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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상업적인 안목을 지녔지만,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난 왕쥔야오(王均瑶)의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저우(温州) 사람들의 대담함을 알고 있지만, 왕쥔야오(王均瑶)를 모른다면 원저우 사람들의 대담함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왕쥔야오는 38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죽기 전에 이미 백억 위안의 몸값을 이룩하게 된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의 상업제국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네요.
왕쥔야오는 바로 원저우 사람들의 대담함의 대표격인데요, 사실 원저우 사람들이 대담한 것은 그들이 생각이 있고, 실행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되는 것이죠. 소수의 중국인들만이 비행기를 타보았던 시절, 왕쥔야오는 관련 부서에 달려가 비행기 한 대를 대절하여 고향 사람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설을 쇠게 하였고, 이것으로 20여만 위안을 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의 발전을 알지 못하던 시절, 왕쥔야오는 몇 백대의 택시를 팔아버리고 상하이에 가서 빌딩을 하나 샀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빌딩은 왕쥔야오 가문을 위해 백억 위안에 가까운 돈을 벌어다주었습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택시는 번듯한 장사였습니다. 당시 경제가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 자가용은 없었지만, 집을 나서서 택시를 잡아 타는 것은 하나의 신분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상하이의 부호 리우이첸(刘益谦)은 당시 상하이에서 택시를 몰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당시 택시를 2년 달리면 차 한대 값을 벌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왕쥔야오는 이미 전세기와 우유 장사로 큰 돈을 벌어들인 상태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왕쥔야오는 고향의 택시회사가 공개 입찰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왕쥔야오는 이미 많은 돈을 벌었고, 새로운 사업을 찾아 곧바로 투자에 나섰습니다.
결국 왕쥔야오는 대당 70만 위안의 가격으로 수백 대의 택시 운행권을 따냈습니다. 사실 왕쥔야오가 택시에 투자한 것은 일석이조였다고 합니다. 첫번째 이유는, 택시 사업이 정말 잘 되어서 수백 대의 택시가 길을 달리며 매일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왕쥔야오가 택시로 자신의 우유 장사를 광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90년대 초반, 중국인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우유를 적게 마신다고 판단한 왕쥔야오는 쥔야오유업(均瑶乳业)을 창립하여 우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쥔야오 우유가 원저우에서 출시되기 시작하였죠.
1998년, 수백대의 택시에 쥔야오 우유 광고를 칠한 뒤 원저우 시내를 돌아다니자, 곧바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택시들이 매일 거리를 달리는 것은 움직이는 광고판이나 다름없었고, 쥔야오유업의 매출을 견인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처음에 왕쥔야오가 택시 1대당 70만 위안을 썼으니, 너무 비싸게 산 거라 돈을 벌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쥔야오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택시 사업이 안정되자 그는 갑자기 택시 사업을 팔아치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택시 사업이 무척 잘 되었기 때문인데요, 4년 뒤, 왕쥔야오가 70만 위안에 샀던 택시를 80만 위안에 되팔았습니다. 택시 몇 백대로 왕쥔야오는 단번에 몇 억 위안을 현금화할 수 있었죠,
당시에는 몇 억 위안이라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왕쥔야오는 평생을 먹고사는데 충분했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왕쥔야오는 부동산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2002년,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은 부동산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는데요, 그 때는 부동산의 발전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샀다가 몇 년후에 팔았는데, 그러면 집이 낡았을 뿐만 아니라 집값이 떨어져서 더 싼 값에 팔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왕쥔야오는 부동산이 유망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2002년 상하이의 쟈오자방루(肇嘉浜路)에 진후이 빌딩(金汇大厦)을 구입하였고, 이름을 쥔야오 국제광장(均瑶国际广场)으로 바꿨습니다. 이 오피스텔 빌딩은 상하이 최초로 민간 기업의 이름을 딴 갑급(甲级) 오피스텔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왕쥔야오는 쥔야오 그룹(均瑶集团)의 본부를 상하이로 옮기고 더욱 빠른 발전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왕쥔야오가 크게 도약을 준비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는 병이 났습니다. 당시 쥔야오 그룹은 상장을 준비중이었는데요, 왕쥔야오는 따샤 그룹(大厦集团) 인수에 참여하여 8개 회사 중 성공적으로 선발되어 차용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왕쥔야오가 인수에 성공한다면 상장하는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왕쥔야오는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고, 그는 회사의 발전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가명을 쓰고 입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치료를 시작한지 8개월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쥔야오가 사망하기 전, 그는 자신의 자산을 세 몫으로 나누었는데요, 그의 아들에게 쥔야오 그룹 주식 40%를, 두 동생에게 쥔야오 그룹 주식 5%를 각각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왕쥔야오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두 동생들과 따로 떨어져 분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지만,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자, 왕쥔야오의 두 동생은 힘을 함쳐 쥔야오 그룹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래서 왕쥔야오가 물려준 자산도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왕쥔야오가 인수했던 쥔야오 국제광장은 여러 해 동안 임대료 수입과 부동산 가치의 상승까지 겹쳐서 왕쥔야오 가문은 백억 위안 가까이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쥔야오의 상업적인 안목은 정말 대단했지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더 엄청난 일들을 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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