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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부자가 된 중국 친(秦)선생의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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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부자가 된 중국 친(秦)선생의 이야기

hanyuku 2022. 1. 24.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을 열심히 일해도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운이 좋아서 "보물" 하나를 팔아서 가난한 농민에서 신분이 역전되어 힘들이지 않고도 평생 남들이 벌 수 없는 돈을 버는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그 행운아는 바로 친(秦)선생이라고 합니다. 친선생은 2005년 어느 여름, 한 경매에서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알아보는 혜안을 발휘하여 "파가사(破袈裟)"를 유찰받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파가사가 훗날 무려 1억 3천만 위안의 고가로 경매에서 팔렸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친선생은 단숨에 벼락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무척 부러워하게 되었다네요.

 

 

그렇다면, 이 파가사가 대체 어떤 값어치가 있었길래 이렇게 비싼 값을 받았던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친선생의 "지붕 수리" 이야기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친선생은 그저 평범한 베이징 시민에 불과했습니다. 보통의 베이징 시민들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그 자신도 월급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취미가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골동품을 소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골동품이나 서화 따위는 보통 가격이 만만치 않은 편입니다. 그래서 모두 부자들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취미이죠. 그런데 친선생은 어떻게 이러한 길에 빠져들었던 것일까요?

 

 

사실, 친선생이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이전에 베이징의 한 골동품 수집 문화기구에서 일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귀중한 물건들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중국의 문물과 골동품들 등을 많이 듣고 볼 수 있었고, 그 역시도 그러한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런 것들을 살 돈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늘 골동품들에 대한 소식에 귀를 열어놓았고, 자주 감상하였으며, 자그마한 골동품 완상용 기물들을 자주 가지고 놀았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친선생은 평소의 골동품들을 가지고 노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에겐 한 가지 바람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경매장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살 수는 없지만, 눈요기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고, 보는 것에는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2005년 여름, 친선생은 베이징의 한 작은 경매장에 찾아갔습니다. 경매장에서는 많은 진기한 보물들이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마지막에 한 가사(袈裟)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사는 시작 가격이 겨우 8만 위안인데도 아무도 좀처럼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그 가사는 낡아 보이긴 했지만, 어렴풋이 그 천 자체는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겉면에 오래 전에 침식되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만 해도 흥미가 없어졌다고 하네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 가사를 못 본 척했고, 경매인들조차 그것을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것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친선생은 앞으로 나가서 가사의 표면에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어두운 무늬를 발견하였고, 오랜 세월동안 골동품을 감상해온 그는 이 가사가 범상치 않을 수도 있는 물건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가사는 어떤 신비감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하는데요, 어쩌면 정말로 과소평가된 보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친선생은 가사를 낙찰받고 돌아가서 천천히 연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8만 위안을 낼 수도 없었죠.

 

 

할 수 없이 결국 가사는 유찰되었는데요, 돌아간 후 친선생은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가사 때문에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사를 다시 사려면 9만 위안을 내야 했습니다.

 

 

 

 

 

그는 다음날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모으기 시작했고, 친척들과 친구들에게서 모두 빌려서 겨우 9만 위안을 모았습니다.

 

 

그 후 곧바로 경매장에 갔는데, 친선생의 구매 의사를 들은 뒤, 경매장 직원들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어리숙할 수가 있는가, 아무도 안 사려고 하는걸 하나 사려고 하다니..."라며 그를 분명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무수한 사실이 증명하듯이, 행운은 종종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는 이러한 진리는 친선생의 행동에서도 다시 한번 검증되었습니다.

 

 

돈을 다 낸 후, 그렇게 원하던 보물을 손에 넣은 친선생은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바로 관상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손으로 쓰다듬어볼 때, 그는 가사의 표면이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구김살이 약간 있는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 어두운 무늬는 가사 위에 직접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다른 한 층이 한 겹 더 있는 것 같았습니다.

 

 

 

 

 

친선생은 이것을 잘라볼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가위질을 했다가 아무것도 없으면 9만 위안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끝까지 알아보기로 결심하고 조심스럽게 가사를 잘라보았습니다.

 

 

가사를 잘라낸 후, 친선생은 가사 안에 정말로 무언가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겹겹으로 안에 든 물건을 꺼내자, 친선생은 매우 놀라 어리둥절했는데요, 그것은 황금빛으로 보이는 실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져보면 재질이 매우 좋았지만, 보기에는 그냥 이불보 하나처럼 보였죠.

 

 

그 위에는 알아볼 수 없는 경문이 찍혀있었는데, 모두 4 종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친선생이 이 자료를 조사해 보니, 그 중 세 가지는 각각 티베트어, 만주족 글자, 산스크리트어였고, 또 일부 도안들은 문자에 맞추어 경문과 도안의 정미함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복잡한 정도에 더더욱 감탄을 자아내기까지 했지요.

 

 

 

 

 

친선생은 이것이 결코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습니다. 보물 감정에 대한 지식과 능력이 부족하여 이 물건의 신비함을 다 알 수 없자, 친선생은 불교 협회의 홍도법사(弘道法师)를 찾아가 이 보물의 유래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홍도법사는 경문을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이것을 보고난 후, 그는 친선생에게 이 천은 이불이 맞는데, 시체를 덮는데 쓰는, 즉 흔히 말하는 시체를 싸는 천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위에 적힌 경문은 다라니경이기 때문에 이를 '다라니경피(陀罗尼经被)'라고도 합니다.

 

 

 

 

 

그는 불교 교리상 세속적인 사람은 죄악이며, 임종할 때 찾아가 경을 읽어주며 안도하는 것이 죄악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다라니경피는 '왕생피(往生被)'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옛 부장물이었는데, 고대인들은 사후의 일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뒤에 이러한 천으로 감싸면 저승에 가서 복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홍도법사는 이것은 비록 유물이긴 하지만, 시신을 싸던 천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므로 불길하기도 하고 가치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홍도법사는 친선생에게 일찍이 이런 물건에는 손을 빼는 것이 좋으며, 집에 오래 두어도 좋지 않다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그가 이것을 팔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그를 도와 구매자를 찾아봐주겠다고 하였죠.

 

 

친선생은 오히려 이것이 희귀한 유물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빨리 팔아치울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홍도법사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후, 친선생은 더 많은 과정을 거쳤는데요, 그는 더 유명하고 전문적인 문화재 감상의 대가들을 찾아 이 보물을 감식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한 친구가 찾아낸 장슈펀(张淑芬)이라는 한 전문가는 친선생에게 이 경전에 대해 더많은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이 천은 자수실로 만든 것으로, 자수품(缂丝)은 "중국전통 실크 예술의 정화(精华)"라고 불릴 정도로 가치가 높다고 하였습니다. 고대에서도 이를 "1촌의 자수품(缂丝)은 1촌의 금과 맞먹는다"는 설이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자수품은 순수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티베트 캐시미어 자수품이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높아집니다. 현대에도 순수 수작업으로 만드는 티베트 캐시미어 자수품은 추출해내는 것도 상당히 어렵다고 하는데요, 고대에는 더욱 희귀하고 더더욱 드물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수품을 만드는데는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제작 공정도 매우 복잡하여, 여러 명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함께 제작해야 하고, 하루 8시간 동안 작업을 한다고 치면 최소한 3년이 걸릴 정도로 국보 중의 국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천은 흔치않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여러 전문가들의 감정을 거친 후 친선생의 이 자수로 만든 다라니경피는 청나라 시대 황족을 위해 만들어진 천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도대체 이 경피를 어느 황실원이 사용했던 것일까요? 사서에 따르면, 청나라 시대 황족 중 단 2명 만이 다라니경피로 시신을 감쌌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건륭황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희태후였지요.

 

 

 

 

 

그러나 건륭제와 자희는 비록 같은 왕조의 인물들이긴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몇 세대의 차이가 나며, 같은 연대가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사용한 경피 도안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자희가 사용했던 다라디경피는 최고급으로, 크기는 사방으로 3m이고, 밝은 황금빛 비단 바탕에 불경, 불상, 불탑이 찍혀있고, 장식용 도안도 찍혀 있으며, 경문은 한자로 새겼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거듭 확인을 거친 결과, 감정 전문가들은 친선생이 들고 있던 이 경피는 건륭황제의 하장에 사용된 경피로 추정하였고, 지금까지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물건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이 중 두 명의 전문가들은 감정 후 자신이 18만 위안에 사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는 친선생이 살 때보다 값이 두 배나 비싼 것이었지만, 친선생은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 경피는 친선생의 수중에서 3년 동안 보존되어왔습니다. 3년 뒤 친선생은 결국 이를 팔아치웠다고 합니다.

 

 

2008년 경매에서 이 물건을 내놓았는데요, 이 경매에서 7천만 위안을 찍었고, 친선생은 그때 팔았습니다.

 

 

2018년이 되자, 이 문화재는 또 한번의 열풍을 맞이하였고, 다시 경매에 나와 당시 무려 1억 3천만 위안에 낙찰되어 다음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당시에 1억 3천만 위안에 낙찰되자, 경매 현장의 행인들은 탄식을 금치 못하였는데요, 예전에 "파가사"를 무시했던 사람들은 더더욱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륭황제의 부장품이 이렇게 귀중한 것인데 어떻게 민간에 흘러들어가게 된 것일까요? 이것은 군벌 혼전(军阀混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 조조(曹操)가 연이어 전쟁에 참전하면서 군비가 부족하자, 전쟁에 사용할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모금교위(摸金校尉)"라는 계급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계급은 도굴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군수물자에 보태는 일을 하여 "한묘십실구공(汉墓十室九空)"을 받게 하였습니다.

 

 

청말민초(清末民初)에는 군벌 혼전의 시기로, 당시 쑨덴잉(孙殿英)이라는 군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이렇게 조조와 같은 일을 하며 군사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청나라 황실의 묘를 도굴하며 청동릉(清东陵)을 노렸습니다.

 

 

청동릉은 일찍이 건륭황제가 묻혀 있는 견고하게 건설된 황실의 금지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는 건륭황제와 일련의 황실의 귀한 자제들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는 황실의 보물이 수없이 쌓여있었죠.

 

 

 

 

 

쑨덴잉은 건륭황제의 무덤을 도굴한 뒤, 그 안에서 많은 재물을 긁어모았는데요, 그는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싹 쓸어왔습니다.

 

 

그러나 금은밖에 보이지 않는 무식한 쑨덴잉에게는 시체를 감싸고 있는 천이 벗겨진 것을 보고는 이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것은 버려두고 금은보화만 가져갔습니다.

 

 

그러다가 인근 주민들이 지나가던 중, 그 천을 발견해서 주워서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훗날 이 시신을 감싸고 있던 천은 유물을 잘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보기엔 그냥 황실에서 쓰던 보자기 정도로 생각했고 보물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민간에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중에서 싼 값에 꾸준히 돌아다니게 되었고, 가사안에 들어 있는 것을 연구한 사람은 전무하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경매에서 친선생의 혜안에 이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이것이 건륭황제의 시신을 감쌌던 국보라는 정체가 밝혀지게 된 것이죠.

 

 

볼품없던 파가사가 지금은 1억 3천만 위안이나 되는 국보가 되었습니다.

 

 

친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당시 9만 위안에 샀던 가사가 7천만 위안에 되팔렸으니, 이미 당시에 가사를 구입했던 가격을 훨씬 웃돌았습니다. 덕분에 그는 부자가 되어 가난했던 운명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습니다.

 

 

 

 

 

친선생의 이와 같은 행운은 이 유물을 보배처럼 여기고 3년간 정성껏 보호한 공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친선생의 행운은 그의 독창적이고 날카로운 안목 덕분에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비밀을 볼 수 있었던 것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과감한 행동력 덕분에 숱한 장애물을 뚫고 나가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조금만 우유부단했더라면 이런 기회를 놓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숨겨진 가치도 따져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물의 가치가 아무리 높더라도, 이것들은 모두 민족의 역사가 깃든 유구한 역사의 문화전승물이기 때문에 잘 보살피고 보존되어야 합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pageType=1&context=%7B%22nid%22%3A%22news_8916608026168683414%22,%22ssid%22%3A%22%22%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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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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