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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북단 동북지방과 최남단 하이난(海南)이 밀접한 관계인 이유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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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북단 동북지방과 최남단 하이난(海南)이 밀접한 관계인 이유는?

hanyuku 2022. 1. 20.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서 동북지방 사람들은 지역적 특색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요, 그들의 말투는 유머적 색채가 풍부하며, 성격도 호방하고 열정적이라고 합니다. 요 몇 년 사이 "노철666(老铁666)"에 나오는 “俺们这疙瘩都是东北人,俺们这里盛产高丽参,俺们这旮猪肉炖粉条,俺们这里都是活雷锋。(우리네 이 덩어리는 모두 동북사람이라오. 우리 지역에서는 고려삼이 많이 생산되고, 우리 지역에는 돼지고기 당면찜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 살아있는 뇌봉입니다) ” 이 문구 덕분에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 동북지방 사람들에 대한 특색이 인상깊게 남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동북지방 사람들은 중국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데요, 그들은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로 나가 발전하고 있으니, 아마 중국 어디에서도 동북지방이 고향인 사람들의 열정이 넘치는 동북 사투리를 자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국 전역에서 동북지방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은 단연코 동북제4성(东北第四省)이라 불리는 하이난(海南)이라고 합니다.

 

 

 

 

 

중국 최북부에 위치한 동북3성(东三省, 중국 동북지역의 세 개의 성.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성을 가리킴)과 중국 최남부에 위치한 하이난이 대체 어떤 교집합이 있는 것일까요?

 

 

하이난성은 중국 화난(华南, 중국의 주강 유역으로 광둥성과 광시성, 하이난성을 포함한 지역을 가리킴)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그곳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라고 합니다. 햇빛, 야자수, 바닷바람, 비키니로 유명한 이곳은 매년 열대 풍경을 체험하기 위한 수천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하이난성의 육지 전체 면적은 3.54만㎢이고, 전체성의 삼림 면적은 3296.44만 묘(亩)에 달한다고 합니다. 섬에 오면 곳곳에 녹음이 우거져 있고,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와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하네요.

 

 

북송시대 대시인 소식(苏轼)은 일찍이 하이난성으로 좌천되었었는데, 하이난의 옛 이름은 단저우(儋州)였었고, 그곳에서 소식은 다음과 같은 그의 천고의 절구(千古绝句)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参横斗转欲三更,苦雨终风也解晴。

云散月明谁点缀?天容海色本澄清。

空余鲁叟乘桴意,粗识轩辕奏乐声。

九死南荒吾不恨,兹游奇绝冠平生。”

 

 

 

 

불과 몇 십자의 글자 안에서, 천년 전의 하이난은 이미 무척 아름다워서 소식으로 하여금 마음 속의 괴로움을 모두 잊고 한결 나아졌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라고 하네요.

 

 

하이난은 중국의 유명한 관광명소입니다. 지금 하이난에 와서 관광을 하면, 길에서 택시를 타는 것도 좋고, 식당 안에서 밥을 먹는 것도 좋은데, 곳곳에서 심심찮게 익숙한 동북 사투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이난의 1000만 상주인구들 중 무려 100여만 명이 동북지방에서 왔고, 싼야(三亚)의 집들도 거의 세 채에 한 채꼴로 동북지방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점들은 하이난성을 동북지방 사람들의 제2의 고향처럼 만들었다는데요, 그 원인으로는 기후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동북3성은 물산이 풍부하지만, 기후는 중국의 다른 대부분의 지역에 비해 춥고, 겨울이 길고 온도도 낮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얇은 외투를 입고 낙엽을 감상하는 가을에 동북3성은 이미 두꺼운 패딩을 뒤집어 쓰고 온통 흩날리는 눈발을 맞고 있어야 하죠.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추운 겨울 날씨 탓에 동북지방 사람들은 1년에 절반 정도는 집안에 갇혀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북3성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따뜻하고 햇살이 가득한 곳을 더 선호하게 되었고, 관광지인 하이난은 그들의 최고의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쑹화강 채빙

 

 

하이난은 열대 계절풍 기후에 속하며, 사계절 내내 여름철이고, 가장 추운 겨울에도 기온이 섭씨 십여 도 정도이며, 기후가 좋고, 빛도 충분하기 때문에 빙판길의 나날에 익숙한 동북지방 사람들을 매우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특히 동북지방의 노인들은 하이난에서 천수를 보양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네요.

 

 

풍부한 강수량과 다양한 품종의 저렴한 채소, 과일들은 마치 동북지방 사람들을 위한 천국같습니다.

 

 

두 번째 원인은 역사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말은 해방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당시 하이난은 하이난성이 아니라 광둥성에 설치된 9개의 행정독찰구(行政督察区) 중 제9구였습니다.

 

 

당시 전쟁 형세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아군들은 최종 승리를 거두기 위해 동북에서 온 부대를 남하하는 것을 선택하였고, 하이난에 이르러 여러 전투를 거친 후 하이난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남하한 이 군부대는 바로 하이난으로 내려온 첫번째 동북지방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중국 성립 후, 이 남쪽의 섬을 지키는 부대가 반드시 주둔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일부 주둔군을 하이난에 남겼고, 하이난 해방에 큰 공을 세운 동북부대도 자연히 남게 되었습니다.

 

 

남아있는 주둔군은 대부분 부대 안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하이난 섬의 기존 주민들은 동북지방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훗날, 경제 건설과 하이난의 발전으로, 처음에 섬에 머무르던 동북지방 사람들도 다음 세대를 가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점차 뿌리를 내리고 외출도 하면서 비로소 동북지방 사람들이 하이난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북지방 사람들이 하이난과 진정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는데요, 그 전환점은 바로 개혁개방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건국 초기 동북지방은 '북대창(北大仓)'이라고 불렸었다고 합니다. 배를 곯던 그 시절에 어떻게 4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까요. 식량과 먹는 문제는 당시 사람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동북지방은 원래 흑토지(黑土地)라고 불렸는데요, 왜냐하면 그곳은 평야가 많고, 토양이 비옥하며 습윤한 기후와 추운 날씨 덕분에 그곳에서 생산한 식량은 맛도 좋고, 빛깔도 좋을 뿐만 아니라 생산량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동북 지방은 강남(江南, 양쯔강 하류 지역)지방과 함께 중국 식량의 보고였습니다.

 

 

그래서 건국 때부터 동북 지방은 당시 중국 농업 발전의 중요한 기지였습니다. 농업 외에도 동북3성은 중국 산업이 최초로 변모하기 시작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 시절 국가의 강력한 지원과 자원적 우위 덕분에 동북 지방은 먼저 중국 중공업의 발전기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고, 기울어가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동북 지방에서 중공업을 발전시키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지리적 요인입니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 가까웠고, 동북지방은 소련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건국 초기 소련이 중국에 원조하는 프로젝트의 3분의 1이 동북쪽에 몰려있었습니다.

 

 

특히, 첫 5개년 계획 이후 동북의 공업과 대형 국유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죠.

 

 

 

 

 

예를 들어, 명성이 자자하던 안산 제철공장(鞍山钢铁厂), 최초의 해방표 자동차를 만든 창춘 제일자동차 제조공장(长春第一汽车制造厂) 및 지금까지도 중국에 석유를 공급하고 있는 다칭유전(大庆油田) 등이 동북 공업기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공업의 급속한 발전은 동북 지방의 도시화 과정을 가속시켰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두번째 '촹관동(闯关东, 본래는 산둥, 허베이 일대 사람들이 관동 땅으로 이주하여 생계를 위해 일하던 것을 가리킴)'을 일으켰습니다.

 

 

1947년, 통계에 의하면 당시 3700만 명이던 동북지방의 인구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 크게 늘었을 뿐만 아니라, GDP 순위도 중국에서 전국 3위권으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본토에서 GDP가 가장 높았던 도시는 동북 지방에 4곳이 있었는데요, 각각 창춘, 하얼빈, 선양, 다롄(长春、哈尔滨、沈阳和大连)이었습니다.

 

 

 

 

 

광물자원과 석유, 제조업 위주의 이 공업 기업들은 계획 경제의 산물로서, 번창하던 시절에 열기를 띠었습니다.

 

 

모두들 시절이 영웅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동북 지방에서 거둔 성과는 국가적 정세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예외없이 흥함이 있으면 쇠락도 있기 마련인데요, 이 법칙에선 동북 지방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번영의 세월을 지나, 중국 경제가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계획경제는 이미 이와같은 발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폐단도 점차 드러나고 있는 것이죠.

 

 

폐단이 생기면서, 나라의 큰 방침이 조정되고, 개혁 개방의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전국적 노동의 중심은 경제의 발전으로 옮겨갔습니다.

 

 

 

 

 

민간 기업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격려로, 전국적으로 해외 무역 열풍이 빠르게 불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시장에 뛰어들어 그들만의 상업적 지평을 개척하는 가운데, 지금도 중국 시장과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비즈니스맨들이 적지 않습니다.

 

 

온 나라가 한창 붐비던 때에 동북 지방은 오히려 다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동북지방 고유의 경제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동북지방의 중공업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정해진 패턴에 따라 돌아가고 있었는데, 변화가 생기니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었고, 묵은 곳에 있던 공기업의 병폐도 드러나 가뜩이나 쇠퇴한 동북지방의 정세에 엎친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경영상 어려움이 나타나고, 수익성이 좋지 않자, 많은 기업들이 부실한 상황에 처해서 경영 유지를 위해 근로자들을 해고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노동자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단지 동북3성의 실업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 취업, 인재 등등 모든 방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영향은 되돌리기 어려운 악순환으로 이어졌고, 한때 휘황찬란했던 동북3성의 공업 문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대쪽 끝에 있는 하이난성은 유례없는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소동파(苏东坡)는 단저우, 즉 지금의 하이난에 유배될 때 중원의 농업 문명을 많이 가져갔다고 전해지는데요, 이때부터 하이난의 농경은 점차 발전하였고 편리해졌다고 합니다.

 

 

 

 

풍광이 아름답고, 자원이 풍부하면서도 천년 농경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하이난 지역은 건국 후에도 광둥성의 관할 하에 두어 세상과 다투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물결은 결국 이 조용한 섬에도 미쳐, 1988년 하이난은 광둥성을 벗어나 중국의 한 성(省)이 되었고, 경제특구가 세워졌습니다.

 

 

하이난성의 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일련의 정책 배당금을 만들어 자본을 유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금력과 경험을 가지고 하이난의 발전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는데요, 이 가운데 판스이와 핑룬(潘石屹和冯仑)이 있습니다.

 

 

 

 

 

곧 높은 빌딩이 솟아오르게 되고, 전체 하이난성은 생기가 넘치는 도시가 되었는데요,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들을 보면, 하이난성은 이미 경제가 비약한 대도시의 모태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지역이든 발전은 한번에 이룰 수 없는 것이고, 거대한 기회 앞에는 거대한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빌딩이 우뚝 솟아 있는 배후에는 부동산업계의 대량의 자금 투입이 뒷받침되고 있었습니다.

 

 

자본은 상인들에게서 나오고, 상인들의 본질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인데, 부동산업자들이 대량의 자금을 투입하였던 것에는 자연스럽게 이윤 추구의 계산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이난의 집값을 올리는 것은 폭리를 취하는 수단 중 하나입니다.

 

 

 

 

 

이때, 하이난의 집값은 눈덩이처럼 뛰어올랐고, 투기꾼들이 줄을 이어 모여들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하이난에 집을 매매하면서 끊임없이 많은 돈을 끌어모으고 있으니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민들의 소득은 오른 집값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고, 사람들은 집을 살 수 없게 되고, 생활 수준은 계속 떨어지며,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심각하게 깨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같은 임계점에 이르자, 하이난성의 부동산은 순식간에 공급과잉으로 경제발전이 침체되었고, 결국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여 하이난성의 발전 과정에서의 좌절을 개선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하이난성 경제 발전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하이난성 정부는 생태성(生态省)을 건설하고 서비스업을 발전시키자는 아이디어를 제출하였으며, 하이난의 우수한 자연경관을 이용하여 관광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에 돌이켜보니, 이것은 확실히 하이난성 발전의 가장 좋은 활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관광업은 여전히 하이난성의 기간산업이라고 합니다.

 

 

관광업은 산업구조상 제3차 산업에 속하는데요, 제 1차 산업은 농업, 제 2차 산업은 공업입니다. 이렇게 하이난은 시대에 순응하여 발전하였고, 산업의 고도화에 앞장서는 곳이 되었습니다.

 

 

서비스업을 하려면 반드시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한데요, 사람이 없으니 하이난성은 어떻게든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하이난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을 끌어들인 곳은 바로 그 지역의 기반 산업이 쇠퇴하여 노동력 과잉으로 퇴직을 강요당했던 동북지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북지방 사람들은 비록 직장을 그만두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지만, 그들의 저축으로는 당시 집값이 바닥까지 떨어졌던 하이난에서 집을 하나 살 수 있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처음 하이난에 온 동북지방 사람들은 한동안 관망한 후에, 하이난의 발전 가능성과 미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잇달아 돈을 내고 하이난에 집을 구입하였고, 취직하였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동북지방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들의 저축을 쏟아부으며 이와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당시 하이난은 슬럼프를 겪고 있던 때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기회가 곳곳에 숨어있었습니다.

 

 

첫번째 사람들이 순조롭게 정착하고, 또한 하이난 건설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자, 곧 하이난 집값이 싸고 발전 전망이 좋다는 소식이 점점 더 많은 동북지방 사람들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동북지방 사람들이 하이난으로 몰려들게 되었고, 집을 사고 땅을 마련하여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동북지방의 경제발전은 중국 전국에 비해 여전히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데요, 어려움에 직면한 동북지방 사람들도 끊임없이 돌파구를 찾고 현재 상황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동북지방에는 새로운 생기가 조금씩 돌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이난을 그들의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이난에 와서 그곳에 새로운 요소를 불어넣었고, 그들은 동북지방 사람들의 호방한 성격, 독특한 음식, 색다른 풍토와 인정을 이곳에 녹여냈으며, 이곳에 있는 동북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하이난만의 독특한 기운을 만들어내게 하였습니다.

 

 

 

 

 

 

중국의 최북단, 최남단에 위치하여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 두 성은 이렇게 연결되어 혈연이 깊어지고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북단이든 최남단의 성이든 중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강산이 푸르고 나라가 부강해지길 바라는 공통적인 염원이 있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830409713604269121%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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