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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바의 "반부패 여왕(反腐女王)"으로 불리는 쟝팡(蒋芳)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오늘 소개할 기사의 주인공은 마윈과 23년간 같이 일해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당초 그녀는 "십팔나한(十八罗汉)"에서 오늘날 "멸절사태(灭绝师太)"에 이르게 되었다는데요.
그녀는 연약한 외모이지만, 9년전에는 혼자의 힘으로 7명의 알리바바 임원들을 친해 감옥에 보내 콩밥을 먹인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어떤 인물인지 함께 보실까요?
그녀는 이후 알리그룹 부회장, 회사 파트너로 승승장구하면서 몸값이 억대를 넘어섰습니다.
마윈 회장은 "알리바바에서 그녀는 누구든 조사할 수 있다. 심지어 나까지도!"라고 선포했었다고 하네요.
이 사람은 바로 "알리의 반부패 여왕(阿里反腐女王)"으로 불리는 쟝팡(蒋芳)입니다.
당신은 아마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쟝팡이 비즈니스 업계에 뛰어들기 전, 그녀는 보통 농민 가정의 평범한 여학생이었습니다.
뒤어난 배경도 없고, 뛰어난 기술도 없고, 심지어 근무 경험조차 0였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녀는 무엇으로 인재가 많은 알리바바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빠르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사람의 일생에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단 몇 차례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쟝팡은 그 드문 기회를 매번 정확히 잡을 수 있는 행운아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당신도 인생에 슬럼프가 찾아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면, 오늘 소개하는 쟝팡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올바른 자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01. 학문을 탐구하다
한 시골 여자아이가 홀홀단신으로 항저우(杭州)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문을 나서기 전, 그녀는 부모와 한바탕 싸웠다고 하는데요.
대대로 농민이었던 부모는 여자아이는 고등학교까지만 다니는 것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얌전히 집에 남아서 우리를 도와주고, 나중에 좋은 집에 시집가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남편 내조하고 아이 잘 키우면 얼마나 좋니!"
하지만 이 여자아이는 이런 "재미없는" 삶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하루 종일 포대기를 둘러매고 호미를 쥐고 흙을 파고 밥을 하는 모습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일말의 결심을 안고 쟝팡은 물러설 틈도 없이 항저우행 기차를 탔습니다.
종착지는 항저우전자공업학원이었죠.
바로 이런 "비중점(非重点)", "비명성(非知名)" 대학이 농촌 여자아이 쟝팡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02. 신기한 영어 선생님
개학하고 항전(杭电)에서의 첫 수업에서 쟝팡은 한 분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비록 그는 생김새도 변변치 못하고, 키도 크지 않았고, 여윈 체구에 넉넉한 화이트 셔츠를 입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나 그는 입을 열자마자 쟝팡을 "정복"시켜버렸다고 합니다.
또렷한 발상, 열정적인 어조, 쩌렁쩌렁하고 힘있는 말투는 강단 밑에 앉은 쟝팡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쟝팡은 바로 눈앞의 선생님이 그녀가 지향하는 인격적인 매력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은, 마윈이라는 이 영어 선생님이 실패와 막막한 고난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988년, 세 차례 대학 수학능력시험에 실패했던 마윈은 결국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항저우 전자공업학원에 배정되어 영어와 국제 무역 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졸업 후 대학에서 선생님이 될 수 있으니, 안정적이고 체면도 좋고,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었죠. 그러나 마윈의 마음 속에서는 이대로 흘러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2년 후, 그는 바로 번역사(翻译社)를 설립하여, 몇 분의 정년퇴직한 연로한 교사들을 초빙하였고, 자신을 도와 번역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창업에 첫발을 내딛는 일이 어디 쉬울까요?
개업 첫 달, 번역사의 수입은 총 700위안이었는데, 월세는 오히려 2천 위안이 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 늦게까지 30일을 일했는데도, 오히려 절반이나 밑졌다니, 이것은 결국 많은 사람들을 권고사직 하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윈은 기죽지 않았습니다.
번역사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그는 큰 마대자루를 메고 이우(义乌)로 달려가 꽃과 옷, 작은 선물을 한 무더기 사왔고, 이런 작은 상품들을 판매해서 버는 수입으로 번역사의 부족분을 메웠습니다.
결국 1994년에 이르러 번역사는 수지타산을 이루기 시작했고, 이듬해 부터는 흑자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윈도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마윈은 그의 노력이 다른 여자 아이의 운명을 조용히 바꾸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03. 다시 만나다
1996년, 쟝팡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또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우들을 보니, 하나같이 집에 배경이 좋던지, 아니면 경제적 조건이 우월했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항저우에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죠.
하지만, 자신을 보니 배경도 없고 돈도 없고, 대학 성적도 그저 그런 보통이니, 집에 돌아가서 농사를 짓는 것 말고는 대체 무슨 길이 있겠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한바퀴 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달갑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쟝팡은 문득 눈에 익은 모습을 보게 되었죠.
당시 "차이나옐로페이지(中国黄页)"를 막 설립했던 마윈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그의 '친정집'이라고 할 수 있는 항전에서 신입을 뽑았습니다.
자신이 애당초 가장 좋아했던 스승이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을 보고 쟝팡이 무엇을 망설였겠습니까. 그녀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곧바로 마윈의 팀에 합류하였습니다.
하지만, 직장 경험이 전무한 취준생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들어간 후, 쟝팡의 주요 업무는 바로 모두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청소를 하고, 서류 따위를 정돈하는 것들이었죠.
간혹 마윈에게 데이터를 정리하라고 받기도 하였는데, 데이터 분석 작업을 하는 것은 "기술 함량이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래도 쟝팡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시종일관 자신이 이곳에 남을 수만 있다면, 남아서 이 그룹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미래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죠!
순식간에 1997년 마윈읜 옐로페이지를 그만두고, 베이징의 "큰 일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0여 명의 팀이 함께 베이징으로 향하게 되었죠.
시골에서 항저우로, 항저우에서 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자취를 바라보며, 쟝팡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부풀렸습니다.
그러나, 베이징행은 생각처럼 순탄치 않았습니다.
곧, 그녀는 새로운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죠.
04. 도박을 한 판 걸지도 않고, 어떻게 승부를 알 수 있겠는가?
인생은 도박입니다.
승패의 여부는 바로 당신의 손에 있는 카드와 독특한 안목에 달려있죠.
1999년, 협력사와의 의견에 따라 마윈은 항저우로 돌아가 재창업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팀 내부 미팅을 한번 하였는데, 대략 이런 뜻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베이징에 머무르고 싶다면, 나는 당신을 소후, 야후(搜狐、雅虎)와 같은 큰 회사에 소개해주겠다.
만약 당신이 나를 따라오고 싶다면, 항저우로 돌아가 "꿈을 위한 전쟁"을 계속 할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월 급여는 500위안 밖에 안 될 것이다.
IT를 하는 사람치고 베이징에 남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러나 쟝팡은 미지의 도시보다는 눈앞에 있는 지도자를 더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운명과 내기를 걸기로 결정했습니다.
1999년 2월, 항저우 후판 화위안(杭州湖畔花园).
이 곳에서 아무 로고나 간판 장식도 없는, 일반인들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작은 규모의 주택 안에 인터넷 회사 알리바바가 정식으로 출범하였습니다.
가동 자금은 50만 위안.
이 50만 위안은 일부 마윈이 저축한 것입니다.
다른 부분은 쟝팡이 제안하여 모두 자신들이 모아놓은 돈을 긁어모아 1~2천 위안씩 각출했습니다.
"나와 동료들 모두 물러설 곳이 없이 배수진을 치고 있다. 성공하지 못하면 죽어서 호국의 혼이 되리라(不成功,便成仁。)"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겐 좀처럼 납득이 가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쟝팡은 어쨌든 대학 본과 졸업생인데, 비록 수입이 많은 직장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회사에 월급을 되돌려주지는 말아야 할것 아닙니까.
더구나 한 달에 500위안의 월급이라면, 어느 회사를 가든 이것보단 높았습니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도모한 것일까요?
쟝팡은 아마도 "도박"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반만 맞은 셈입니다.
확실히 당시 알리바바는 매우 작은 회사였습니다.
심지어 마윈은 여기저기서 회사 합작을 찾아 다니느라 하루 종일 밖에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루에 10여 시간을 돌아다니고도 매일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베이징, 선전(北京、深圳)과 같은 IT 중심지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느모로 보나, 알리바바에 베팅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도박판은 종종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판단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죠.
창업 초기, 알리바바는 많은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를 들면, 한 달 동안 동분서주한 후에야 마윈이 첫 번째 투자를 물어왔습니다. 바로 골드만삭스의 500만 달러 투자 유치였죠.
그러나 이듬 해 조금 나아진 알리는, 글로벌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다시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죠.
당시 재무를 담당했던 쟝팡은 회사의 재무 상태로는 기껏해야 반년 밖에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무렵, 마윈은 이 부담을 해결하기에 충분한 주문 두 개를 받았습니다.
이치대로라면, 이러한 역경에서 이런 좋은 주문을 받으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그 다음을 이어가겠죠.
하지만, 마윈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거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두 주문 모두 리베이트를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는 '알리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두를 설득하기 위해 마윈은 몇 시간 동안 전체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쟝팡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마윈에게 대항하였고, 의심을 품었습니다.
"이걸 수락하면 살 수 있는데, 왜 안 받아요?"
마윈이 보기에 두 주문은 당장 회사의 급한 불은 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되면 회사의 가치관의 경계는 점점 더 희미해져서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회사가 오래가기 위해서는 가치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쟝팡이 줄곧 마윈을 인정하고 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처럼 회사의 앞날이 막막해지자 발벗고 뛰어다닌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임금 삭감, 감경까지 자청하였습니다.
낮에는 사무원을 따라다니며 밖에서 업무를 보고, 협찬을 받았고.
저녁엔 집에 돌아와서 사무원들의 업무를 계속 보충하고, 장부를 결제하고, 보고서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렇게 쟝팡은 2년여 동안 후회없이 필사적으로 분투한 끝에 '유암화명(柳暗花明, 아름다운 봄 경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말, 알리바바는 흑자를 내기 시작했고, 이후 자신만의 '알리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알리바바의 난관을 묵묵히 지켜주던 쟝팡은 마윈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눈앞의 어려움에 놀라 도망가는 일이 드물죠.
오히려 장애를 뚫고 까치발을 들고서 어려움 뒤에 숨은 장기적인 이익을 보지요.
쟝팡은 이런 총명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알리에서 순풍에 돛단 듯이 고위층까지 올라가려면, 단순히 이정도 가지고는 안 되겠죠. 그녀는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05. 마지막 마지노선을 지켜라
2011년, 알리바바를 상장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던 마윈은 갑자기 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B2B부문 내부에 작은 음모가 있습니다."
이 일은 크든 작든간에 확실한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가 관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윈은 인사 부서의 쟝팡을 떠올리고는, 그녀를 보내 끝까지 알아보게 하였죠.
결과는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으로, 정말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조사를 통해 쟝팡은 뜻밖에도 회사의 많은 사람들이 회사 커미션을 많이 벌기 위해 동시에 20여개의 페이퍼 컴퍼니와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시 자세히 보니, 이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고 있었는데요, 한 손에는 페이퍼 컴퍼니로 공급하고, 또 한 손에는 공급업체 리베이트를 쥐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의 수입만 해도 그들이 받는 임금의 수십배는 많았습니다.
정말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죠!
평소 조용조용히 말하던 쟝팡은 이번엔 너무 기가 막혀서 마윈에게 메일을 보내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정말 화가납니다! 지그 다행히도 저를 파견해서 이 업무를 맡겨주셨는데, 그 당시 모두들 어렵기 시작한 사업이 이런 사기꾼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망치게 할 순 없습니다!"
부드럽고 선량하던 쟝팡이 보고서에서 폭언을 퍼붓는 것을 보고, 마윈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윈의 마음은 이 일을 조사하면 할수록 싸늘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B2B 부문의 책임자였던 웨이저(卫哲)가 바로 그가 매우 좋게 보고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초 마윈은 6년의 시간이 걸려서야 웨이저를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웨이저가 알리로 부임하면서 매출이 13억 6천만 위안에서 55억 위안으로 상승하였고, 이익도 2.2억 위안에서 14.7억으로 껑충 뛰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장(大将)"에게 손을 대야 한다니, 마윈은 망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고통스럽고, 머리가 뒤엉켜 찢어질 듯 아팠다."
결정적인 순간, 눈치가 빠른 쟝팡은 마윈의 고민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녀가 보기엔, 공이 있다고 해서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알리가 항상 견지해 온 가치관이 아닐까요?
"만약 당신이 이번에 마음이 약해지면, 앞으로 어떻게 알리에 있는 직원들 23,000명을 대할 것입니까?"
쟝팡의 고집에 마윈은 눈물을 흘리며 위저를 쳐냈고, 이에 연루된 각급 책임자, 직원들을 모두 해고시키거나 감봉하는 등 엄중한 처분을 내렸습니다.
위저의 알리 사업은 여기에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물론 쟝팡이 위저와 갈등을 빚은 것도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위저를 모함한 것도 아니엇습니다.
다만, 회사의 마지노선이 무너지면 그동안 힘들게 일궈낸 펀더멘털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래서 쟝팡은 이 일로 알리에서 "절멸사태(灭绝师太)"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절멸사태"가 진을 치고 있으니, 말 그대로 회사의 마지노선에 도전할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못 믿을 사람은 있었습니다.
2012년, 취화수안(聚划算, 알리바바 산하의 공동구매 사이트)에서 또 사고가 터진 것이죠.
당시만 해도 취화수안이 전자상거래 공동구매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상인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와서 숟가락을 하나씩 얹어 나눠먹으려고 하였겠습니까. 그러자 일부 직원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였고, '뇌물의 손길'을 내밀게 되었죠.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쟝팡은 주저하지 않고 이 사건에 연루된 7명의 임원들을 감옥에 보내버렸습니다. 아울러 위반 직원 28명을 조사하여 철저히 정비하였습니다.
이후 마윈은 쟝팡을 "알리염정합규부(阿里廉政合规部)"로 이동시켜, 전문적으로 사내 부패 방지 사항에 관해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쟝팡은 혜안을 가지고 회사의 상하 윤리 마지노선을 주시하였습니다.
그녀는 마윈의 자산 동향조차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 알리인적자원부 부총재는 몰래 사사로이 260여만 위안을 받았는데, 쟝팡에게 들켜서 바로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2016년에는 알리 픽쳐서 부사장이 또 횡령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죠.
알리바바가 여기까지 온 것은 마윈이 앞에서 진두 지휘를 잘 했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쟝팡이 후방에서 회사의 존립 기반을 굳게 지켰던 것도 한 몫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알리바바 내에서 누구에게나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모두들 쟝팡에게 도움을 청하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팡 언니만 괜찮다고 생각하면 문제 없는 거에요."
농촌 아가씨 쟝팡은 뛰어난 담력과 지혜로 풋내기 여학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고, 자신의 삶의 개척을 직접 발걸음으로 내딛어 실현하였습니다.
2014년 9월 20일, 숱한 고비를 겪은 후, 알리바바는 마침내 미국 뉴욕 시장에 어렵게 상장하였습니다.
이날 종가 기준으로 알리바바의 시가총액은 2300억 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최초의 창업 멤버로서 쟝팡의 몸값은 더욱 높아져서 단숨에 40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고, 그녀는 중국 여자 부호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윈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맨 처음부터 고향을 떠났고, 돈을 벌지 못해도 마윈을 따라 창업을 하였으며,
또 다시 대중의 의견을 배격하여 직업적 윤리의 선을 유지하였습니다.
쟝팡의 현명한 의사결정 하나하나가 모두 이 말에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쟝팡이 행운아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줄 '백악(伯乐, 훌륭한 인재를 잘 알아보고 등용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요.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백악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천리마(千里马, 뛰어난 인재를 일컫는 말)'라는 칭호를 감당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여기에는 뛰어난 재주도 포함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장기적인 안목과 넓은 시야를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행운도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는 말이 바로 이와 같은 의미겠지요.
<참고기사>
蒋芳:从月薪500到身价过亿,亲手打落7名阿里高管,有权调查马云 (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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