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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재벌가 출신 궈후이광(郭惠光)은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일까?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홍콩 재벌가의 금지옥엽에 대해 말하자면,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바로 궈후이광(郭惠光)이라는 사람인데요. 이 이름은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2의 허차오총(何超琼)이라고 할 정도의 인물이라고 하네요. 출신도 좋고 얼굴도 예쁜 궈후이광은 현재까지 수십 개의 호텔을 물려받았는데요, 궈후이광에겐 허차오총에게는 없는 중요한 것이 더 있다고 합니다. 바로 행복한 결혼과 높은 학력이라고 하네요. 허차오총의 인생에는 약간의 결점이 있긴 하지만, 궈후이광에게는 결점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궈후이광의 아버지는 바로 2천억 위안의 재산을 가진 말레이시아 최고부자인 궈허넨(郭鹤年)입니다. 베이징 궈마오, 진룽위(金龙鱼), 샹그릴라 호텔, 곳곳에 널려 있는 자리 센터(嘉里中心)가 모두 궈허넨의 재산입니다. 그러니 궈허넨의 재산은 절대적으로 매우 과소평가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네요.
궈허넨의 재산은 공식적으론 100억 달러에 불과하지만, 실제 궈허넨의 재산은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합니다. 진룽위의 시가 총액은 한때 수천억 위안대에 달했고, 궈허넨은 펑이 인터내셔널(丰益国际)을 통해 진룽위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펑이 인터내셔널의 시가 총액은 1700억에 불과하다는데요, 즉 궈허넨의 자산이 과소평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궈후이광은 궈허넨의 두번째 부인 허바오롄(何宝莲)이 낳은 자녀입니다. 1978년에 태어난 궈후이광은 비록 금수저였지만, 무척 의기소침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매우 조용했다고 합니다. 궈후이광은 홍콩의 다른 명문가 금지옥엽들이랑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궈후이광은 소박한 스타일이고, 언론 앞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또한 그녀는 책을 읽는데 무척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궈후이광은 이후 하버드대에 입학하는데 성공하여 동아시아 연구를 전공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궈후이광은 <남화조보(南华早报)>의 대표이사가 되었습니다. 남화조보는 홍콩 최대 신문 매체 중 하나입니다.
이후 궈후이광은 업무 실적이 뛰어나 회사의 이사장과 행정회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이제 궈후이광은 자리 그룹(嘉里集团) 산하 핵심 호텔 사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샹그릴라 호텔이 궈허넨의 자산인 것으로 알려져있는데요, 오늘날 궈허넨은 전세계 5성급 호텔을 궈후이광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궈후이광도 100억 위안대 여성 부호가 되었습니다. 궈후이광은 여동생 궈옌광처럼 얼굴이 아주 예쁘다고 합니다. 동생의 과감한 성격과는 달리 궈후이광은 청순한 쪽이라고 하네요. 궈후이광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55세였지만, 부녀지간은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궈후이광은 사업적으로도 아버지의 안목을 물려받았다고 하네요.
특히, 궈후이광의 남편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궈후이광의 남편 우지린(吴继霖)은 홍콩 공쯔멘 대왕(港公仔面大王) 저우원쉔(周文轩)의 외손자입니다. 우지린은 명문가 출신이자, 프린스턴대 출신으로, 현재 그 역시도 자리 그룹(嘉里集团)에서 일하고 있으며, 자리 건설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자리 건설은 숨어있는 부동산 업계의 거물로, 총자산이 2천억 위안에 달하며, 중국 본토와 홍콩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궈후이광의 아버지 궈허넨은 중국에서 단연코 최후의 덕망있는 사업가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당시 궈허넨은 나라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70년대 중국은 열강에 봉쇄정책을 펼치며 국내에 물자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 정부는 궈허넨을 찾아가 봉쇄를 뚫고 설탕을 싸게 사와주길 바랐습니다.
궈허넨은 결국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국가에 외하 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등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80년대 베이징은 궈마오(国贸)를 발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외자회사들은 모두 터무니없이 많은 물질적 요구를 했었다고 합니다. 궈허넨은 이 프로젝트를 중국인 스스로가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업을 거의 접고, 자금을 모두 빼내어 이 사업에 투입하였습니다. 그래서 궈허넨은 5억 달러를 들여 궈마오의 초석을 발전시켰습니다. 당시 궈허넨의 투자를 곱지않게 보는 시각이 많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때 당시 궈허넨이 이곳에 5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은 무척 위험이 컸고,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궈허넨이 걸었던 도박같았던 이 모험은 크게 성공하였고,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궈허넨 본인에게도 큰 보답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궈마오에서는 연간 20~30억 위안의 수입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죠.
궈허넨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동남아로 향했습니다. 당시 푸젠성(福建) 사람들은 차오산(潮汕) 사람들과 함께 난양(南洋)으로 내려간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중국인들이 생존을 위해 외국에서 일하며 자수성가 하였는데, 궈허넨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궈허넨은 집안의 막내 아들이었지만, 그의 능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가업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궈허넨은 가업을 물려받은 이후, 처음에 제당업(炼糖业)에 크게 투자한 후, 나중에는 목재소와 항운회사에 투자하는 등의 사업으로 말레이시아의 최고 갑부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아시아 설탕왕으로 불리며 전세계 제당(炼糖) 생산량의 7분의 1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궈허넨은 80년대 이후, 대대적으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외국으로 이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궈허넨 가족들은 자신들이 중국인임을 자처하였다고 합니다. 궈허넨 자신은 이후 홍콩에서 장기 거주하였습니다. 2012년에 궈허넨은 CCTV에서 올해의 경제인물 평생 공로상을 받았을 정도로 명망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父亲坐拥2千亿身家,却在55岁才生下她,如今她继承了几十个酒店
说到香港的豪门千金,有一个人不得不提到,这个人就是郭惠光了。郭惠光估计很多人都没听过。不过郭惠光堪称是第二个何超琼。郭惠光出身好、长相漂亮,如今还继承了几十个酒店,关键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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