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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빈민 쪽방촌의 가난한 소년에서 상하이 최고 부자로 성장한 저우정이(周正毅)의 '전설적인' 인생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상하이 빈민 쪽방촌의 가난한 소년에서부터 시작하여, 영향력이 큰 상하이 최고 부자로 성장한 저우정이(周正毅)의 인생사에는 수많은 '전설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우정이는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그는 더위를 싫어해서 감방마다 자비를 들여 에어컨을 설치했다고 하네요.
이후 16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그는 부를 다 잃기는커녕, 그 기회 덕분에 감옥 안에 앉아서 30억 위안을 벌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 경험은 저우정이의 인생에 많은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게 되었는데, 한때 '상하이의 리자청(上海李嘉诚)'이라고 불리던 상하이의 최고 부자는 옥중에서 화로 인하여 넉넉히 돈을 벌어 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1. 저우정이: 옥중에서 이사회도 열고, 자비를 들여 감방 안에 에어컨을 설치하다.
2002년 포브스지에서 발표한 부자 순위에서 저우정이는 중국 부자 11위를 기록하였습니다.
사실 2002년 이전에 상하이 현지 언론들은 저우정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저우정이 본인 역시도 그동안 한번도 본토 언론과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2002년 내내, ㅅ홍콩 증시에서 '전설'을 이어간 것 외에도, 저우정이는 중국 본토에서도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홍콩 잉황 그룹(英皇集团)과 합작하여 상하이로 사업을 옮겼죠.
상하이에서 상가를 인수하고, 토지 계약을 체결한 뒤, 그는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저우정이는 거침없이 상하이 시장에 진입하여 상하이의 거부가 된 저우정이 회장은 그의 돈을 벌어들이는 기량도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두 차례의 극히 성공적인 투자 경험 덕분에, 저우정이는 부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고,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 비즈니스계의 전설적인 인물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직 저우정이의 천부적인 재능만을 감탄하며 그의 전설적인 비즈니스 이야기를 따라하려고 했지만, 그가 그동안 내내 불패의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은 배후의 은밀한 조작이 있었던 덕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우정이는 2004년 6월, 증권거래가 조작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상하이의 감옥에서 복역하였습니다.
눈에 띄는 점은 당시 저우정이가 중국 본토에서 복역하고 있었음에도 줄곧 홍콩 염정공서(廉政公署)의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홍콩 증권감독위원회가 여전히 저우정이에게 책임을 물어 홍콩에서 법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우정이에게 투옥이 곧 수사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투옥된 후, 저우정이는 일찍이 형량을 낮추어 조기출소를 하기 위한 시도를 했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게다가 저우정이의 형량을 낮춰주기 위해 노력했던 티젠차오 교도소(提篮桥监狱) 교도처장도 현재 관계부처로부터 비리혐의로 인해 소환장(双规)을 받은 상태입니다.
2004년 6월 1일, 저우정이는 상하이시 제1중급인민법원에 의해 증권 거래 가격 조작과 등록 자본 허위 신고죄로 유기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6개월 후, 상하이시 구치소에서 상하이시 티젠차오 교도소(提篮桥监狱)로 옮겨졌습니다.
티젠차오 교도소에서 저우정이는 2년간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티젠차오 교소소국에서는 저우정이의 사건을 위해 4명의 팀을 구성했는데, 왕정밍(王争鸣)은 감형, 가석방을 담당하였고, "티젠차오 교도소에서 저우정이의 감형을 두 차례 신청했었는데, 실제 책임 작업을 맡은 것은 왕정밍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우정이가 티젠차오 교도소로 넘어간 이후, 그 특수한 지위는 점차 그 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저우정이가 막 투옥되었을 때, 3인실이던 감방은 점차 1인실이 되어갔고, 후반에는 이사회를 여는 회의실까지 생겼습니다.
이곳에서 저우정이는 거의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요, 심지어 감방마다 자비로 에어컨을 설치할 정도였습니다.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이든, 독방에 있는 것이든, 교도소 내에서 이러한 상황은 거의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일부 소수의 경우에만 허용이 되는 상황인데요, 이것마저도 노약자나 어린이 등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죠.
분명히 저우정이는 "돈이 많다"는 것 외에는 위의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감방에 머무는 동안 저우정이는 그를 전담으로 지키는 교도소 간부 위진바오(俞金宝)에게 뇌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투옥 기간 내내 양호한 태도를 보인다"는 사유로 감형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2006년 신정을 전후로, 티젠차오 교도소는 "태도가 양호하고, 확실한 반성과 뉘우침을 보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저우정이를 위해 감형 신청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감형 절차에 의하면, 저우정이의 감형 보고서는 "엄관대(严管队)-티젠차오 교도소-교도소국(监狱局)-사법국-정법위(政法委)"라는 5단계의 절차를 모두 통과해야 감형받을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 영향력이 큰 죄수였던 저우정이는 감형 보고서가 차례차례 각 단계를 통과하다가 교도소국 단계에서 반려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상쩍게도 저우정이의 감형 보고서가 반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한번 티젠차오 교도소를 통해 교도소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저우정이는 티젠차오 교도소 내부 인사를 통해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제1차 감형 계획은 홍콩의 지명수배 사실 때문에 막혔고, 저우정이의 감형 보고서는 두 차례 모두 반려되었습니다.
이로써 저우정이는 조기 출소를 단념하고 2006년 5월 26일에 만기 3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였습니다.
<21세기경제보도(21世纪经济报道)> 기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저우정이의 감형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옥중에서 많은 보살핌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감옥에서 복역하는 동안, 저우정이는 그의 '상업 제국'에 대해 잊지 않고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모니터링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옥중에서 이사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2. 2차 수감, 16년간 복역하면서 30억 위안을 벌다.
저우정이의 형기가 만료된 후,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우정이는 겨우 3개월이 지난 후, 또 다시 상하이시 전 당서기 사회보장기금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기율검사위원회(纪委部门)에 유치되어 조사를 받았습니다.
저우정이가 수감되었던 바로 그 동안 티젠차오 교도소에서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었던 창황젠(长黄健) 교도소장, 위진바오 교도관 등이 인계되었습니다. 그리고 뇌물 수수 사건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는데요, 특히 저우정이의 사업 파트너였던 천랑쥔(陈良军, 천량위(陈良宇)의 동생)은 겁도 없이 감옥을 드나들며 그를 문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면 위에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자금 운용의 길을 잘 알고 있었던 저우정이는 큰 힘을 들여 상하이의 은행권 고위 관료들을 통해 은행들의 막대한 자금을 꾸준히 유입시킬 수 있게 하였고, 옥중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막대한 자산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상하이 사회보장기금 사건 연루자들이 숙청되면서 그해 말, 저우정이에 대한 수사도 옥중 뇌물수수에서 세금계산서 허위발급 사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사가 진척되면서 저우정이는 뇌물공여 혐의부터 세금계산서 허위 작성까지 더욱 많은 범죄 사실이 줄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돈으로 어떻게든 막아볼 수 없게 되자, 그를 두둔하며 도와준 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도 줄줄이 입건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7년 11월 30일, 상하이시 제2중급인민법원은 저우정이에 대한 1심 판결을 통해, "부가가치세 전용 영수증을 허위로 발급하여 징역 10년", "개인적인 뇌물 공여로 징역 3년", "자금 횡령으로 징역 6년" 등을 선고하며 그가 유죄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또한 회사에 뇌물을 주고 기업인에 뇌물을 주면서 개인에 대한 처벌을 면하려고 했던 것 때문에 가중처벌까지 더해져 징역 16년을 선고하였습니다.
1심 판결이 나온 후, 저우정이는 이러한 판결에 동의할 수 없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고,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재심을 청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4명의 변호사들이 달라붙어 그를 위해 무죄를 변호하기 시작하였죠.
하지만, 저우정이의 이러한 행동은 공연한 몸부림이었을 뿐, 죄를 인정하고 감옥에 가는 것 외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16년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 2013년, 2016년, 2019년에 세 차례의 감형을 받았고, 복역 기간을 마치고 출소한 뒤에도 저우정이의 사회적인 지위와 부에는 영향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2020년 4월, 출소한 지 1년도 안 되어, 앞당겨 석방된 저우정이는 곧 환갑을 맞이하게 되어 상하이 와이탄의 완다루이화호텔(万达瑞华酒店)에서 60세 생일 잔치를 열었는데, 그 연회에 많은 유명 사회자들이 초청되었고, 유명인들이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저우정이의 환갑 생일 잔치 사건은 사회적으로 일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상하이의 방송국 고위층도 이 사건에 주목하게 되면서 생일 잔치에 참석한 많은 사회자들이 방송 출연을 철저히 금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교수 샤쉐롼(夏学銮)은 사회학적으로 이를 분석하였는데요, 저우정이가 가석방된 이후 출소 후 '재기'를 노리고 있지만, 이전처럼 대 기업가의 풍광을 되살리기는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그중 기업과 직원들이 어떻게 선택할지는 섣불리 평가하기 어렵지만, 대중들의 마음 속에서 저우정이는 이미 상업적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사회적 수용도가 높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부의 양만 놓고 따지면, 징역 16년동안 저우정이는 파산은 커녕, 화를 모면하고, 30억 위안을 거뜬히 벌어들였습니다.
원래 저우정이가 투옥되어있던 기간 중, 하필이면 아시아 지역을 휩쓸었던 금융위기에 맞닥뜨렸고, 당시 부동산 분야에 대거 뛰어들었었던 그는 투옥되었던 덕분에 금융버블을 피해 자신의 부를 지켜냈습니다.
사실상, 저우정이가 처음에 투옥되었을 때 그에게 미쳤던 영향은 미미했다고 합니다.
첫번째 투옥된 직후, 저우정이는 지인들에게 자신은 그래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첫 출소 이후에도 저우정이가 쓸 수 있는 돈은 수억 위안이었고, 몇몇 프로젝트들은 계속 추진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우정이는 비록 많은 부채가 있었지만, 상하이 부동산과 홍콩 부동산이라는 두 군데의 큰 지역의 부동산 산업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몇몇 사업 프로젝트들은 모두 매우 좋은 자산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 그의 부하는 일찍이 옥중으로 찾아가서 업무를 보고하였는데, 저우정이는 여전히 기업을 통제하는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저우정이가 수감중인데도 기업을 유지하면서 부의 가치까지 상승시킬 수 있었던 원인이 되어주었습니다.
두번째 투옥 후, 저우정이는 대부분의 자산이 동결되었고, 그의 명의로 된 부동산과 자산은 모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가 닥쳐왔고, 오히려 이렇게 자산이 동결된 것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도피처가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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