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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 법학석사를 졸업한 뒤 뛰어든 쌀국수 창업의 길... 젊은 CEO 장텐이(张天一)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후난성 출신의 한 젊은이가 베이징대 법학석사를 졸업한 뒤, 겨우 7만 위안을 들고 가게를 차려 미펀(米粉, 쌀국수)을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가게의 쌀국수 한 그릇은 그 가게를 방문한 기자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매웠다는데요, 마치 쌀국수 속에 후추가루가 잔뜩 들어가있는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고 합니다.
기자 왈: "후난성 창더(湖南常德)에서 온 손님들이 맛없다고 한 적이 있나요?"
그는 경멸하는 어조로: "잘 이해못하는 사람은 항상 있는 것 아닙니까."
기자는 다시 한번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은 왜 궈마오(国贸)에 가게를 열었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궈마오에 있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동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도 바보가 아닌가, 메리(Merry)라는 이름에, 옷 입은 것도 개같고, 사람같이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몸은 여기에서 쌀국수를 팔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 때문에 인터뷰 내내 긴장감이 흘렀다고 하네요.
그가 바로 장텐이(张天一)입니다. 그는 베이징대 석사이고, 90년대생 창업자이며, 본업에 종사하지 않고 재능을 썩힌다고 동밍주(董明珠)에게 욕을 먹은 바로 그 사람이죠.
2014년, 장텐이는 90년대생 창업자 대표로 뽑혀 <신문연파(新闻联播)>에 등장했고, 2015년에는 국가지도자가 직접 매장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 해외 언론들도 앞다퉈 그의 가게를 보도하였습니다.
2020년에 코로나 영향으로 한때 망했다고 느꼈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시 일어서게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가게를 연 지 6년이 지난 지금, 그의 몸값은 5억 위안으로 높아졌고, 100여 개의 미펀 가게를 내면서 사업의 판도가 넓어졌습니다.
01.
사실 장텐이의 반역에는 일종의 준칙이 있다고 합니다.
1990년, 장텐이는 후난 창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머니는 대대로 큰 부잣집 출신 사람이었지만, 반항적이었던 할머니가 봉건세속을 타파했고, 그러한 기질을 손자에게 물려준 것 같다고 하네요.
후난성은 자고로 고추가 많이 나는 지역인데, 후난성 출신인 장텐이를 보면, 고추를 먹으면 화기(火气)가 세지고, 화기가 커지면 화를 많이 내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은 장텐이에게 모두 있는 것이고, 문화적으로도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현재의 장텐이가 이렇게 충돌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는 전형적인 중산층 문화가정에서 태어났는데요, 아버지는 의사이고, 어머니는 변호사입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교육에 신경을 써서, 각종 책들을 아들에게 사다주곤 하였습니다. 어떤 책이든 그는 모두 읽었고, 고등학교때는 이십사사(二十四史, 청대 건륭 연간에 지어진 중국 역사사)를 다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정위안졔(郑渊洁)의 책을 매우 좋아했는데, 오랜 세월 이렇듯 훈도(熏陶)를 받아온 장텐이는 사람은 남들 다 하는 것을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에 유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은 자신의 구미에 딱 맞는 것이었죠.
독서를 좋아하는 그는 더욱 문인들의 대쪽같은 성정을 흡수하였습니다.
새로움을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그가 곤두박질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14살 때, 그는 중학교 시험을 보러 선전(深圳)으로 보내졌는데, 시험을 치를 때, 뒤에서부터 앞으로 문제를 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분명히 선생님에게 가장 기억에 남게 되겠지."
그러나, 결과는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시험은 잘 치르지 못했습니다.
대학 수능시험은 이렇게 놓치지 않았고, 그는 "전체 장원은 못해도, 단과 장원은 할 수 있을 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수능시험에서, 장텐이는 일필휘지로 거창하게 문언문작문(文言文作文)을 했고 0점을 받아서 베이징 외국어학교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쉴 새 없이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그 이유는 그동안 줄곧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는 문제 의식이 그 자신을 괴롭혀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각종 동아리 활동과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 회장 자리에도 올랐습니다.
학습 시간 외에 그는 각종 문장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조성(潮声)>의 편집장을 지냈고, 중국 인민방송 <문화지산(文化地产)>의 특약 논평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장텐이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지 못했고, 그는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각종 인턴십을 계속하며 다양한 일자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보좌관, 비서관, 프런트 데스크 등등을 거치며 어느 자리에서든 한 달 이상 근무하지 않아 HR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노점상, 가판대 판매원 등 불규칙한 생업을 경험하면서 차별화된 천성을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점에 "장맹남이기(张猛男耳机, 장 마초 몸짱 이어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의 빼빼마른 선비같은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마초 몸짱(猛男)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는데요, 이러한 독창적인 모습이 오히려 적지 않은 고객을 얻은 것도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이어폰을 산 사람마다 모두 가입시켜서, 가입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대학때 룸메이트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당시 이 사람이 꽤나 괴롭힐 줄 알았다."
돈을 충분히 벌고난 후, 그는 대학 4학년 때 첫 외식회사를 차렸는데, 주로 학교 주변에서 만두를 팔았고, 베이징 웨이공춘(魏公村)과 우다오커우(五道口)에서 조금 유명했었습니다.
모두들 그가 이 외식업체를 잘 지켜낼 것으로 생각하던 차에, 그는 돌연히 가게를 다른사람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유람하기 시작했고, 그는 먼저 대만 행운대사 불광산(台湾幸运大师佛光山)을 시작으로 , 베이징 룽취안쓰(北京龙泉寺), 산시 중난산(陕西钟南山), 허베이 바이린찬쓰(河北柏林禅寺) 등을 거쳤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자신이 꿈꾸던 베이징대 법학과에 거침없이 합격하였습니다.
베이징대학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는 동안, 장텐이는 가만히 있지 않고 문학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불학 경력까지 더해, 번민하는 90년대생이 되었습니다.
로스쿨 재학 중 베이징대 베스트 10 연설에 선정되기도 하였는데, 그는 베이징대 대학생 강연대회에 대표로 참가하여 1등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02.
그는 대학생의 99%가 졸업하자마자 이 사회의 규칙에 한 대 얻어맞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규칙을 깨려면 먼저 규칙을 이해해야 한다며, 그는 직업을 찾아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장텐이는 24세 때, 자신이 펴낸 <90>을 들고 <비니막속(非你莫属)>에 참가하였습니다.
그가 찾으려는 것은 도서 기획 관련 업무였는데, 현장에 바로 일치하는 선두 기업이 있었습니다.
사장 천샤오쥔(陈晓军)은 "당신의 경력과 재능으로 책을 기획하는 일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신은 왜 <비니막속>에 나왔는가? 마케팅을 위한 것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베이징대에는 관련 채용 공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천샤오쥔은 "인터넷으로 투표해도 되겠는가?"라고 말하며, "당신의 오늘 행동은 확실히 당신의 책을 5천권은 더 팔 수 있겠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속내가 까발려진 후, 그는 난색을 표하며 허울뿐인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장텐이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라고 대답했다고 하네요.
그는 마음 속으로 6년동안 법을 공부했는데, 그만두어야 하는지를 놓고 무척이나 번민하였습니다. 만약 그만두지 않고 그대로 이어간다면, 칸막이 안의 바둑돌처럼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일찍이 그는 초밥의 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본의 한 노인이 80년간 초밥을 빚어와 신화가 된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이 다큐멘터리를 10여 차례 반복해서 보며 충격을 받았는데요, 중국에는 그런 신화가 없었습니다.
베이징에는 한 작은 가게에서 창더 쌀국수를 파는 부부가 있었는데, 장텐이는 이 가게에 자주 가서 먹다보니, 이 가게의 테이블 회전율이 무척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쌀국수를 파는 창업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문화적 인식에 묶여 있었는데요, 베이징대를 졸업한 후 쌀국수를 판다는 것을 스스로도 우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스승인 우 선생님(吴老师)을 찾아갔고, 이후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책상 위에 있는 지구본을 3시간 동안 계속 들여다봤는데, 그를 괴롭히는 졸업의 모든 문제나 고민은 지구본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500강(500强)도 없고, 무역도 없고, 공무원도 없고, 사회보험도 없고, 그저 이 푸른 별 위에서 살아가는 삶의 시간동안, 빛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짐이 거의 풀리자, 그는 미국 고등학교 MBA 전액 장학금을 받은 쑹슈어(宋硕)를 데려오고, 사촌동생과 다른 한 학우를 포함하여 네 명이서 10만 위안을 모아 전설적인 창업의 길을 열었습니다.
개업하던 날,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해진 규범대로 사는 사람은 어디 황제가 될 수 있겠냐, 그리고 그게 세상에서 제일 따분한 일이다."
독특한 성격의 장텐이의 쌀국수 창업의 길은 역시 남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03.
2014년, 24살의 장텐이는 공부만하지 않고, 쌀국수를 열심히 팔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134개의 미펀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하루에 열 몇 그릇씩 사먹어보며 찾아다니면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주 외진 골목에서 근사해보이는 가게를 하나 찾아냈습니다.
장텐이가 이유를 설명하고난 뒤, 가게 주인은 그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는 가게 주인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게를 찾아가는 성의를 보였고, 결국 가게 주인은 가르쳐주기로 하였습니다.
모든 조미료를 전부 다 계량화해서 작은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씩 잰 뒤, 창더 식음료협회(常德餐饮协会)를 통하여 당시 가장 유명한 쌀국수집 주방장을 초청해서 시식을 해본 결과, 비로소 판매할 메뉴의 모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첫번째 가게가 베이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에 문을 연 것도 사실은 결코 세계와 맞서려는 것은 아니었고, 사실은 돈과 맞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성비가 좋은 가게 자리를 찾기 위해 매일 300통씩 전화를 걸다가 이명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글로벌 금융센터의 한 모퉁이 가게가 위치상 좋지 않기는 했지만, 임대료가 싸고 양도수수료가 없었기 때문에 장텐이는 남몰래 기뻐했습니다.
전에 이곳에 있던 가게 세 개가 망해서 나간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자리를 이어받았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좌석 시트는 모두 이전에 있던 밀크티 가게의 것으로 사용하고, 간단하게 닦고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자신감은 넘쳐났지만, 하루에 몇 명 지나다니지도 않았고, 손님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언젠가 가게에 손님이 한 명 왔었는데, 그들의 VIP 손님이 되어 몇 명이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고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평판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4시에 장텐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스리허 농산물도매시장(十里河采购)으로 갔고, 돌아오고난 뒤에는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탕을 끓인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시간의 수면 부족때문에, 실수가 하나 생기게 되었는데요, 그 자신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가게 안에 손님들이 산발적으로 있긴 했지만, 모두 쌀국수를 다 먹지 않고 남겼던 것입니다.
장텐이는 이후 탕 맛이 이상하고 너무 매웠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아침에 사왔던 고추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맵게 해버렸으니, 그는 오늘 틀림없이 혹평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수로 잘못 만들어버린 것을 고객들은 상쾌하게 맵다며 극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객들의 검증을 거친 무지막지한 미펀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들의 장부상 4만 위안밖에 안 남아 있어서, 이렇게 가다가는 두 달도 안 돼 망할 판이었습니다.
몇 명의 파트너들은 이렇게 하면 안되겠다, 뭔가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차라리 이 돈 4만 위안을 내놓아 2000명의 인플루언서들을 초청해서 무료로 음식을 대접하고 입소문을 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장텐이는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50명의 인플루언서들을 초청하여 가입시켰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베이징, 후난 검색 조건에 맞는 이용자들을 먼저 찾아냈고, 베이징의 후난성 이용자들을 가게에 초청하여 시식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장텐이는 고객들이 외면한다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쑹슈어(宋硕)는 그럼 미국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상외고, 수천 명의 고객들이 시식을 마치고난 후, 손님이 점점 많아지면서 가게는 바빠졌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어졌습니다.
힘들었던 이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은 <영혼분관(灵魂粉馆)>이라는 브랜드 영상을 찍었습니다.
그 후, 장텐이는 이어서 한 편의 글을 썼는데요, <내가 석사를 졸업한 이후 쌀국수 집을 차린 이유>라는 글은 뜻밖에도 리트윗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그의 가게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았고, 그의 가게를 한단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게 되었고, 각 매체들은 앞다퉈 보도하였습니다.
장텐이는 각종 창업 논단에 참석하였고, 그가 만든 이 매운 쌀국수가 걷잡을 수 없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장사가 한창 잘 될 때에는 37평방미터 구멍 가게에서 하루 20회의 테이블 회전율을 보였고, 하루 매출이 2만 위안에 달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04.
한 번은 엄청난 손님이 한 분 오셔서 장텐이가 직접 음식을 가져다주러 갔는데요, 이 사람은 바로 투자자로 유명한 쉬샤오핑(徐小平)이었습니다.
장텐이에게 그는 왜 쌀국수를 팔게 되었냐고 물었는데,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 쉬샤오핑이 먼저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당신이 (쌀국수를) 사랑하니까 그렇겠죠. 당신이 이걸 사랑하니까, 난 당신에게 투자하겠습니다."
자신을 모델로 내세우는 장텐이는 일찌감치 쉬샤오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쉬샤오핑의 눈에는 그가 비록 오만불손했지만,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해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빈말만 하는 다른 경박한 젊은이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장텐이는 첫번째 엔젤투자자의 투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돈은 새로운 국면을 여는데 그치지 않았고, 장텐이에게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후난성 창더의 한 그릇에 5위안짜리하는 노부부의 쌀국수 가게를 스타벅스처럼 만들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그렇게해서 스스로 잘 분석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그는 이 쌀국수가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한 나라의 문명의 기호라 할 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2020년, 장텐이는 섣달 그믐날 밤까지도 가게를 열겠다고 호기롭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찬 물이 끼얹어질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코로나가 확산하여 급속히 번져가는 동안, 몇 십개의 쌀국수 체인점은 가게 문을 열지 않아도 나가는 고정비 지출 때문에 마치 에베레스트 산 하나를 등에 짊어진 것처럼 힘겨워했습니다.
2주뒤면 현금흐름이 끊긴다고 회사 재무부에서 알려왔고, 장텐이는 이 소식을 듣고는 혼자 중관춘(中关村) 쇼핑센터 매장으로 가보았습니다. 깜깜한 곳에 불을 켜자, 매장 안에는 "정확한 방역, 건강코드에 맞춰 소독하라"는 단순한 안내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는 가게 입구의 의자에 앉아서 아무도 없는 상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첫번째 가게를 열었을 때처럼 속수무책인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패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집안에 가득 쌓여있는 책들만 읽어도 충분히 혼자서는 행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패배해서도 안되고, 망해서도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사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는 옛 속담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궁리 끝에 또 결정을 내렸는데, 이번 결정은 브랜드를 직접 라이브로 홍보하는 것이었습니다.
2주 안에 오프라인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온라인 프랜차이즈로 살아남는 회사로 거듭나야 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고, 최선을 다해 싸워야 했죠.
장텐이는 곧바로 수백 명의 파트너를 모아 자원하였고, 팀은 두 팀으로 나뉘어 하루에 20시간씩 교대로 릴레이 라이브 방송을 했습니다. 그리고 비주얼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리자치, 웨이야, 뤄용하오, 왕한, 왕펑(李佳琦、薇娅、罗永浩、汪涵、汪峰)같은 외부 스타 앵커들을 찾아가 제품을 가져가기도 하였습니다.
2,3,4월 전체 라이브 방송은 1000회를 넘었고, 결국 2020년에는 전체 실적이 줄기는 커녕 지난해보다 100%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배수진을 친 결과입니다.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내달린 결과였지요.
05.
오늘날, 장텐이는 코로나를 이겨내고 억대의 B륜, C륜(B轮和C轮) 융자를 잇달아 끝냈으니, 돈은 더 이상 제약이 없어졌고, 이제는 37평방미터의 지하상가에서 웅크려있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지금의 그는 세련된 인테리어의 체험식당(体验餐厅) 100 곳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브랜드는 3년 연속 후난 미펀 카테고리 매출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중국 패스트푸드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하버드대 비즈니스 사례 연구 대상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올해 31세인 장텐이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오면서 한층 진중해진 모습으로 더 이상 불같이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그 역시도 결국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매일을 어떻게 잘 보낼 것인가에 대한 짧은 질문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팀원들과 파트너 모두 그의 성격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장텐이의 문인 기질은 여전했습니다.
그의 소셜 미디어 계정은 자주 갱신되었고, 대부분 직접 쓴 글들인데, 어떤 것들은 술에 취한 듯 허풍을 늘어놓고, 어떤 글들은 창업에 대한 고달픔이 극심한 것을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깨달음에 대한 것도 있으며, 네티즌들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한 네티즌은 그의 글에 "텐이형, 지금 베이징에 가서 창업하고 음식 만들면 될까요?" 라고 글을 남겼는데, 그러자 장텐이는 "영원히 늦은 것은 없고, 영원히 뜨거운 눈물이 눈에 가득하게될 것이다."라고 댓글을 달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영원히 씩씩하게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야 하고, 벌레가 되더라도 빛나는 반딧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업의 길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어느날 그는 문득 다른 것을 깨닫고 발길을 돌려도 충분히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독불장군 장텐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앞날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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