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yuku
골동품 노점에서 발견한 희귀한 고서적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80~90년대 중국에서는 국가가 막 "진규교조(陈规教条)"를 타파한 시기라, 혼란을 틈타 수많은 문화재가 민간으로 유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골동품 시장이나 가판에서 귀한 문화재들을 주워왔고, 어떤 것들은 현재 한 집안의 대단한 소장품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골동품에는 한계가 있어서, 민간에 나도는 진짜 골동품들은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고, 또한 더욱 발견되는 수량은 적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중에서는 여전히 큰 보배를 싼 값에 구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기도 하지요.
일반적으로 이런 횡재를 주운 경우 주로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요, 집안 살림이 넉넉하여 이런 보배들을 개인소장 해두거나, 혹은 경매에 비싸게 내놓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푸젠성 푸저우(福建福州)의 한 남자가 바로 이 두가지 부류 중 후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는 1만 위안을 주고 낡은 고서적을 한 권 샀는데, 나중에 500만 위안에 경매에 내놓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가 뜻밖에도 2600만 위안으로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1만 위안을 들여 북송 고서(北宋古籍)를 사다
불혹의 나이에 가까운 왕 선생은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는 골동품을 소장하는 것을 즐겼는데, 푸저우(抚州)와 난창(南昌)에서 두 개의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2012년 봄, 왕 선생은 난창에서 일하다가, 한 골동품 시장의 노점에서 큰 보배를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왕 선생은 노점에 가득 찬 골동품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골동품들에 별로 흥미가 일지 않았지만, 오히려 노점 앞에 비닐 봉지에 싸인 너덜너덜한 고서적에는 무척 흥미가 생겼습니다.
왕 선생은 여러 해 동안 골동품을 즐기면서 골동품 업계가 돌아가는 이치를 깊이 알고 있었는데요, 박스 안의 고서적들을 별로 관심없는 척 탐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노점상들이 자신이 이러한 물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비싼 값을 부르거나 아예 팔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왕 선생은 좌우를 돌아보며 그냥 슬쩍 가볍게 대충 들여다보는 척 했는데요, 간단히 훑어만 보았지만, 이 상자 안에 들은 물건이 만만치 않은 것이라고 단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먼저 다른 물건들을 산 뒤 떠나기 직전에야 그것을 만 위안의 가격으로 손에 넣었습니다.
왕 선생은 고서를 집으로 사들인 후, 살펴보았는데요, 그것은 파손과 오염이 매우 심각하여 많은 곳의 종이가 빠지고 벗겨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물 모양의 불규칙한 모양으로 구멍도 많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쪽의 몇 페이지는 접히는 손상이 심해서 거의 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 선생은 이 고서가 진귀한 보배라고 생각하였고,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모든 고서에 선지(宣纸)를 받치고, 한 페이지마다 선지로 받쳐 놓은 고서를 새로운 잡지 안에 보관하다가, 마지막으로는 정교한 지피(纸皮)로 표구하였습니다.
왕 선생의 집안은 살림이 넉넉했었기 때문에 원래 그는 이 고서를 개인 소장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한번 장사에 실패하고나서, 그는 이 고서를 팔아 돈으로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2012년 가을, 왕 선생은 장시성 도서관(江西省图)의 지도자를 찾아가 자신이 송나라 고서를 가지고 있다며 소장품을 살 의향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장시성 도서관의 지도자와 전문가는 한 차례 그것을 감식한 후, 초보적인 감정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은 분명 북송의 <경우예부운략(景祐礼部韵略)>인데, 진품의 가능성이 비교적 크지만, 좀 더 권위있는 전문가의 추가 감정을 해야 견적을 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이것이 국내외를 통틀어 유일한 고본(孤本)일 가능성이 크고,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만큼, 만약 먼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단연코 박물관에 진고 수장(镇库馆藏)해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습니다.
누더기 고서적은 진품이었다
고서적의 진위를 한층 더 확정하기 위함과 동시에 합리적인 가치를 견적내기 위해, 강서성 도서관의 지도자들은 쉬지않고 국립도서관(国图)에 전화를 걸었고, 권위있는 전문가인 이치충(李致忠) 선생과 상하이 도서관 역사문헌센터(上海图书馆历史文献中心)의 진선행(陈先行)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함께 난창으로 가서 오래된 고서적 한 권을 감정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중국 내에서 고서 연구의 권위자들로서, 또 다시 고서가 세상에 나왔다는 말을 듣자, 두 사람은 모두 흥분하여 난창으로 달려갔습니다.
장시성 도서관도 그들이 감정한 후에 매입 가격을 제시하겠다고 거듭 강조했기 때문에, 이치충 선생은 도중에 또 자신의 친한 친구인 위력(韦力)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그에게 함께 난창으로 가자고 청했고, 실전(失传)된지 오래된 고본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위력 선생은 중국내 민간 고서적 연구와 소장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고사의 시장 가치 평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2012년 11월 어느날, 장시성 도서관의 초청으로 이치충, 진선행, 및 위력 일행은 난창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일행과 장시성 도서관, 서적 주인 3자가 난창 호텔 회의실에서 고서적 감정을 하기로 합의햐였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 8시쯤 되자, 3자는 회의실에 도착하였고, 서적 주인인 왕 선생은 그의 부친을 모시고 함께 앞으로 나왔습니다.
회의실에 도착한 후, 왕 선생은 자신이 어떻게 책을 소장하게 되었는지 내력을 대강 들려주었고, 부동산 사업으로 인해 손해를 입었다며 책을 팔아 돈을 융통하려고 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시성 도서관의 세 지도자들과 전문가들에게 부탁하여 고서적의 진위에 대한 판단과 대략적인 정보를 부탁드린다고 소개하였죠.
책 주인과 장시성 도서관측의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난 후, 참다못한 위력은 장시성 도서관 지도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지도자 여러분, 당신들은 이 책을 얼마 정도에 팔건지 이야기했었는지요?"
장시성 도서관 지도자들은 한 손바닥을 쫙 펼쳐 내밀었습니다.
"오십만?"
그러자 지도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오백만이요! 그래서 전문가들을 모셔와서 감정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위력은 듣자마자 숨을 들이켰습니다. 이 가격은 오랜 세월동안 고서를 침음했던 자신에게도 흔치 않은 가격이었기 때문에 그는 과연 어떤 책이길래 그런 것인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그때 이치충 선생이 위력에게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습니다.
위력은 성질이 급해서, 책을 만나기도 전에 가격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적 주인에게 책을 먼저 꺼내어 모두에게 보여준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부탁에 따라 왕 선생의 아버지는 탁자 밑에 있던 가방에서 고서적을 들고 나왔는데, 그 안에는 표구한 고서적 <경우예부운략>이 들어있었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 고서적의 외양은 모두를 한숨짓게 하였는데요, 표면의 오염과 파손도 심했을 뿐만 아니라, 접힌 자국도 뚜렷하였고, 선지를 박아넣어 잡지 위에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5백만 위안의 값어치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고서적의 가격은 외관으로 천박하게 논할 수는 없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 안에 기록된 문자에 담긴 역사와 인문학적 가치입니다. 또한 이 고서는 유일한 고본이기 때문에 사학 논조를 깨뜨릴 수 있을만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존재였죠.
세 사람이 자세히 연구한 후, 이치충 선생은 이 고서적의 역사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우예부운략>은 실제로 북송시대 송나라 인종(北宋宋仁宗) 경우 4년(景祐4年), 송나라 인종의 명을 받아 유정도(由丁度) 등의 사람들이 "협운 13처를 간정(刊定窄韵十三处)"한 것으로, <경덕운략(景德韵略)>을 간정하여 개정한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북송 판본의 <신화자전(新华字典)>으로서, 학자(学子)들의 과거 시험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책의 사용도, 제본, 편찬 스타일, 문자 기재와 낙관이 찍힌 것에 대한 감정 결과를 보면, 이것이 진적(真迹)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적 주인 왕 선생이 이치충 선생에게 감정가를 물어보았을 때, 장시성 도서관 지도자들은 현명하게도, 먼저 왕 선생 부자에게 책을 가지고 돌아가시기를 청했습니다.
회의실에 전문가들과 장시성 도서관 지도자들만 남았을 때, 이치충 선생은 논조를 바꾸어 이렇게 딱 잘라 말했습니다. "이 책은 틀림없는 진적이다!"
그러자 지도자들은 위력에게 이것이 500만 위안의 가치가 정말로 있느냐고 물었고, 위력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정말 이 선생 말대로 진적이라면, 이것은 미발견된 송나라 판본 한 권이다. 이 정도면 절대적으로 그럴만한 값어치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위력은 장시성 도서관 지도자들이 잠시 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이 고본을 사들이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나중에 다시 이 고서적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2600만 위안의 가격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방향을 틀어 경매에 내놓아 2600만 위안이 되다
위력은 후에 장시성 도서관에서 <경우예부운략>을 놓친 뒤, 자신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이치충 선생은 군자협정(君子协定)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이치충은 이러한 고본은 국립 도서관에 기증해야 더 나은 수리와 보호 수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는데요, 당시 왕 선생은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치충은 이해는하였습니다.
이치충은 이 책을 국립 도서관에 포함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민간인의 소장품이기 때문에 위력 역시도 손을 댈 만한 신분이아니었죠.
2013년 가을, 베이징광시 경매회사(北京匡时拍卖公司)에서 나온 소식에 의하면, 국내외 고서적 판도를 들썩이게 한 북송의 <경우예부운략> 고본이 가을에 경매될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광시는 고서경매의 프로답게 가능한 한 <경우예부운략>의 높은 낙찰가를 얻기 위해 이 서적의 전기를 서술하는데 꼼꼼하게 공을 들였습니다.
그는 전문가들의 발표회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중개인들을 끌어들였고, 이에 대해 다투어 보도하면서 일부러 이 책에 대한 도록도 냈습니다.
이 책의 진실성을 확정하기 위하여 광시에서는 특별히 10여 명의 고서적 전문가들에게 청하여 전문적인 세미나를 진행하였는데, 여기에 참가한 전문가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제시하여 한점의 의문도 품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당시에 광시는 이 서적의 가격을 800만~1000만 위안 정도로 매겼지만, 12월 4일 경매 당일, 경매가 시작하자마자 1500만 위안까지 치솟았습니다.
결국 몇몇 큰 손들의 각축 끝에 2600만 위안의 높은 가격으로 난징 도서관에 낙찰되었고, 수수료까지 합치면 2990만 위안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왕 선생과 광시는 모두 큰 돈을 벌었습니다.
<경우예부운략>은 정말 2600만 위안의 가치가 있을까?
오늘날 <경우예부운략>은 이미 난징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년 만에 고서적 분야에서의 대발견"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난징 도서관의 이러한 평가에 대해 국가고적보호센터 사무실 주임 임세전(林世田)은 현재 불교 경전을 빼면 20부가 채 안 되는 북송 시대의 판본에 속하며, <경우예부운략>은 최근 몇 년간 새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고적이고, 오늘날 우리의 <신화자전(新华字典)>에 해당하는 서적이며, 북송 학자들의 과거시험 기본 서적으로서 시험장에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던 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무척 연구 가치가 높은 서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경우예부운략>이 왜 이렇게 비싼 것인지 역사인문학적 가치와 희소성 두 가지 방면으로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먼저, 역사인문학적 가치를 보겠습니다.
북송 시대, 특히 송 인종때 경제가 융성하였고, 문화의 발전도 전성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 서적 자체의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송 시대에는 과거 시험으로 조정에서 학자를 등용하였습니다. 이때 시험에서 시경(试经) 뿐만 아니라, 시부(诗赋)도 보았으며, 글을 잘 쓰는 동시에 글자의 조율이 평평하고 운이 맞아떨어져야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 내에서 주안이 되는 중요한 글자가 절대로 주상자휘(主上字讳)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역대 황제의 이름과 같은 글자가 나와서는 안 되며, 이는 큰 죄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래서 학자에게 자운을 규범화하는 한편, 공부에도 도움을 주기 위해 범휘(犯讳) 여부를 시시각각 검증할 수 있도록 북송판 신화자전인 <예부운략(礼部韵略)>이 생겨났고, 이것은 속칭 "관운(官韵)"이라 불렸습니다.
왕체(王棣) <연익이모록(燕翼贻谋录)> 1권에서는 "国初进士科场尚宽,礼闹与州郡不异。景德二年七月甲戌,礼部贡院言,举人除书案外,不许将茶厨、蜡烛带人,除官韵外,不得怀挟书策,犯者扶出殿一举。” 이러한 구절이 있는데요, 이것에서 북송 경덕 2년에 이미 시험장에 "관운(예부운략)"을 들여와 응시할 수 있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송나라 정대창(程大昌)이 지은 <속연번로(续演繁露)> 2권에서도 "举子前此许挟书,至样符止许带《礼部韵》"이러한 구절이 있어서, 과거 시험을 치르는 자들은 모두 이 예부운략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진손(陈振孙)의 <직재서록해제(直斋书录解题)> 3권에서 <예부운략> 주(注)에 “其日略者,举子诗赋所常用,盖字书声韵之略也”。라는 예부운략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로 보아, 북송 시대에 과거 시험을 치러 가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들 한 권씩 이 책을 들고 가서 자신들이 쓴 문장에 운이 맞는지, 범휘는 없는지 검증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북송의 과거 시험을 연구하고, 학자들의 성문(成文)을 연구하고, 나아가 북송의 시부운율(诗赋韵律)을 연구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바로 희소성입니다.
현재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사부제서(四部诸书)의 북송 각본(刻本)은 20편이 넘지 않을 정도이므로, 이 책은 희소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발견된 최초의 <예부운략>은 일본 진복사(日本真福寺) 소장본이지만, 그 책은 파손되어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진복사 소장본 <예부운략>은 북송 송 철종(北宋宋哲宗) 연간에 간행된 판본으로, <경우예부운략>보다 50년 뒤에 나온 것으로, <경우예부운략>의 내용에서 부족한 점을 진복사 소장본 <예부운략>에서 보완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 선생이 구한 이 <경우예부운략>은 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전면적이며, 어쩌면 국내외 유일한 고본으로서 그 가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치충 선생은 가장 전문적인 사람들만이 이를 보수하고 보존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립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이 일리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국가의 문화유적으로서 보존될 수 있고, 또한 이것이 만약 외국에 팔려나간다면 국가적으로도 손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를 잘 보호하는 것도 개인의 이익 추구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China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녀 배우 판빙빙(范冰冰), 영화 <355>로 연예계 복귀?! (0) | 2022.02.14 |
---|---|
중국 스타들의 세기의 결혼식 명단공개! 1위부터 9위까지 누구일까? (0) | 2022.02.11 |
"중국금왕(中国金王)" 천징허(陈景河)는 어떤 사람일까? (0) | 2022.02.09 |
명나라 황릉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0) | 2022.02.08 |
자그마한 체구로 거대한 화물차를 운전하는 장린(张琳)의 불굴의 인생 스토리 (0) | 2022.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