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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메이젼(戚美珍)과 먀오챠오웨이(苗侨伟)의 천생연분 인생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83년, 홍콩 공중파에서 <사조영웅전(射雕英雄传)> 한 편이 방영된 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2년 뒤, 중국에선 전국 100여개 방송사가 연합하여 거금 50만 위안을 들여 본토로 들여왔고, 홍콩 최초의 사극 무협극인 '사조영웅전'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이에 따라서 작품에 출연했던 황러화(黄日华), 웡메이링(翁美玲), 먀오챠오웨이(苗侨伟) 등의 이름도 전국에서 뜨거운 인기를 얻었습니다.
40여 년이 지나도 이 드라마는 여러 세대에게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철혈단심(铁血丹心)>이 울려 퍼질 때마다, 칼날에 검이 번쩍이고, 원수를 갚는 명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네요.
오늘날 그 당시 스크린에서 활약하던 배우들은 여전히 촬영장을 누비는 사람도 있고,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원만한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 낳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인생은 영원히 26세로 끝나버렸는데요, 앞날이 한창 유망하고 창창하던 시기에 그녀는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해버렸습니다.
1985년 5월 14일, '챠오황룽(俏黄蓉)' 역으로 큰 인기를 얻은 웡메이링이 집에서 일산화탄소 가스를 이용해 자살한 것입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홍콩은 물론, 동남아 일대의 연예계가 들썩일 정도였습니다.
웡메이링의 사인은 제멋대로 추측되고 루머로 물들어 일순간 화살이 다른 여자 스타를 향하게 되었는데요, 그 사람은 바로 치메이젼(戚美珍)이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당시의 "TVB 칠선녀" 중의 한 사람이자, 83판 <사조영웅전>에서 '양캉(杨康)'을 맡았었고 먀오챠오웨이의 훗날 아내가 된 인물이죠.
훗날 긴 시간동안 웡메이링을 죽인 "진범"으로 그녀를 호박씨 까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이것은 터무니없는 루머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날의 치메이젼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1. 홍소화(红小花)가 되다
치메이젼은 1962년 홍콩의 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안경 장사를 하고, 가정 형편은 넉넉했으며, 먹고 살기에 걱정이 없어서 어려서부터 많은 총애를 받고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의 치메이젼은 발랄하고 솔직하고, 마치 사내아이 같은 성격으로 가족들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사랑받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녀의 집은 양조위, 주성치(梁朝伟、周星驰)와 같은 거리에 살았었는데, 몇 사람이 늘 함께 놀았다고 하네요.
주성치가 감독을 맡아서 그는 치메이젼, 양조위에게 극을 설계하고 배역을 배정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배우라는 꿈이 치메이젼의 가슴 속에 깊이 박혔던 모양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머슴아같은 티를 벗은 치메이젼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미인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자유로운 성장 환경은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신감과 우월감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냈습니다.
일찌감치 자신만의 패션 스타일을 정착시킨 그녀는 어디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죠.
1981년, 19세의 치메이젼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기 홍콩 지상파 방송 연예인 학원에 지원하여 선발되었습니다.
그녀는 리우더화, 량자후이, 우자리, 장즈량(刘德华、梁家辉、吴家丽、张之亮) 등의 인물들과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치메이젼의 성공을 보고난 후,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주성치는 좋은 형제처럼 지내는 양조위를 데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가 이름을 등록하였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들러리만 서던 양조위는 무사히 입학했고, 반면 준비를 철저히 했던 주성치는 떨어졌다고 합니다.
결과를 접하고 난 주성치는 충격에 휩싸여 스스로 집에 틀어박힌 채 답답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 뒤에 한 번 더 지원했지만, 결국 이것도 실패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가 되자, 치메이젼은 아예 자신의 선생님을 찾아가 "그는 정말 재능도 있고, 개성도 있습니다. 연기는 꼭 예뻐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에게 기회를 주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치메이젼에게는 간단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바로 이 말들이 주성치로 하여금 그에게 기회가 되어주었습니다.
치메이젼이 선생님에게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얼굴이 아닌 실력 덕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훈련 기간동안 그녀는 배역 하나, 시나리오 하나를 연구하기 위해 몇 달을 아끼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 리허설, 동선, 연기 연습을 했습니다.
비록 외모는 타고나지만, 연기는 후천적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졸업 후, 치메이젼은 전속 연예인이 되어 TVB의 간판 예능 <환락금소(欢乐今宵)>를 시작했습니다.
징다이인, 랴오안리(景黛音、廖安丽)와 함께 "환락금소 3소화(欢乐今宵三小花)"로 불릴 뿐만 아니라, 웡메이링, 치메이젼, 쩡화첸, 란제잉, 샹텐아, 리우자링(翁美玲、戚美珍、曾华倩、蓝洁瑛、商天娥、刘嘉玲)과 함께 "TVB 7선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당시 TVB의 대세 꽃이라고 하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출신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커리어도 잘 나가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 치메이젼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실력 덕후
1982년, 치메이젼은 연예계에 정식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먼저 그녀는 먀오챠오웨이와 호흡을 맞추게 되었는데, 신화 희극 <비월십팔층(飞越十八层)>에서 여주인공 장러원(张乐雯)을 맡았습니다.
인생 첫번째 드라마에서 바로 여주인공을 맡다니, 치메이젼의 커리어는 그야말로 활짝 열린 듯 했습니다.
치메이젼은 1984년에 주윤발, 천시우주, 둥웨이(周润发、陈秀珠、董玮) 등과 함께 <소오강호(笑傲江湖)>의 최초 버전의 주연을 맡았습니다.
극중에서 그녀는 간드러지고 날렵한 웨링샨(岳灵珊) 역을 맡았는데, 대중이 기대하는 이미지와 부합하는 외모에 더하여 연기력까지 결합되었고, 그녀는 웨링샨 내면의 집착과 치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연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소오강호>는 여러 차례 리메이크 되어왔지만, 시청자들 사이에서 웨링샨 하면 치메이젼 버전으로 길이 남을 정도로 여전히 대체불가능한 고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역할과 배우는 원래 서로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겠지요.
치메이젼은 "가장 아름다운 웨링샨"이었던 동시에, 그녀의 인지도도 점차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캐릭터의 비중이 크든 작든, 매 연기 기회를 소중히 여겨서 신경써서 연기했고, 자신을 완전히 캐릭터에 동화되도록 만들고, 세심하게 다듬고 깊이 연구하여 배역에 몰입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렇게 하여 <설산비호(雪山飞狐)>에서 남편을 따라 순절(殉情)한 호부인(胡夫人)을 또 한번 훌륭하게 연기해냈습니다.
<임충(林冲)>에서는 다정다감한 리스스(李师师)를 연기하였고,또한 <양가장(杨家将)>에서는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감동적인 칭렌 공주(青莲公主)를 연기하였습니다.
그리고 88판 <절대쌍교(绝代双骄)>에서 언뜻 보기만 해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화웨누(花月奴)로 변신하였습니다.
연예계에서는 결코 예쁜 사람 보다는 진정성과 끈기로 기억될 수 있는 배우만이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운과 노력, 그리고 비주얼까지 합쳐진데다 치메이젼은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어 덕을 보았죠.
점차 절정기가 가까워지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승 단계에 있던 그녀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습니다.
"누명"의 세월
젊은 시절, 치메이젼의 이목구비는 입체적이어서 마치 혼혈 미인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그녀가 고대 복장을 하고 있을 때도 전혀 위화감없이 보이고 오히려 더욱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녀보다 연상이었던 먀오챠오웨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번에 그녀가 눈에 들어오고 전기가 찌릿 통할 정도로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고 합니다.
비록 당시 먀오챠오웨이도 여명과 견줄 만큼 잘 생긴 배우였지만, 원래 미인의 곁에는 구애자들이 넘쳐나는 법이고, 안타깝게도 먀오챠오웨이에 대해 그녀는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비월십팔층>에서 호흡을 맞추며 비로소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치메이젼의 드라마 데뷔에서 먀오챠오웨이는 연기적으로 그녀에게 많은 조언과 지도를 해주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함께 지내면서 오랜 세월 정을 나누다보니, 치메이젼도 어느새 이 무감했던 선배에게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불과 몇 달 만에 짧은 연애를 끝내게 되었죠.
그때 당시의 치메이젼은 그렇게 온순하지 않았고, 먀오챠오웨이도 젊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늘 사소한 일로 다투고 짜증을 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며 그들은 헤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치메이젼에게 구애자들이 끊기진 않았습니다.
먀오챠오웨이도 메이옌팡(梅艳芳)과 희곡에서 만나 감정을 싹트게 되었고, 새로운 연정이 생기게 되었죠.
그러나 얼마동안 함께 지낸 후에, 먀오챠오웨이는 메이옌팡과 자신의 사이엔 무언가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더욱 많이 들었습니다.
연인간의 열정이 아니고, 오히려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죠.
얼마 후, 두 사람은 헤어졌고, 먀오챠오웨이는 치메이젼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지만, 두 사람은 보통 친구 사이에 불과했습니다.
두 번의 짧은 연애 끝에 먀오챠오웨이는 치메이젼이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메이젼에게 다시 맹렬한 구애를 퍼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했습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치메이젼이 남의 남자를 뺏어온 것이다, 메이옌팡의 남자를 뺏어왔다, 여우다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치메이젼은 이런 유언비어보다 자신과 먀오챠오웨이의 감정을 더욱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 그녀를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1985년, 웡메이링 자살 사건이 터지면서 언론사들이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 치메이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신문, 잡지들에서 치메이젼에게 "계략녀"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웠죠.
먀오챠오웨이와 웡메이링이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추었었는데, 치메이젼이 이것에 시샘이 나서 보복할 기회를 노렸다는 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웡메이링은 탕젼예(汤镇业)와 사귀고 있었는데, 한번은 먀오챠오웨이와 치메이젼이 탕젼예와 우쥔루(吴君如)와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치메이젼이 일부러 우쥔루를 탕진예에게 소개시켜줬다는 루머가 돌면서 두 사람이 결별했다는 것이죠.
이는 이들이 같은 드라마에서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출연하였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극중의 모습이 현실화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번진 것일 겁니다.
이런 바람이 현실화되면 당연히 대립각을 세우는 편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불량 매체들이 밑도 끝도 없이 열을 올리며 가십거리를 찾겠습니까.
이런 일로 여론은 치메이젼에게 괜한 오명을 뒤집어쓰게 하였고, 이때 치메이젼은 온갖 어려움과 사람들의 냉대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한동안 숨막히는 공격과 욕설에 휩싸여 그녀의 커리어는 곤두박질 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치메이젼은 한때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성격에 빠지기도 했고, 성미가 온순하지 않았던 그녀는 더욱 쉽게 화를 내고 욱하게 되엇습니다.
먀오챠오웨이와는 갈등과 다툼이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 "나는 평생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이때 먀오챠오웨이는 더욱 인간적으로 성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힘을 다하여 포용하고 이해하려고 애썼고, 그녀를 위해 꿋꿋하게 어둠을 헤치고 빛의 세계로 다시 들어오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1990년, 28세의 치메이젼은 먀오챠오웨이와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시끄럽던 연예계를 뒤로 하고 결혼 생활에 집중하면서 가정을 꾸려나갔습니다.
1992년에는 딸 먀오퉁(苗彤)을 낳았고, 2년 뒤에는 아들 먀오쥔(苗俊)을 낳아 아들 딸 모두 갖추고 부부는 다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은 후, 몸매가 변하고, 외부에서 어떤 말들을 하든 치메이젼과 먀오챠오웨이의 애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32년간의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두 사람은 처음처럼 달콤했습니다.
가정을 더 잘 돌보기 위해 먀오챠오웨이는 연예계에서 잠시 떠나있는 것을 택했고, 비즈니스 분야로 옮겨 안경점을 운영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스타 지인들에게도 큰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구텐러(古天乐) 디자인, 리우더화 제사(题词, 머리말), 런다화(任达华) 주식 취득 등, 먀오챠오웨이는 전방에서 보급, 판매를 담당하였고, 치메이젼은 막후에서 내부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홍콩에서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가장 잘 될 때는 50여개의 분점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함께 지내는 패턴은 더욱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냈습니다.
결혼 중에는 말다툼을 피할 수 없는데요, 두 사람의 말다툼 처리 방식은 바로 말다툼을 한다는 생각이 희미해지도록 습관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번 다투는 것을 상대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 가운데서 그들은 포용하고 양보하는 법을 배웠고, 상대방을 이해하며, 상대방의 선을 건드리지 않게 되었죠.
2002년, 먀오챠오웨이는 안경점을 호주의 한 브랜드에 매각했는데요, 소문에 의하면 매도 가격만 6천만 홍콩달러에 이른다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2004년, 연예계에 복귀한 먀오챠오웨이는 시상식에서 치메이젼에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부는 하나의 SNS 계정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네요.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애정표현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날에는 달콤한 말도 빼놓을 수 없었죠.
이들의 사랑꾼 면모에 젊은 커플들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요.
웡메이링의 사인은 3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외모가 수려했던 그녀는 가족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왔다고 합니다.
소속감과 안정감이 부족했던 웡메이링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남보다 몇 십배, 심지어 백 배의 노력도 아끼지 않았고, 더욱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사랑에 대한 불확실성을 안고 있었고, 늘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죠.
승부욕이 강하고, 독립심도 강했던 그녀는 마음이 극도로 약해서 헛된 생각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뒤숭숭한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수면제를 다량으로 삼키고 가스를 켜서 결국 이런 식으로 짧은 생명에 종지부를 스스로 찍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오랜 세월동안 누명을 쓰고 있었던 치메이젼에게는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60세가 된 그녀와 먀오챠오웨이는 결혼 생활 속에서 서로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행사에서 포착된 그들의 얼굴에 있는 웃음과, 행복으로 인해 늙어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는 사람과 결혼한 것 같고 정말 행복해보입니다!^^
<참고기사>
“一代女神”戚美珍,嫁给苗侨伟生下一儿一女,如今60岁依然美丽 (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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