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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원주민 가수 완샤랑(万沙浪)의 인생스토리

hanyuku 2022. 1. 19.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88년, 완샤랑(万沙浪)이라는 한 대만 가수가 원주민들의 민족 의상을 입고 춘완(春晚) 무대에 올랐습니다.

 

 

비록 그는 이런 큰 무대가 처음이라 약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노래와 춤을 추며 대만 고산(高山)족 스타일의 <나로만정가(娜鲁湾情歌)>를 열창하여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관객들도 분위기에 물들어 운율에 따라 손뼉을 치며, 다소 생소한 가락을 함께 흥얼거리는 등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하였다고 합니다.

 

 

완샤랑은 노래 한 곡을 끝내자, 그 해에 중국 양쯔강 남북을 뜨겁게 달군 여가수 웨이웨이(韦唯)에게 손을 내밀며, <상취재룡년(相聚在龙年)>을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너는 바다 저편에, 나는 바다 이편에..." 해협 양안(海峡两岸, 중국 본토와 대만을 말함) 출신의 두 가수가 손을 잡고 열창한 이 노래는 양안 인민들의 목소리를 노래하였습니다.

 

 

"앞으로 먼 하늘의 길일지라도, 우리가 함께했던 용년(龙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노래가 끝나자, 완샤랑은 눈물을 글썽이며 절로 객원 손님과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이 모습은 TV 앞에 앉아있는 수많은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산지가왕(山地歌王)" 완샤랑이라는 이름이 중국 곳곳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 최고의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뒤이어 재난이 연이어 닥쳐와 이 한 때의 가왕을 수렁 속으로 떨어지게 하였고, 이때부터 그의 일생에는 고난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1. 순조로웠던 연예계의 길

 

 

완샤랑 하면, 나이가 좀 많은 사람들에겐 인상에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완샤랑의 본명은 왕중이(王忠义)이며, 그의 누나는 왕싱링(王幸玲)으로 역시 노랫소리가 감미로운 가수였습니다. 누나의 영향을 받아서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적 소질도 높아서 별다른 이변 없이 누나의 발자취를 따라 가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완샤랑은 이후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만나 원주민 포크 밴드를 결성하였습니다. 비록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완샤랑은 즐거웠다고 합니다.

 

 

매일 친구들과 함께 음악 테크닉을 탐구하고, 공연을 하면서 음악 연출에 대한 경험도 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완샤랑이 23세가 되던 해, 리싱(李行) 감독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 분야로의 전기(转机)가 마련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전기가 마련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마치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리싱은 당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덩리쥔이 불렀던 동명의 영화 주제곡 <풍종나리래(风从哪里来)>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만약 이 곡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면, 그의 연예계의 길은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고, 조롱과 경멸이 평생 함께 따라붙었을 것입니다. 이는 당시 완샤랑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싱은 그를 믿었고, 완샤랑도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덩리쥔 판본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스타일의 가창에 비해, 완샤랑은 두텁고 우렁찬 목소리로 이 노래를 색다르게 연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마치 높은 산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정인을 부르짖는 것처럼, 자신의 경애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자유롭게 털어놓았습니다.

 

 

이 곡은 완샤랑으로 하여금 덩리쥔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유명세를 얻게 하여, 한때 그는 "연가 왕자"로 불리게 되었고, 가요게에서 베이난족(卑南族) 원주민 복장으로 활약하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가요계 행로는 탄탄대로처럼 활짝 열렸고, 유명한 작가 총야오(琼瑶)의 러브콜이 이어졌습니다. 1973년, 총야오의 소설 <심유천천결(心有千千结)>이 영화화 되었는데, 동명의 주제곡을 완샤랑이 불렀고, 이후에는 <채운비(彩云飞)>의 주제곡도 불렀습니다.

 

 

<몽난망(梦难忘)>와 삽입곡 <하시니재래(何时你再来)>도 완샤랑이 불렀습니다.

 

 

유명세를 타고 그는 자신의 첫 앨범 <나로만정가(娜鲁湾情歌)>를 내놓았고, 이 앨범으로 당시 완샤랑은 원주민 음악 바람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애니일만년(爱你一万年)>, <미주가가배(美酒加咖啡)> 등 그가 원곡으로 불렀던 노래들은 한때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고 있다고 합니다.

 

 

2년 후, 춘완 프로그램팀에서는 이 잘나가는 원주민 가수를 주목하였고, 그를 춘완 무대에 초청하여 전국민 앞에서 노래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의 이름도 춘완 노래와 함께 집집마다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2. 사업에 실패하고, 가요계를 돌아보니 더 이상 몸을 맡길 곳이 없다

 

 

큰 인기를 얻은 이후, 완샤랑은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고, 몸값도 폭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사업 역시 대만에서 한 단계 발전하여 그에게 적지 않은 부를 축적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완샤랑은 쉽게 얻은 유명세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고, 그의 수입에 대한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을 고향에 있는 아내와 네 자녀, 그리고 집안의 형제자매들에게 보냈고, 적은 부분만 남긴 뒤 이 돈으로 상업적 투자를 했습니다.

 

 

그때는 90년대 초라 중국은 개혁 개방의 바람을 타고 온통 상업적 기회로 넘쳐났고, 완샤랑도 이번 기회에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노후를 보장할 수 있는 돈벌이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원주민 가수로서 진로가 넓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만 내 원주민 음악 바람이 잠잠해지면, 사람들은 이와 같은 스타일에 신선함을 잃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음악 사업도 큰 지장을 받게 되어 이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업적인 결정은 무척 깨어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넘치는 음악적 재주는 상업 분야에 가서는 다소 둔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년간 힘들게 사업을 운영했지만, 장부상 금액은 얼마 남지 않았고, 심지어 적자까지 냈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가 일을 구하려다보니, 가요계에는 후배 신인들이 배출되었고, 몇 년 동안 가요계 "가왕"의 자리는 이제 신인들에게 돌아가버렸습니다. 새로 뜬 별들의 빛에 가려져 이미 그에겐 돌아갈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3. 술로 나날을 보내다, 계단에서 떨어지다

 

 

사업에서 슬럼프가 닥치자, 완샤랑은 술로 나날을 보내게 되며 퇴락의 길에 빠져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의리가 있는 친구들 덕분에 그가 가장 어려울 때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해주었고, 때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같이 보내서 그가 할 일이 없는 날에도 힘들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지붕에 비가 새는 날 밤에 비가 계속 내린다(屋漏偏逢连夜雨)"는 중국의 속담처럼, 불행한 일은 연이어 닥치게 되었습니다. 완샤랑이 마음 속의 고민거리들을 술로 풀어내며 술판을 벌였고, 만취한 완샤랑이 계단에서 떨어진 것이죠.

 

 

의사가 온 힘을 다해 치료한 결과, 겨우 그의 생명은 건졌지만, 큰 수술 세 차례를 거치면서 그는 뇌성마비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겨우 눈만 깜빡일 수 있을 정도로 행동력을 잃어버렸고, 지능은 5세 수준으로 퇴화했으며, 기억도 조금씩 잃어갔습니다.

 

 

 

 

 

그는 친구나 가족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고, 최근의 일도 생각나지 않게 되었으며, 가사는 커녕 한 구절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환을 겪게 된 완샤랑은 고향으로 돌아가 친척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고향 집에 돌아온 완샤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텅빈 집이었습니다.

 

 

완샤랑이 여러 해 동안 본토에서 고생하여 번 돈의 거의 대부분을 가족과 친척들에게 보내주고, 자신은 생활에 필요한 약간의 돈만 가지고 살았는데, 고향에 있는 아내는 그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재산을 다 팔아 네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샤랑은 더욱 절망에 빠졌습니다. 사업도 실패하고, 가요계에는 더 이상 돌아갈 자리가 없는 데다가, 여러 차례 수술로 인한 지적장애까지 겹쳐서 생계가 막막한데, 이제 와서는 아내마저 떠나고, 네 자녀들은 미국에 살면서 그를 외면하고 위로의 전화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옛날의 좋았던 시절에 "가왕"으로 불렸던 그가, 이제는 정부 보조로 하루 종일 병상에만 매달려있는 외로운 늙은이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요.

 

 

완샤랑은 2004년에 결국 절망하여 수면제 80개를 삼키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일찍 발견되어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소식에, 예전에 그를 완전히 잊지 않았던 동료들도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둥선 자선 재단(东森慈善基金会)은 소속 아나운서 루시우팡(卢秀芳)이 대표로 있는데요, 완샤랑을 방문하여 그에게 5만 위안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매달 생활비 1만 위안을 보조해주겠다고 약속하며, 다시 힘을 내달라고 했습니다. 관화이 연예인 재단(关怀艺人基金会) 및 CCTV에서도 1년간 매달 생활비 1만 위안을 지원해주기로 하였습니다.

 

 

병상에 누운 완샤랑은 잠시 만감이 교차하여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일찍이 지극히 보살펴 주었던 가족들은 자신을 아랑곳 하지도 않고, 예전에 함께 했던 동료들만이 자신에게 따뜻함을 베풀었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마음은 정말 헤아리기 어렵지만, 살아가기만 한다면 희망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4. 고난은 인심의 시금석

 

 

옛날에 완샤랑이 술집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그는 팬 한 명을 알게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팬이 지금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몇 차례 흉흉한 시기에도 이 팬이 그를 일찍 발견하여 구조했다고 합니다.

 

 

 

 

 

이 팬의 이름은 궈슈펀(郭淑芬)이라고 합니다. 궈슈펀은 완샤랑의 노랫소리를 매우 좋아했고, 그가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으며, 그를 좋아하고 숭배했었습니다. 완샤랑의 끈질긴 구애 아래 두 사람은 순리처럼 함께 걸어갔었지만, 그에게 가정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궈슈펀은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궈슈펀은 완샤랑의 비참한 사연을 알게된 후 다시 그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완샤랑이 지적장애를 앓아 안전감도 없고, 자신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더 많이 수발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04년에도 완샤랑이 수면제를 삼킨 것을 일찍 발견하고 구해준 사람도 그녀라고 합니다.

 

 

40여 년의 비바람 속에서도 궈슈펀이 함께 걸어갔으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완샤랑은 살아갈 용기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가지 공식적인 명분은 없다고 하네요.

 

 

 

 

 

완샤랑의 절친한 친구인 위텐핑(余天评)은 궈슈펀을 미련한 사랑을 하는 여자라고 평했습니다. 원래 그녀는 홍콩에서 보석 사업을 하고 있고, 사업이 매우 잘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 몇 년 동안, 거동이 불편하고 지능도 어린아이 같은 완샤랑을 돌보기 위해 그녀는 홍콩, 광둥, 선전의 부동산 세 채를 팔아 사방으로 돈을 조달해왔습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아시아 각지의 명의들에게 그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치료를 했지만, 여전히 치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궈슈펀은 자신의 집을 모두 팔아치웠고, 거처도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완샤랑이 일찍이 자신의 친구들이 그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하였었는데, 사실 또한 이와 같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타이베이시에 있는 20평도 안 되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바로 완샤랑의 친구가 돈을 모아 얻어준 셋방이었던 것이죠.

 

 

 

 

 

완샤랑은 때로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을 맑은 정신으로 잘 알고 있지만, 때로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해지곤 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궈슈펀에게 명분을 주지 않은 것도 그가 기억나지 않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궈슈펀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녀는 완샤랑의 생명의 은인이며, 많은 고난을 함께 겪었고, 함께 맞는 비바람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명분이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이 한 모든 것, 그들이 함께 겪은 모든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합니다.

 

 

완샤랑이 67세 때, 그는 게스트로 초청되어 사랑나눔 콘서트(爱传承关怀演唱会)에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무대 위에서 인기있는 원주민 가수팀 둥리훠처(动力火车)가 그의 명곡들을 선보이자, 그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에게 속했던 시대는 흘러가버렸지만, 한때 그에게서 비롯된 눈부신 노래들은 아직까지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5. 지금의 완샤랑

 

 

2021년 1월 26일, 대만 언론들은 완샤랑의 근황을 전하며, 그의 근황이 녹록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보도 1주일 전인 1월 19일 완샤랑의 생일에, 금마 영화상 수상자 양꾸이메이(杨贵媚)와 유명 스타 배우 지바오루(纪宝如) 및 연예인들이 다같이 병원을 찾아 생기발랄한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사진 속에서 양꾸이메이와 지바오루는 그의 얼굴에 케이크 크림을 묻혔고, 완샤랑은 멍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즐거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양꾸이메이의 말에 따르면, 일찍이 그를 면회하러 왔을 때, 그는 한때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풍종나리래(风从哪里来)>를 부르며 기뻐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완샤랑을 독려하기 위해 그녀는 돈이든 홍바오(红包) 봉투를 들고 와 달랬다고 합니다. 함께 노래를 부르면 홍바오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그는 활짝 웃었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같다, 그리고 잘생겼다는 칭찬도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5년 전, 완샤랑은 한차례 중풍을 맞아서 건강에 우려되었었다는데요,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고 합니다. 2021년 초에는 신장암이 재발하여 두 차례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나중엔 또 폐렴에 감염되었다네요.

 

 

 

 

 

많은 사람들이 완샤랑이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생존 의지는 여전히 강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위장관식에 의존하고, 출입도 휠체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정신은 여전히 맑다고 합니다.

 

 

완샤랑의 나이가 들면서, 미국에 있던 그의 자녀들은 대만으로 돌아와 그를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궈슈펀과 돌보는 방식이 달라서 마찰이 많았다고 합니다. 마지못해 완샤랑의 막내딸은 자신의 딸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간병인에게 24시간 간병을 맡겼습니다.

 

 

양꾸이메이는 그의 '창자오(长照)' 자격이 취소되었다는 또 다른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합니다.

 

 

 

 

 

'창자오'는 대만에서 55세 이상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는 노인에게 전문 양로기관과 간병인들이 이들을 돌봐주는 노후 보장 제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완샤랑의 경우 자격이 취소되었고, 보조 자격을 다시 얻는데에 필요한 자료들도 무척 제한적이어서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지바오루는 언론사에 그녀들이 소속된 회사가 문화부에 보조금을 신청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완샤랑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며, 완샤랑 일가의 경제가 비록 궁핍하더라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72세의 완샤랑은 명망을 잃어버렸지만,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 삶이란 결코 끈질긴 사람을 박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335269335147603051%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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