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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릉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도굴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도묘필기(盗墓笔记)>라는 소설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이 소설 속에서는 큰 무덤의 도굴에 대해 많이 쓰여 있는데, 커다란 무덤마다 무수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어서 수많은 도굴꾼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게 하였죠.
그러나 중국에는 16명의 황제가 묻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도굴꾼들이 감히 도굴하지 못하고 있고, 오늘날에는 고속철도까지 빙 둘러 돌아가야 하는 "중국 최고 선산"이 있다네요.
이 선산은 도대체 어느 집안 선산일까요? 이것은 바로 주(朱)씨 집안의 선산이라고 하는데요, 바로 그 명나라 주원장(朱元璋) 집안의 선산입니다.
주원장과 명나라 황릉 건설의 연원(渊源)
주원장이 명나라 황제가 되기 이전에 그는 그저 농민 출신의 평민으로, 가정 환경도 좋지 않고, 지주에게 소를 몰아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홍건군(红巾军)에 참가하여 부단한 노력 끝에 원나라의 폭정을 무너뜨리고, 대명조(大明朝)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중국의 종법제도(宗法制度)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기에, 주원장같은 소농 가정조차도 종법제도를 준수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고대에는 관혼상제는 종족대사(宗族大事)였는데요, 주원장의 부모, 형과 형수가 모두 그가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그는 아무도 없는 빈 땅을 찾아가 자신의 가족들을 안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랫동안 그가 돈을 모아서 사온 관이 안장되려다가 갑자기 쏟아진 큰 비에 떠내려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원장은 하는 수 없이 가족들을 대충 장사지낼 수밖에 없었고, 장사지내는 곳에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비석을 세웠습니다.
주원장이 즉위한 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바로 부모와 가족들이 안치된 곳이 너무 허름하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고향에 중도성(中都城)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주원장은 중도성 축성이 완료되자, 남은 축재들을 사용하여 다시 한번 부모님의 능을 보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명황릉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황릉 북문에는 "신도(神道)"가 있고, 양 옆에는 서른두 쌍의 훌륭한 솜씨로 만들어진 석상이 있으며, 신도 남쪽 끝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는 황릉비(皇陵碑)이고, 또 하나는 무자비(无字碑)입니다.
황릉비에는 주원장의 여러 해 동안의 종군 생활과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사학 연구자들에게 명나라의 역사와 주원장을 연구하는 첫번째 역사적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4년에 걸쳐 명황릉이 완성되다
명황릉은 규모가 크며, 내부에는 임원, 석비, 제단, 조각상(林园、石碑、祭坛、雕像) 등과 기타 다른 건물들도 있습니다. 또한 황가능묘(皇家陵园)의 웅장함과 주원장이 황릉 건설을 중시한 역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명황릉은 현재까지 아무도 감히 도굴하지 못하고 있고, 그 안의 시설들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위로는 제왕세가(帝王世家)부터 아래로는 평민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풍수 학설을 매우 신봉하였습니다. 주원장은 황제가 되었을 때, 부모의 묘소를 옮기려고 했지만, 그의 곁에 있던 어용풍수선생(御用风水先生)이 옮기지 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풍수 선생은 주원장의 부모가 안장된 지역이 풍수가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였고, 한 마리의 와룡이 수호하고 있는 곳이니, 능묘를 보수한다면 주씨 집안의 후손들이 여러 대를 이어 명나라 왕조의 강산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원장은 풍수 선생의 말을 믿고 부모가 묻혀 있는 곳에 황릉을 보수하였습니다.
명항릉이 아직까지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지 않은 이유는 풍수적 위치 뿐만 아니라, 역대 명황릉을 지키고 있는 간수들의 등급이 높았기 때문에 도굴꾼들이 침입할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청나라 군사가 들어와서 며황릉을 파괴하기는커녕, 강력한 군대를 보내 명황릉을 지키게 함으로써 도굴꾼들의 도굴 시도를 차단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청나라 황제가 명황릉을 크게 파괴하지 않은 것은 통치를 공고히하고 한인들을 달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명황릉의 내부 구조는 입구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여 많은 도굴꾼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중국 성립 후에도 명황릉에 대한 탐색이 있었는데, 당시 국가고고대(国家考古队)는 명 성조 주체(明成祖朱棣)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고고대의 많은 사람들은 명 성조의 장릉을 둘러싸고 한참 동안 능의 입구를 찾지 못하였고,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국가 고고학 연구팀 같은 전문팀조차 능묘의 입구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인데, 전문가들보다 밑에 있는 도굴꾼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능을 지키는 군대를 경계하고, 한편으로는 능의 입구도 찾아야 하는데, 입구가 도통 찾아지지 않으니 도굴꾼들도 묘를 바라보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죠.
명황릉은 아직까지도 민간에 수많은 소문이 무수하다는데요, 그 안에 수많은 기관, 그리고 고대 흉수들이 지키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는 것도 황릉의 보안등급과 신비스러움에 더욱 색채를 더하였습니다.
황릉이 능의 최고 설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청황릉(清皇陵)은 명황릉에 비해 너무 단순한 설계라고 합니다.
유명한 대도(大盗) 손전영(孙殿英)이 청황릉을 샅샅이 도굴해냈었는데, 청황릉이 구조가 단순하고 야외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려움이 줄어들었다고 하네요.
황릉와룡(皇陵卧龙)은 명나라의 영광을 이어 16대 황제로 이어졌습니다.
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풍수는 그리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명나라 왕조는 와룡이 도사리고 있는 명황릉을 건설한 후, 16대 황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지요.
주씨 집안은 전후로 16대 황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두 명이 명나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원나라의 폭정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입니다.
또 하나는 명 성조(明成祖)라고 불리는 주체(朱棣)인데, 주체는 중앙 통치를 공고히하고, 번왕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영락대전(永乐大典)>을 저술하여 영락성세(永乐盛世)를 열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주체는 정화(郑和)가 서양으로 내려와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죠.
개국 황제 주원장부터 시작하여, 북경에서 스스로 목을 맨 주유검(朱由检)에 이르기까지, 명나라는 약 270년간 지속되어 중국에 많은 저력과 문화재를 축적하였습니다.
명승고적을 위해 고속철도도 황릉을 빙 돌아야 한다
중국은 고대 4대 문명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문화적 저변과 유적을 매우 중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은 경제 발전과 기반시설 건설뿐만 아니라 문명고적의 보호도 중시하고 있습니다.
고속도로와 고속철은 중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반시설이었는데, 건설이 시작되었을 때, 경호철로(京沪铁路)는 명황릉 전체를 관통하게 되었고, 만약 우회할 경우 2억 3천만 위안이 더 드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 중 문화적 가치를 더욱 중시하였기 때문에, 경호철 계획 담당자는 명황릉을 피해 예산보다 2억 3천만 위안이 더 드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문화유적 하나하나가 바로 한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이며, 국가의 자랑거리라는 것에 사회적인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中国最牛祖坟,后代出了16位皇帝,一直无人敢盗,高铁都要绕着走
谈起盗墓,相信很多人都能想到《盗墓笔记》这本小说,书中写了很多大墓的盗取,每一个大墓里面都藏着无数的财宝,让许多盗墓贼都趋之若鹜。 可是,有这么一个“中国最牛祖坟”,里面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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