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yuku
중국 "휴대전화 유리의 여왕" 저우쥔페이(周群飞)의 인생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최근 10년간 전자 제품의 세대교체는 전례없이 빨라졌습니다.
전자 제품의 발전과 함께 관련 부품 산업도 따라서 발전하고 있는데요, 특히 휴대전화, 태블릿 PC의 스크린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비록 작은 유리에 불과하지만, 그 뒤에 사용되는 기술은 종종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소모하는데요, 오늘 살펴볼 기사의 주인공은 중국 휴대폰 화면 시장의 50%를 란쓰 테크놀로지(蓝思科技)과 관련이 있습니다.
란쓰 테크놀로지는 처음에는 보잘것 없는 작은 회사에서 시작하였었는데요, 이 회사가 등장하고나서 중국에서는 거리(格力)의 여사장 동밍주(董明珠) 외에도 또 다른 걸출한 여사장 저우쥔페이(周群飞)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2015년, 그녀는 500억 위안의 몸값을 기록하며, 중국 내에서 여성 최고 부자로 부상하였습니다.
란쓰 테크놀로지의 오너인 저우쥔페이는 남다른 성공 역사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전해지는 이 중국 여성 최고 부자의 성공 역사는 가장 고무적인 '샤오싼 성장사(小三成长史)'라고 하네요.
저우쥔페이는 23세에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사장과 결혼하였고, 혼자 창업한 뒤 이전에 다니던 회사의 모든 것을 빼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남편을 걷어차고, 억만 부를 가지고 자기보다 어린 운전기사와 결혼했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란쓰 테크놀로지 주식을 "샤오싼 개념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실제 이러했던걸까요? 한 기자가 저우쥔페이에게 이와 관련해서 물어보았을 때, 저우쥔페이는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었다고 합니다.
15세의 알바생: 내 평생을 걸겠다!
어머니는 그녀가 5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두 눈이 실명하였고, 손가락 두 개가 없었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 당시 저우쥔페이는 매일 멀리 나가서 길에서 풀을 베어와 돼지에게 먹이고, 장작도 패야 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길은 항상 가팔라서 올라가기도 어렵고, 내려오기도 어려웠는데요, 자칫 잘못하면 뒹굴러 떨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엄마 없는 아이의 생활은 늘 유달리 궁지에 빠져 있는 것과 같은데요, 같은 마을 사람들은 저우쥔페이가 항상 노동을 하고 옷에 진흙을 묻히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옷이 더러워지는 것 보다도, 더욱 걱정스러운 문제는 매일 먹는 문제였습니다.
저우쥔페이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매일 다음 끼니는 어디에서 해결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날들"이라며 어린 시절을 표현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우쥔페이의 가장 큰 소망은 다음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저우쥔페이는 자신의 장래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 환경은 저우쥔페이의 독립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성격을 만들어냈습니다.
중국의 80년대는 개혁개방 열풍이 불었고, 사람들은 외지로 나가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15세의 저우쥔페이도 이에 동참하여 외지로 나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15세의 여자 아이가 스펙도 없고, 직장 경험도 없는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쩔 수 없이 각종 공장에 들어가서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고생하면서 생활비를 벌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무렵의 저우쥔페이는 자신의 부족한 점도 발견하였습니다.
저우쥔페이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자신과 회사의 화이트칼라들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녀는 마음 속으로 학벌과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학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다른 학생들처럼 지속적으로 공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공장 아가씨가 월급을 받으면 쇼핑을 하러 나갈때, 자신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녀는 자격증을 많이 땄습니다. 컴퓨터, 회계, 통관증, 운전면허증 등 많은 기술을 익혔죠.
자격증 하나하나는 모두 그녀가 자신의 휴식 시간동안 조금씩 자기계발을 통해 따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부 정신을 가진 저우쥔페이가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는 삶에 달가워할리가 없죠.
아오야 광학(澳亚光学)에 다닌 지 석 달 만에 저우쥔페이는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했지만, 오히려 사직서는 반려되어 돌아왔습니다.
알고보니, 사장 양다청(杨达成)이 이 부지런한 아가씨를 일찌감치 눈여겨보고 있었고, 그녀에게 평소에도 매우 만족해하는 표현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직서를 받은 사장은 그녀를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그녀의 사직 의사를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녀의 임금을 올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새로운 주요 책임자 지위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사장 양다청의 은혜를 생각하여, 저우쥔페이는 아오야 광학에서 5년간 더 머물게 되었습니다. 직위도 계속 높아져서 실크 스크린 인쇄부장 자리에까지 올랐고, 그녀는 애써서 배우고 세심함으로 그 부서를 잘 운영하였다고 합니다.
1990년이 되자, 아오야 광학은 저우쥔페이가 담당하던 실크 스크린 인쇄부분을 따로 떼어내 새로운 공장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부서의 책임자로서 저우쥔페이는 당연히 앞장서서 회사를 위해 바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공장 건물이 반쯤 들어서자, 양다청은 실패를 두려워하여 투자한 돈을 빼려고 했습니다.
다급해진 저우쥔페이는 직접 양다청을 찾아가서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다고 합니다. "성공한다면, 임금은 당신이 마음대로 정하세요. 실패하면 제가 평생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우쥔페이의 고집에 양다청은 부하들에게 손을 떼라고 하였고, 그래서 이 공장은 저우쥔페이의 손으로 직접 경영하여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오야 광학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공장 중 하나가 되었죠.
회사의 경영진이 된 후, 저우쥔페이는 점점 회사 관리의 큰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시간이 지나면 이직을 선택하던 것이었죠. 그 이유는 공장 이윤은 매우 높지만, 노동자 임금이 오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저우쥔페이는 인터뷰에서 "사장님의 친척들이 공장에 왔지만... 다른 두 공장의 수익성이 나보다 못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따돌리고 압박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1993년, 임금 인상에 실패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공장을 떠났습니다.
일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과의 처세술입니다. 저우쥔페이는 점점 더 앞길이 막막해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자, 떠나는 쪽을 택했습니다.
1993년 3월, 아오야 광학을 떠난 후, 저우쥔페이는 자신이 모아두었던 2만 위안의 저축을 가지고 자신만의 작은 작업장을 하나 열고 여덟 식구들을 불러모아 창업을 했습니다.
저우쥔페이에 따르면, 이들은 당시 3개의 방을 얻어 먹고 자고 일을 했는데, 모두 이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저우쥔페이는 창업 초기엔 가족들을 데리고 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왜냐하면 외부 사람들을 쓴다면 만약 자신이 월급을 주지 못하는 경우 일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첫 해 동안 그들은 매일같이 바빴지만, 모두들 의욕이 넘쳤고, 결코 힘든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나중에 저우쥔페이와 결혼한 정쥔룽(郑俊龙)은 이듬해 그녀의 창업팀에 합류하여 그녀의 창업의 역사와 결혼 생활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작업장은 첫 해에 6~7만 위안을 벌었습니다.
바로 이런 경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저우쥔페이를 "샤오싼샹웨이(小三上位)"라고 부른다는데요, 원래의 사장과 결혼하여 기술과 돈을 손에 쥐고나선 곧바로 걷어차버렸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실제로는 아오야 광학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저우쥔페이와 아오야 광학의 사장 양다청이 결혼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시기, 저우쥔페이의 사업은 비록 양다청의 사업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녀의 작은 작업장에서도 이미 소기의 성과는 있었습니다.
저우씨 가족들이 보기엔, 저우쥔페이가 양다청에게 일부러 노리고 접근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오히려 저우쥔페이가 양다청과의 결혼을 발표했을 때, 저우씨 가족들은 양다청이 나이도 많고 이혼한 경험이 있어서 싫어했다고 합니다.
당시 저우쥔페이는 23세밖에 되지 않아서 한창 때의 나이였으므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두 사람의 정 때문에 가족들이 막을 수 없었다고 하네요.
얼마 후 두 사람은 딸을 하나 낳았는데, 물론 양다청이 저우쥔페이의 사업 초반에 힘을 실어준 것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우쥔페이의 사업은 승승장구 하였고, 양다청의 사업은 문제가 불거져 점차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강남약(女强男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두 사람이 결혼 생활을 하는 중에 성취도가 180도 바뀌어버린 것은 보기 드문 일이죠.
결국 두 사람은 분열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각자 자기 주장이 확고한 사람이고, 각자 자기의 사업을 가지고 있는데, 같은 업종이니,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는 법이죠. 게다가 이렇게 처지가 바뀌어 버린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그들이 함께 있었던 시기에 지나치게 확고부동했기 때문에, 이혼할 때도 두 사람은 모두 조용히 헤어졌다고 합니다.
인터넷에는 두 사람의 이혼 소식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저우쥔페이의 숙모의 말에 의하면, 2003년에 그들이 저우쥔페이를 만나러 선전(深圳)에 갔을 때, 이미 양다청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2003년은 저우쥔페이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이 해에 저우쥔페이는 기술과 설비로 주식회사를 만들었고, 사람들과 동업하여 선전에서 란쓰 과학기술 유한회사(蓝思科技有限公司)를 설립하였습니다.
란쓰 테크놀로지와 아오야 광학이 하는 사업은 모두 유리 사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었죠.
아오야 광학은 손목 시계 유리를 주로 하였고, 란쓰 테크놀로지는 휴대전화, 컴퓨터 유리에 집중하는 회사다보니, 인터넷에 떠도는 '기술을 훔쳐갔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우쥔페이는 루머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녀에게 이런 루머를 말하더라도, "谣言止于智者(소문은 지혜로운 사람이 멈추는 것이다)"라는 한 마디를 말할 뿐입니다.
란쓰 테크놀로지 설립 이후, 저우쥔페이는 줄곧 과학 기술의 연구 개발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저우쥔페이가 보기엔 뛰어난 품질만이 란쓰 테크놀로지를 지탱할 수 있는 근본이었죠.
거대한 기술 생산라인을 투입한 것도 저우쥔페이에겐 좋은 기회가 되어 주었습니다.
당시 휴대전화 업계의 큰손이었던 애플은 줄곧 중국의 한 파운드리와 협력해왔지만, 애플이 제기한 한 요구를 그 회사가 들어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저우쥔페이의 회사는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이 덕분에 애플의 장기간 협력 업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법 하지만, 저우쥔페이는 너무 조용하고 겸손하게 지내서 대중들은 그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한번은 저우쥔페이가 커다란 여행 가방을 하나 메고, 새하얀 청바지를 입고 고향인 샹샹(湘乡)에 공장을 세우러 왔다가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리우양(浏阳)으로 건너가 이곳에 첫번째 공장지구를 만들었습니다.
저우쥔페이의 선생님이 말하길, "저우쥔페이가 가져온 15억 위안의 재정 수입과 5만 명의 일자리를 놓쳤으니, 아마 샹샹시 정부는 화가나서 피를 토했을 것이 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후속적인 발전 과정에서도 란쓰 테크놀로지는 줄곧 침착하게 차근차근 큰 일을 해나랐고, 천천히 여섯 개의 공장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저우쥔페이는 자신이 더욱 크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직원들을 가족처럼 삼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겨야만 회사도 비로소 가족처럼 되는 것이지요.
창업한 지 20여 년이 넘도록 저우쥔페이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직원들의 임금을 체불한 적이 없었습니다. 두 차례, 공장 자금이 돌지 않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집을 팔아서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란쓰 테크놀로지가 점점 커지고, 저우쥔페이도 새로운 애정 생활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창업 멤버이자, 운전 기사인 정쥔룽과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결혼과 달리, 정쥔룽은 비록 무명이었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지지를 보내주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십수 년 동안 매일같이 따라다니며 도와준 덕분에 저우쥔페이는 마음놓고 회사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고, 두 사람은 매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아들도 하나 낳았다고 합니다.
란쓰 테크놀로지는 2015년에 성공적으로 상장하였고, 저우쥔페이도 란쓰 테크놀로지와 함께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45세의 저우쥔페이는 몸값이 500위안을 넘어서 여성 부호 1위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21 후룬 여성 기업가 순위에서도 저우쥔페이는 700억 위안의 몸값을 기록하며 4위에 올랐습니다.
저우쥔페이에겐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고 하는데요, 모두들 그녀를 "휴대전화 유리의 여왕"이라고 부르게 되어서, 예전의 "샤오싼"이라는 별명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실력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한 것이죠. 여자도 자기 스스로 이렇게 성공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란쓰 테크놀로지의 상장 전야 연회에서, 저우쥔페이는 이전의 소박한 모습과는 달리,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를 입었는데요, 이때 비로소 모두들 그녀에게 잠재되어 있던 중국 여성 갑부의 기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절친인 장허원(张贺文)은 저우쥔페이에게 농담으로 "네 머리가 드디어 봐줄만 하게 되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그녀는 다시 예전의 소박한 차림새로 돌아와 계속 바쁘게 일했다고 합니다.
훗날 란쓰 테크놀로지가 상장된 후에, 사람들은 란쓰 테크놀로지의 지분에서 저우쥔페이가 90%를 넘는 반면, 남편인 정쥔룽은 10%가 채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정쥔룽은 억울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사람들은 비로소 그녀가 왜 이런 남자를 선택하여 결혼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가진 것을 쟁탈하려들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필요했던 큰 힘이었던 것이었죠.
하지만, 사업이 계속 순항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은 변덕스러웠고, 란쓰 테크놀로지는 휴대전화 유리 화면의 1위였지만 2018년에는 폭풍을 맞게 되었죠.
란쓰 테크놀로지의 큰 고객에는 애플, 삼성, 화웨이 등 대형 브랜드 기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애플은 란쓰 테크놀로지의 큰 고객으로서 애플이 차지하는 비중이 47%로 매우 높다고 합니다.
아이폰과 화웨이 핸드폰이 전자제품 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사이, 애플이 계속 충격을 받게 되자, 애플과 깊은 협력 관계인 란쓰 테크놀로지 역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2018년, 란쓰 테크놀로지의 이익은 전년 대비 70% 가까이 줄었고, 시가 총액도 500억 위안이나 줄어들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란쓰 테크놀로지는 성공도 실패도 애플에 달렸다고 하는 의견을 표현했습니다.
뒤이어 란쓰 테크놀로지 역시도 전통적인 전자 부품 공장들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내부통제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하루 11시간의 업무량, 그리고 업무 시간 내내 서 있어야 하는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고생을 견디지 못한다는 내부 의견이 있었죠. 게다가 이런 고단한 삶에 짓눌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직원도 나왔습니다.
란쓰 테크놀로지의 경우, 2012년까지 최소 4명의 직원이 투신 자살했다는데요, 2011년 6월과 10월에 각각 두 건의 투신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후, 회사는 직원들의 투신 자살을 막기 위해, 모든 기숙사의 복도, 창문에 철조망을 쳐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회사가 큰 위기를 맞으면서 겹겹의 문제들이 저우쥔페이 앞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세운 회사를 마주하고, 저우쥔페이가 받는 압력도 커지고 있지만, 저우쥔페이는 최근 몇 년간 적극적으로 회사의 새로운 발전의 길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란쓰 테크놀로지가 서서히 변신을 모색하고 있고, 화웨이도 란쓰의 주요 협력자로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에 저우쥔페이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녀의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새로운 발전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우쥔페이의 창업 역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울 만한 점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공한 창업자들마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바로 자신의 노력으로 부지런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참고기사>
'China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최북단 동북지방과 최남단 하이난(海南)이 밀접한 관계인 이유는? (0) | 2022.01.20 |
---|---|
대만 원주민 가수 완샤랑(万沙浪)의 인생스토리 (0) | 2022.01.19 |
19년만에 밝혀진 금괴 도둑의 진실?! (0) | 2022.01.17 |
중국에서 비즈니스 분야의 최고 명문가는 어디? (0) | 2022.01.14 |
중국 한 시골 마을의 불법 사설 경견도박(赛狗赌博) 현장 이야기 (0) | 2022.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