에 합류하는 것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1986년, 우위썬 감독은 <영웅본색(英雄本色)>으로 크게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배우 장국영, 주윤발 외에도 이 영화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의 지위와 영향력은 홍콩 영화, 중국영화에서 더 나아가 세계영화에서 우위썬의 위상과 영향력을 닮았다고 합니다. 대개 홍콩 영화의 정점 시대가 열렸을 때 만들어진 영화 스타일이며, 자신의 영화 시장에 영향을 준 것부터 시작해서 할리우드에 영향을 준 홍콩 장르 블록버스터에 이르기까지 최고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홍콩영화가 발전하기 전인 49년도 이전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그 다음 50년대 초반 시기의 발전 단계는 창청, 신화, 펑황, 신롄(长城、新华、凤凰、新联) 등 영화사의 발전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60년대 홍콩의 영화 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고, 덴마오(电懋)와 샤오스(邵氏) 경쟁체제의 시기를 맞았으며, 이 시기의 대표적인 대감독은 리한샹(李翰祥)이었습니다.

 

 

 

 

 

훗날 덴마오 총수와 회사의 엘리트들이 비행기 사고로 인해 사망하게 되자, 샤오스 일가가 홀로 독주하기 시작했습니다. 60년대 홍콩의 대표적인 대감독은 후진취안, 장처, 그리고 청강(청샤오둥의 아버지)(胡金铨,张彻和程刚(程小东父亲)) 등의 인물이 있습니다.

 

 

70년대에는, 원래 샤오스의 최고 경영자였던 저우원화이(邹文怀)가 회사를 나와 자허(嘉禾)를 창립하였는데, 70년대에는 자허와 샤오스의 경쟁체제였습니다. 이때 자허에서 부상한 핵심 인물은 이소룡이었지만, 이소룡이 너무 일찍 사망해버렸습니다. 70년대 중후반의 홍콩 대감독에는 추위안(楚原)이 있으며, 후기에는 후진취안과 장처(胡金铨, 张彻)가 이름을 날렸습니다.

 

 

 

 

 

동시기에 막 부상하는 액션영화의 리우자량(刘家良), 홍콩 귀마희극(鬼马喜剧)의 쉬관원(许冠文), 쿵후 영화의 홍금보(洪金宝)와 성룡(成龙), 및 무협 영화의 쉬커(徐克) 등 차세대 홍콩 영화인들이 있었습니다.

 

 

우위썬은 장처의 제자로, 장처를 따라가기 시작하며 무협 영화를 찍기 시작했는데요, 70년대 중후반부터 80년대 초중반까지 이 시기의 홍콩 영화는 본격적인 전야제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영화와 감독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70년대 초의 이소룡, 후진취안 및 장처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꽤 컸죠.

 

 

 

 

 

1986년, 우위썬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은 영화 그 자체로 매우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위상과 영향은 홍콩 영화 절정기의 홍콩 영화의 두 번째 장르로서 영화 기법은 물론, 할리우드까지 영향을 미쳤던 세계를 뒤흔든 홍콩 장르물 블록버스터였습니다.

 

 

첫 번째는 70년대 이소룡의 현대식 이종 격투기, 리우자량류의 전통 활극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코디미를 빛낸 홍금보, 액션 코미디의 성룡까지 가기엔 아직 시기상조였죠.

 

 

 

 

 

1983년 홍금보의 <플랜A>, 84년도의 <쾌찬차(快餐车)>, 86년도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에 사력을 다하는 요소를 가미하여 철저히 독립적인 길을 개척했습니다. 쉬커의 무협 판타지물은 1987년의 <천녀유혼(倩女幽魂)>, 1990년의 <소오강호(笑傲江湖)>, 그리고 91년도의 <황비홍(黄飞鸿)>이 있습니다. 왕징, 휘안화, 왕자웨이 및 저우싱츠(王晶,许鞍华,王家卫, 周星驰)는 모두 90년대를 풍미한 인물들이죠.

 

 

<풍어자(风语者)>는 할리우드에서 패배해나갔고, <추포(追捕)>는 못 봐줄 정도로 망했다고요? 이 영화의 감독은 빨리 퇴직해야 할겁니다.

 

 

 

 

 

우위썬의 영화 스타일이 무엇인가 말하자면,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그의 사부 장처의 남성적인 미학을 소화하고, 거기에 서양 영화인 장피에르 멜빌, 샘 페킨파의 트레이드 마크인 총격전 슬로우 모션, 그리고 무한 탄환, 비둘기가 어지럽게 날며, 무엇보다도 장처의 고대강호의 정의를 현대강호적 영웅 정의에 접목시키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선배 감독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로, 그는 이것들을 학습하고 소화하여 진화된 방식으로 내놓는 스타일입니다.

 

 

 

 

우위썬의 스타일을 표현하자면, 그의 스승인 장처 스타일의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며 살상하는 시적이고도 낭만주의적인 총격 액션이 합쳐져, 현대적 배경까지 어우러져 우위썬만의 독특한 영화 스타일을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대에 우위썬의 영화 스타일을 '폭력의 미학'이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80년대 중후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아직 디지털 특수효과 시대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홍콩에서는 30년 동안 모색하고 개척하여 구축한 액션 디자인 시스템, 총격전, 무협전 등의 영화 스타일 및 촬영 기법은 당시 일본의 검극, 조폭 영화와 애니메이션처럼 전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장르이자, 진보적인 기법이었습니다.

 

 

미국 할리우드는 전 세계 유수의 인재들을 영입하여 발전시키는데, 우위썬은 할리우드로 가서 그곳에서 발전하였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확실히 선진적이었고, 동시에 미국 문화의 융합 처리 방식도 성공적이었죠.

 

 

 

 

 

분명히 그가 절정에 올랐던 시기의 첫 번째 영화 <종극표파(终极标靶)>를 보러 갔었다면, 주연배우 샹그 운튼도 당시 할리우드에서 B급 액션배우(투자만 해도 한계가 있었다)로 통했었으니, 미국 액션 같은 홍콩 액션은 정말 딱딱하고 우스꽝스러웠을 것입니다.

 

 

우위썬은 직접적인 액션을 포기하자, 차기작 <단전(断箭)>에서는 효과 및 성적이 모두 좋아졌고, <변검(变脸)>에서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 영화는 상징적인 총격전 슬로우모션, 비둘기의 난무, 쌍웅대치(双雄对峙) 등의 설정으로 문화적인 디테일 등이 더욱 미국 현지화 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두 할리우드 톱스타의 해석과 맞물려, 우위썬의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때가 90년대 말이고, 홍콩 영화는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였죠. 헐리우드에서는 <터미네이터>, <타이타닉> 등을 거쳐 디지털 특수효과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액션이나 총격전은 홍콩영화의 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 초중반까지와 흡사하다고 합니다.

 

 

 

 

 

80년대 중후반, 90년대 중반의 할리우드 액션 톱스타인 실버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워제네거, <호단용위(虎胆龙威)>의 브루스 윌리스 등이 이 시기에 정점을 지났고, 90년대 말 홍콩 영화 엘리트들이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하여 융합하고 소화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90년대 말, 우위썬의 영화 스타일과 기법은 이미 진부해져버렸고, 우위썬도 거의 창작의 절정기를 보냈습니다.

 

 

 

 

 

 

이 가운데 단적인 예가 바로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였는데요, 1996년의 <미션 임파서블1>은 이전의 할리우드 첩보물 스타일이었고, 1999년 우위썬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 2>는 그의 장점인 로맨스 총격전 장르로, 동시대 할리우드 총격전 장르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2006년의 <미션 임파서블 3>는 분명 <첩영중중(谍影重重)> 시리즈의 혁신을 거쳤습니다. 이는 할리우드가 홍콩 영화 디자인을 흡수하여 디지털 효과의 특장점을 녹여낸 것이라고 하는데요. 결국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총격전, 액션 영화 디자인 시스템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2000년즈음 우위썬의 스타일은 이미 유행이 지나버려소, 2002년에 개봉한 전쟁 영화 <풍어자>는 같은 시기에 할리우드에서 개봉한 전쟁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인해 결과적으로 흥행에 실패하게 되었고, 결국 우위썬이 할리우드에서 퇴출되었습니다.

 

 

쇠락해가는 우위썬? 그는 홍콩에서 감독으로서 어떤 지위에 있을까요?

 

 

 

 

 

우위썬은 동시대 홍콩 대감독들에 비해 거의 가장 빠른 시기에 제작되었고, 이 창작 절정기도 오래가서, 홍콩 영화인들의 할리우드 진출 시대를 완전히 경험하고 이끌었고, 중국에 돌아와서도 당시 화제의 사극 대작이었던 <적벽(赤壁)>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젊은 관객들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네요.

 

 

하나는 우위썬이 미국에 가 있느라 부재했던 2012년 이후의 중국 내 영화시장이 굴기하였던 덕분에 이 작품의 참여감이 부족하였으며, 이 시대 관객들에게 존재감도 부족해보였던 것입니다.

 

 

 

 

성룡의 자타공인 마지막 쿵후 코미디의 정점은 2012년의 <십이생초(十二生肖)>이지만, 그동안 성룡의 영화는 끊이지 않았고, 입소문과 흥행은 갈수록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은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룡은 다양한 캐릭터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쉬커는 2010년경에 <적인걸(狄仁杰)>시리즈, 2015년에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에 출연하였는데, 2년간 공동연출을 맡은 <장진호(长津湖)>도 있습니다. 천커신(陈可辛)은 영화의 입소문 평가도 절정기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우수한 국산 상업용 블록버스터 작품을 만들어낸 것으로, 중국내 본토 영화시장에서 재탄생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우위썬의 영화 인생은 두치펑(杜琪峰)과 비슷하면서 다르다고 하는데요. 두치펑은 대기만성형이어서, 90년대 말부터 2010년경에 은하영상(银河映像)시기에 절정기를 맞았고, 반면 우위썬은 앞에서 긴 절정기를 누렸지만, 후반에는 참여감이 부족하여 관객들의 눈에 존재감이 부족하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위썬의 기술 스타일이 너무 고정되어 있고, 수십 년 동안 발전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새로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고, 뒤떨어진 상태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관객들에게 버림받고 마는 것이죠.

 

 

 

 

 

 

영화가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길은 보통 두 가지입니다. 몰입하게 하여 현실적인 화제로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길을 택한 것은 바로 천커신(陈可辛)의 스타일이고, 그의 제자인 쩡궈샹(曾国祥)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길은 바로 기술적 노선을 걷는 것인데요, 과학 기술이야말로 제1의 생산력이며, 근현대 영화공업과 장르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돌파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커(徐克)는 홍콩의 대감독으로서 기술적 노선을 걷는 주자로서, 2010년 이후 <적인걸>, <지취위호산>, <장진호> 등의 작품으로 중국 영화산업을 이끌고 있고, 또 다른 홍콩 감독 중에는 한 세대 늦은 린차오셴(林超贤)이 유일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보면, 우위썬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 후배인 홍콩의 대감독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에 몰두했던 감독은 중국 본토의 사회적 환경을 이해하지 못했고, 영화도 관객들의 마음도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영화 기술과 장르에서 돌파력이 있는 다른 감독에게 패하고 말았죠.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본토의 젊은 감독들은 <심룡결> , <전랑2>, <유랑지구>, <아부시약신> (《寻龙诀》《战狼2》《流浪地球》《我不是药神》) 등의 영화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화 기술과 장르가 트렌드에 맞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영화 기술과 장르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대감독이라도 한물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썬은 8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요, 그가 홍콩 영화와 중국 영화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그가 만들고 있는 영화의 느낌은 비록 한물 간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감독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참고기사>

36年了,《英雄本色》的影响有多大?我们看成龙就知道了 (baidu.com)

 

36年了,《英雄本色》的影响有多大?我们看成龙就知道了

前几天有一个不大不小的新闻,香港大导演吴宇森回到好莱坞拍片了,电影叫《沉默的夜晚》,主演是乔尔·金纳曼,也就《自杀小队》中的瑞克·弗莱格,比较特殊的是宣传说这电影没有台词,

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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