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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딛고 불굴의 의지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 추이셴런(崔显仁)의 인생 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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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딛고 불굴의 의지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 추이셴런(崔显仁)의 인생 스토리

hanyuku 2022. 3. 24.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중국 북방 도시의 한 골목길에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장애가 있는 손가락으로 색분필을 쥔 채 검은 마루 위에서 글씨를 연습하는 구걸인이 있었습니다.

 

 

"글씨가 너무 예쁘다" "상상초월이다"며 발길을 멈추고 지켜보던 행인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이후 그의 글씨는 네티즌들이 온라인 상에 사진을 올려서 알려졌고, 온라인상에서 즉각적인 관심을 끌며 "분필의 귀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정사(方正公司)의 사장은 그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직접 그를 찾아가 창작 협약을 맺기도 하였다네요.

 

 

 

 

 

그는 곧바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서예 창작자에서 천만장자로 변신하였고, 인생 역주행에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정현인간체(方正显仁简体)" 글꼴의 크리에이터 추이셴런(崔显仁)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평범한 일반인에서 구걸인으로, 또 구걸인에서 천만장자로 변신하게 된 것일까요?

 

 

갑자기 당한 변고에 암담해진 인생

 

 

1993년 10월, 중국 동북지방 북단에 위치한 왕쿠이현(望奎县)은 이미 초겨울을 맞았습니다. 살을 에는듯한 찬바람에 솜옷을 입은 추이셴런은 덜덜 떨고 있었죠.

 

 

이날 그는 여느 때처럼 자기 집 삼륜차를 몰고 읍내로 장을 보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막 숨륜차를 내놓고, 텅 빈 기름 탱크를 발견한 그는 창고에 비축해둔 경유를 찾아와 기름탱크 안에 가득 부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은 그 어느때보다도 추웠고, 디젤통도 얼어서 얼음 덩어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쏟아내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급히 집을 나선 그는 미처 생각할 겨를 도 없이, 장작 더미에 불을 피워 디젤통에 불을 쬐었습니다.

 

 

그때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바로 3미터 밖으로 밀려 날아갔는데, 불과 몇 초 만에 그의 일생은 이 사고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소리를 듣고는 서둘러 달려나와봤는데, 피투성이가 된 추이셴런을 발견하고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 응급 처치를 했습니다.

 

 

추이셴런은 일단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얼굴과 양 손에 이미 심한 화상을 입고 변형되어버렸고, 손에는 집게손가락과 약지만 남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원래 태생적으로 강하고 젊었던 이 남자에게 이 사고가 가져다 준 충격은 엄청났고, 그를 단숨에 무너뜨리기 충분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의 하루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퇴원 후에도 그는 집에만 있을 뿐, 중노동은 전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도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아팠는데요, 남편을 돌보느라 원래도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던 그녀 역시 더욱 일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추이셴런은 아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고, 인생이 이대로 황폐해져서는 안된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엄지와 약지를 보고, 어렸을 때 매우 예쁜 글씨를 썼던 것을 떠올렸고, 선생님으로부터 자주 칭찬을 받았었던 것도 떠올랐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글씨로 가족을 부양할 순 없을까?"

 

 

10년 동안 열심히 연습하여, 새로운 글씨를 창작하다

 

 

비록 중,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3년이라는 짧은 초등학교 교육만이 전부였던 추이셴런이지만 그의 문체는 절대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옛사람들의 성훈을 읽고, 선대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갈고 닦으며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확고히 했습니다. 공부를 마치면 합판 하나를 구해서 그 위에 검은 잉크로 채우고, 분필을 집어들고 필기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이 말을 적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썼는데, 글씨가 삐뚤삐뚤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추이셴런은 여전히 하루에도 그치지 않고 십여 시간씩 꾸준히 연습했습니다.

 

 

아내는 핏물이 배어나오는 그의 손가락의 붕대를 갈아주면서 눈물을 훔치며 그만 쓰라고 말렸습니다. 그는 "내가 계속 써내려갈 것이다. 내가 믿지 않으면, 이대로 그냥 평생 살아가야 한다. 내가 이 두 손가락이나마 쓸 수 있어야 당신을 평생 먹여살릴 수 있지 않겠나." 이 말을 마치자, 부부는 서로를 꼭 껴안아주었습니다.

 

 

추이셴런은 나날이 해를 거듭하며 꾸준히 발전하였는데요, 그의 글씨체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삐뚤빼뚤하게 시작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수려한 모양으로 바뀌었죠.

 

 

10년의 세월동안 그의 강단과 집착이 만들어졌다

 

 

2004년, 부부는 의논 끝에 외출을 결심하였고, 추이셴런의 글씨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동북지역 각 대도시의 골목을 누비며, 추이셴런은 매일 두 손가락에 기대어 들고 다니는 가죽을 펼치고 인생의 철리 명구를 색분필로 써넣었습니다.

 

 

 

 

 

이 글귀들은 그의 10년 동안의 어려움과 고달픔을 기록한 것이었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불굴의 의지와 강단을 일깨워줬으며, 운명에 맞서는 그의 집념과 추구를 승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구걸인들을 대하는 것이 예사로운지라 단 1초도 허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추이셴런 부부 앞에서는 유독 오래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구걸인을 주시하고 있는 와중에, 그는 진지한 모습으로 장애를 입은 두 손에 남은 두 손가락으로 색분필을 꼭 쥐고 열심히 가죽 위에 아름다운 글씨를 써 넣으며, 한 획 한 획씩 그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구걸인의 서예에 감동하며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멋진 글씨를 본 적이 없다." "너무 아름다워서 서예가와 견줄 만하다" 고 칭찬하였습니다.

 

 

행인들의 찬사는 결코 추이셴런을 멈추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열심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아야만 비로소 관객들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몸이 불편한 그는 좋은 사람들의 도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그들 부부의 옆에 놓인 통 안에 행인들은 잇달아 손에 든 돈을 넣어주었습니다. 대부분 1위안짜리, 5위안짜리, 10위안 짜리들이었고, 돈은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부부에게는 일주일치 식비가 되어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부부는 돈이 너무 없어서 굶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는데요, 이럴 때에는 하루 한 개씩 찐빵을 먹고 밤에는 육교 아래나 도로변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뒤늦게 빛을 보다

 

 

동북지역 각 대 도시에서 7년 동안 구걸하던 추이셴런 부부는 동북을 떠나 옌타이(烟台)로 건너가 그의 창작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2011년, 추이셴런은 이때 이미 20년 가까이 글씨 쓰기 연습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손가락 두 개만으로 아름다운 글씨를 써내려가는 것을 보며, 점점 더 많은 행인들이 그의 창작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부터 추이셴런은 '분필기인(粉笔奇人)'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점점 더 온라인상에서 네티즌들의 관심이 높아져갔습니다.

 

 

한 친절한 네티즌은 웨이보에 '분필기인'이 만든 사진을 게시했습니다. 사진 속 추이셴런은 장애를 가진 손으로 글씨체를 예쁘게 썼는데요, 비록 구걸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의 자력갱생의 의지는 존중할만 합니다.

 

 

이처럼 추이셴런은 많은 네티즌들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웨이보에서 여러 차례 공유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추이셴런의 귀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이 사람은 바로 훗날 추이셴런 부부의 인생을 뒤바꾼 '방정자고(方正字库)'의 사장입니다.

 

 

'방정자고'는 중국의 유명한 폰트 제공업자로서, 추이셴런이 창작한 열정과 그 정신에 깊이 탄복하였고, 그것을 공식 웨이보에도 게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지로 추이셴런에게 경의를 표하는 한편,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며 많은 네티즌들에게 이 '분필기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중과 힘을 합쳐 이 부부를 돕는데 나섰죠.

 

 

 

 

 

 

군중의 힘은 대단하여, 매우 빠르게 칭다오(青岛)에서 이 분필기인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추이셴런 부부는 웨이하이루(威海路)의 한 인도 위에서 구걸하고 있었는데, 그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물론 방정사(方正公司) 사장 왕하이차오(王海潮)도 포함되어 있었죠.

 

 

왕하이차오는 주동적으로 앞으로 나서서 찾아온 뜻을 설명하지 않고, 다른 행인들과 함께 서서 진지하게 이 분필기인의 창작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왕하이차오는 이 아름다운 글씨에 감동하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추이셴런이 창작이 끝나 물건을 챙기고 떠나려 할 때, 왕하이차오는 서둘러 자기 소개를 하며,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추이셴런은 당황한 듯, 눈 앞에 내밀어진 이 호의에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왕하이차오는 이어서 "이렇게 하죠, 추이 형님, 제가 당신이랑 누님한테 밥을 살 테니,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합시다."

 

 

추이셴런 부부도 동의하였고, 왕하이차오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왕하이차오는 추이셴런 부부를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고급 호텔 같은 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 가면 괜히 더 두 사람이 불편해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국수집을 찾아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왕하이차오는 자신의 회사 상황을 소개하면서, 추이셴런의 글씨에 매우 시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응용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어서 향후 광고 시장에도 충분히 내놓을 수 있는 만큼 상업적 가치가 크다고 덧붙였습니다.

 

 

 

 

 

추이셴런은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내와 상의해보겠다며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습니다.

 

 

거지에서 천만장자로 역전하다

 

 

국수집을 나온 뒤 아내는 추이셴런에게 "내 생각엔 이 왕씨가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말 하는 것도 조리있고, 당신이 글씨를 쓰는 것이 우리의 삶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이 왕 씨는 당신의 글씨를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을거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바로 당신이 바라는 바잖아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내에게 이 점을 지적받은 이후, 추이셴런은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고, 여러 해 동안 연습한 끝에 오늘날 드디어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왕하이차오가 다시 찾아왔을때, 추이셴런은 자신의 글씨를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협력하기로 하였습니다.

 

 

 

 

 

왕하이차오는 이어서 "우리 회사에 당신의 글씨를 수록하려면 당신이 6763자를 써야 하는데, 이 글자를 반드시 하나하나 다 써야 한다. 우리는 나중에 기술적인 처리를 거쳐서 시장에 내놓아 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당신이 몸이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다."

 

 

추이셴런은 즉시 동의했고,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자신이 이 모든 글자를 다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하이차오는 그 자리에서 추이셴런 부부에게 5만 위안을 건네며, 사전 저작권료라고 하였고 부부에게 생활 여건을 개선하라고 하였습니다.

 

 

추이셴런 부부는 눈 앞의 이 거금을 바라보며 너무 무거운 큰 돈이라고 생각하였고, 망설였습니다.

 

 

왕하이차오는 추이셴런에게 자신은 그의 서체 실력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고, 그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추이셴런은 그제서야 걱정을 덜고 조심스럽게 돈을 받아들였습니다.

 

 

왕하이차오와 추이셴런은 이후 정식으로 위탁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 협의에서는 글씨체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풀리면 50년 동안 발생하는 이익은 모두 추이셴런에게 돌아간다는 부분을 명시했습니다.

 

 

 

 

 

추이셴런은 곧 6763개의 글자를 모두 써서 왕하이차오에게 건넸습니다. 왕하이차오는 "추이형님, 당신은 정말 대단하군요. 당신은 진정한 서예가입니다!"라고 감동하였습니다.

 

 

현재 추이셴런의 글씨는 방정자고(方正字库)에 수록되어 있으며, 추이셴런에 대한 존중과 경의를 나타내는 의미로 "방정현인간체(方正显仁简体)"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이 글씨체들은 점점 더 많은 광고에 사용되고 있으며, 추이셴런은 이로 인해 천만 위안 이상의 수익을 올렸지만, 그는 이것 때문에 글씨를 쓰는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위해 문을 닫아주셨지만, 동시에 너를 위해 창도 열어주셨다고 하지요. 추이셴런은 자신의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만의 글씨를 만들어 인생 역전에 성공하였습니다.

 

 

<참고기사>

有“尊严”的乞讨者崔显仁:苦练10年粉笔字,从乞丐逆袭千万富翁 (baidu.com)

 

有“尊严”的乞讨者崔显仁:苦练10年粉笔字,从乞丐逆袭千万富翁

九十年代末期到二十一世纪初,在我国北方城市的大街小巷,有这样一位乞讨者,拖着残疾的身体,用不健全的手指握着彩色粉笔,在一张黑色的地板革上练习着书法。 “他写的字太漂亮了”、

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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