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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네이멍구의 한 교사의 훈훈한 이야기

hanyuku 2021. 12. 24.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요즘 연말이라 훈훈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살펴볼 기사의 주인공은 80년대 네이멍구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장시우롱(张秀荣)이라는 이름의 교사의 이야기인데요, 어떤 훈훈한 이야기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8년전 선생님이 학생에게 20위안짜리 면화 한 켤레를 사 주셨었고, 26년 뒤 학생은 선생님에게 집 한 채를 사주었다."

 

 

이런 이야기가 허구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것은 네이멍구 우촨현(内蒙古武川县)에서 일어났던 실화라고 합니다.

 

 

올해 74세인 장시우롱 선생님은 수십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쳐왔고, 여느 은퇴 교사들처럼 평범한 분입니다. 그런데, 집 한 채 때문에 그녀는 인터넷 상에서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선생님은 한 사람의 인생길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어떤 스승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주기도 하며, 어떤 스승의 은혜는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즈더(陈志德)처럼 은사님에게 집 한 채를 사 준 학생은 드문데요,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학생들을 위해 무료로 보충 수업을 해주는 수학 선생님

 

 

장시우롱은 네이멍구 후허하오터우촨현(内蒙古呼和浩特武川县) 제1 초등학교(第一小学)를 다닌 후, 이후에 모교에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우촨현에는 제1 초등학교도 있고, 중학교도 있었는데요, 1973년부터 장시우롱은 학교의 중등부 수학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1978년 9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는 새롭게 수업을 시작하고, 장시우롱은 중학교 2학년 수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한 반의 담임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반에는 5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천즈더라는 이름의 남학생이 있었고, 그 학생은 곧 장시우롱의 주의를 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학생은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좋았지만,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옷에는 이곳 저곳 기운 헝겊이 같은 반의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았습니다.

 

 

이 반을 맡았을 때, 장시우롱은 5년차 교사였습니다. 31세의 그녀는 아이들의 눈에 지식에 대한 갈망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반드시 자신이 최선을 다해 이 아이들을 도와 배움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하겠다고 다짐하였고, 배움에 성과가 있으면 아이들의 앞날에도 모두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지금은 방과 후에 상당수의 학생들이 각종 학원에 다녀야 할 정도로 수많은 학원들이 있지만, 올해는 국가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막는 "쌍감(双减)"정책이 시행되면서 사정이 좀 달라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천즈더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학원 같은 것은 무척이나 드물었고, 또 있다고 해도 학원비를 감당할 수 있는 가구는 많지 않았습니다.

 

 

우촨현 제1 초등학교는 매일 오후 6시 30분에 하교하였는데, 학교 근처에 살았던 장시우롱은 반 학생들에게 교실에 남아서 숙제를 할 수 있게 해주었고, 무료로 보충수업도 해주었습니다.

 

 

 

 

 

그녀가 보충 수업에서 과외를 해주었던 내용은 주로 각종 수학 문제 유형을 설명해주고, 배웠던 부분의 어려웠던 점을 되짚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장시우롱은 당시 본업 외에 별도의 수업을 해주면서 별도의 레슨으로 보충 수업료를 받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장시우롱이 맡았던 1년간의 한 반의 담임 생활도 끝나버렸고, 이 한 해동안 그녀는 걱정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많았다고 생각하며, 마침내 여름 방학이 되자 좀 쉬어도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둘 뻔한 학생을 구제하다

 

 

여름이 빨리 지나갔고, 또 가을이 되자 개학을 맞아 장시우롱은 작년에 맡았던 반 학생들과 함께 중학교 3학년 담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에서 유독 천즈더만 수업에 나오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천즈더 학생은 어디 갔나요?" 장시우롱이 반 친구들에게 물어보자,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고, 천즈더가 왜 학교에 오지 않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말이 되자, 장시우롱은 당시 유행하던 이팔 자전거(二八自行车)를 타고 반 학생들 몇 명과 함께 천즈더의 집에 가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천즈더의 집은 우촨현성(武川县城)에서부터 5리(里) 떨어진 인자거우촌(尹家沟村)에 있었습니다. 장시우롱과 제자들 몇 명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이 겨우 벽만 4방을 둘러싸고 있는 집안의 광경이었습니다.

 

 

천 씨 가족은 총 6명으로, 천즈더에게는 형 1명과 4명의 여동생이 있었고, 부모님의 건강은 좋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농촌 가정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몇 마디 주고받은 뒤, 알고보니 천 씨 가족은 천즈더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러 내보내서 생활비를 보태게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 씨 아버지의 말에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참지 못한 장시우롱 선생님은 천 씨 아버지에게 "지식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며 천즈더를 덥석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시우롱의 설득 끝에 천 씨 가족은 천즈더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학교로 돌아온 천즈더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 선생님이 직접 자신의 집에 와서 일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분명히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일을 하러 나가야 했을 것이고, 그러면 영영 이번 생에서는 공부와는 작별을 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3학년때 1년간 숨가쁘게 공부한 천즈더는 우촨현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천즈더에게 자꾸만 장난을 치며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중학교때 학교를 그만둘 뻔한 지경에 이르렀던 천즈더에게, 이번엔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해서, 천즈더의 학구열을 꺾는데에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울고, 마음아파한 이후, 그는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졌고, 공부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을 뿐입니다.

 

 

 

 

 

천즈더는 겨울, 여름 방학때믄 며칠 씩 장시우롱 선생님의 집에서 머물며 마당을 청소하고, 아이를 돌봐주고, 집안일을 도왔습니다.

 

 

그는 줄곧 자신에 대한 선생님의 도움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그는 보답할 수 있는 힘이 없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1982년 여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나오자, 공부를 잘했던 천즈더는 기대에 부응하여 현 전체에서 2등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정오, 천즈더는 흥분한 나머지 장시우롱 선생님의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다 열기도 전에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장 선생님, 저 창춘 지질학원(长春地质学院)에 합격했어요, 앞으로 도시 호구(城市户口)가 생기게 된대요..."

 

 

 

 

 

대학 합격 통지서를 보며 선생님과 제자는 무척이나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장시우롱 선생님은 천즈더가 입었던 옷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하였습니다.

 

 

천으로 된 바지는 오래전에 하얗게 바래버렸고, 바지 아래에는 커다란 파란색 기운 헝겊이 붙어있었습니다.

 

 

장시우롱의 기억으로는, 그녀가 천즈더의 담임을 맡았을 대부터 이 학생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입었던 옷은 덕지덕지 기운 옷 뿐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지식을 추구하던 천즈더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장 선생님이 그에게 "지식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해주었었고, 천즈더는 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젠가는 자신이 지식으로 가난한 모습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가정의 불행과 삶의 어려움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대학 1학년 때, 그의 아버지도 병으로 돌아가셨고, 이때부터 그는 부모가 없는 고아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또 다른 한분이 늘 그를 보살펴주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장시우롱 선생님이었던 것이죠.

 

 

 

 

창준 지질학원에 갔을 때, 천즈더는 수중에 단 돈 70위안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끊임없이 절약했고, 자존심이 강해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창춘의 겨울은 춥고 길었습니다. 영하 30~40도가 일상이고, 밤에는 영하 40~50도까지 내려갔었죠. 그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솜이 들어간 면화를 살 수가 없어서 단화 한 켤레를 신고 겨울을 났습니다.

 

 

그때, 장시우롱 선생님은 다른 학우들로부터 이 상황을 알게 되고, 마음이 아파서 밤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우체국이 문을 열자마자 장 선생님은 천즈더에게 20위안을 부쳐주며 빨리 면화를 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20위안은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푼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38년 전의 20위안의 가치는 무척 컸습니다. 당시 장시우롱 선생님의 한달 월급이 고작 37위안에 불과했는데, 20위안이면 월 수입의 절반 남짓한 큰 금액이었던 것이죠.

 

 

물론 장 선생님이 천즈더에게 보내준 돈이 얼마가 되었든 돈 그 자체의 금액만으로 가치를 따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엄마같은 중학교 담임 선생님은 학생이 가장 필요할 때 따뜻한 두 손을 내밀어 주었고, 이러한 따뜻한 마음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천즈더는 장 선생님이 보내줏니 20위안의 돈을 받고 무척이나 감격스러워하며, 쓰지 않고 오히려 다시 장 선생님께 돈을 돌려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선생님이 보내주신 따뜻한 정을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천즈더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취업하지 않았고, 대경석유연구원에서 석사과정에 진학한 뒤 2003년에 박사를 졸업하고 나서야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형과 여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촨현을 차례로 떠났지만, 천즈더는 늘 고향땅을 잊지 못했습니다.

 

 

매번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가장 먼저 장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고, "선생님 댁에서 묵고 가도 되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늘 장 선생님은 "그래, 고향에 오면 우리 집에 와서 묵어라!"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2007년, 장시우롱은 어느덧 60세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선생님의 환갑 생일을 준비하였습니다.

 

 

생일날, 천즈더는 일 때문에 장시우롱 선생님의 생일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는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생신축하드린다고 하고, 나중에 더 축하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늦은 생일 선물

 

 

전화 한 마디로 나중에 다시 더 축하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상투적인 예절의 말일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즈더의 이 말은 정말 진심이었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선물로 돌아왔죠.

 

 

시간이 좀 지난 후, 천즈더는 우촨현에 돌아와서 장시우롱 선생님께 생일 선물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방에서 10만 위안의 현금을 꺼내서 드렸습니다. 선생님께 이 돈으로 집을 사시라고 한 것이죠.

 

 

 

 

 

장시우롱 선생님은 정말 놀라며 제자의 이런 마음은 받을 수 있지만, 돈은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거절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즈더가 우촨현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70평방미터짜리 아파트 한 채를 알아봐달라고 했던 것이죠.

 

 

학생이 은사님에게 집을 사 주는 것에 대해 장시우롱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라고 신기해했습니다. 대체 천즈더는 왜 선생님에게 집을 사 드릴 생각을 했을까요?

 

 

천즈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 선생님이 없었다면, 자신의 오늘날의 모습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고, 장 선생님의 그런 따뜻한 정을 자신은 늘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외지에서 일하고 있어서 장 선생님 부부를 돌봐드리기도 어려웠고, 노부부가 아직도 구식 단층집에 거주하고있고, 화장실도 따로 없어서 일상생활이 너무 불편했던 것이 계속 마음이 쓰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의 나이는 해마다 늘어가고 있으니, 편하고 따뜻한 집을 장만해드리면 마음이 든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제자 덕분에 단층집에서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장시우롱 선생님은 천즈더의 집 선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 자녀도 이렇게는 못해주는데!"라며 고마워해했습니다.

 

 

장시우롱 선생님은 천즈더의 공부와 생활만 도와준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과 배필까지도 중매해주셨다고 합니다.

 

 

천즈더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여느 때처럼 장 선생님의 집을 찾아와 선생님께 자신의 학업 성취도를 알려드렸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일어난 장시우롱 선생님은 종이 한 장위에 천즈더의 글씨로 가득 차 있는 한 여자 아이의 이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바로 그녀가 가르치던 제자였습니다.

 

 

장시우롱 선생님은 웃으며, 천즈더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천즈더를 데리고 직접 그 여자아이를 찾으러 갔는데, 그 여자아이는 장시우롱 선생님의 간곡한 설득과 지원으로 나중에 천즈더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부인은 나중에 불행히도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두 번째 부인을 얻게 된 천즈더는 틈만 나면 두 번째 부인을 데리고 장 선생님을 자주 찾아오곤 한다고 합니다.

 

 

장시우롱 선생님은 천즈더에게 스승으로서 가르침 뿐만 아니라 아들에 대한 엄마의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이가 든 사람은 이런 저런 뇌심혈관 질환을 피할 수 없는 법이죠. 천즈더는 장시우롱 선생님에게 고혈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서둘러 약을 사서 부쳤습니다. 그가 사서 부쳐준 혈압 강하제는 매우 비쌌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번에 여러 갑씩 사서 부쳤습니다.

 

 

천즈더는 "장 선생님, 약은 꼭 제시간에 드시고, 다 드시고나서는 제게 알려주시면 다시 보내드릴게요." 라고 덧붙였습니다.

 

 

장 선생님은 "안 보내도 된다, 혈압약은 우리 현의 약국에서도 살 수 있어."라며 마다했지만, 천즈더는 웃으며 "제가 보내드린 거랑은 달라요."라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선생님께 보내드린 제자의 효성이 듬뿍 담긴 이 혈압 강하제에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따뜻한 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2016년, 장시우롱 선생님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천즈더는 이 사실을 알고는 창춘으로 모셔오고 싶어했고, 그는 장 선생님에게 "제가 봉양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장시우롱 선생님은 여전히 우촨현에 살고 있는데요, 그녀는 천즈더의 생활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제자의 "제가 봉양하겠습니다."라는 그 한 마디로도 그렇게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이 들었고, 이렇듯 이 제자의 정이 깊은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장시우롱과 천즈더의 관계는 비단 면화 한 켤레의 정 뿐만 아니라 천즈더의 일생에 걸친 은혜로 바뀌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이 가장 어렵고 도움이 필요할 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등불을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며 사심없는 배려를 베풀어주었고, 학생이 어려움 속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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