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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창춘시 '지하황제'였던 량쉬둥(梁旭东)의 결말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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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창춘시 '지하황제'였던 량쉬둥(梁旭东)의 결말은?

hanyuku 2021. 10. 29.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 창춘(长春)의 '지하황제(地下皇帝)'였던 량쉬둥(梁旭东)은 수하들을 동원하여 100여건의 범죄행위를 통해 무려 51명을 살해한 혐의로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신중국 성립 후 지린성 창춘시(吉林长春市) 최대 범죄조직의 조직원으로, 범행만 무려 100여건에 51명을 살해하였고, 그 조직의 꼭대기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가 제일 잘 나가던 시절, 다른 조폭의 보스들 마저 몸을 낮추었고, 그에게 '지하황제'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는데요, 량쉬둥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살펴볼 기사에서는 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량쉬둥의 본명은 량샤오밍(梁笑溟)으로, 그는 1966년 8월 30일에 지린성 창춘의 평범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정 환경이 좋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부모는 돈벌이가 바빠 량쉬둥에 대한 교육은 매우 소홀했었고, 그는 종종 사람들과 싸우는 등 집안의 골칫거리였다고 합니다. 어른이 된 후, 량쉬둥의 나쁜 버릇과 성격을 고치게 하기 위해 그를 군대에 보냈는데, 실패하고 군대에서 오히려 더욱 나빠졌다고 합니다.

 

 

1987년, 군 제대 후 량쉬둥은 더후이시(德惠市)로 복귀하여 양곡운송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요, 요즘 같은 시절에는 별것 아닌 직장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철밥통으로 불릴 만큼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일하던 직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량쉬둥에게는 그런 철밥통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너무 적어서 자신의 야망을 만족시킬 수 없었죠.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량쉬둥의 신체적 자질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는 군대에서 배운 무예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잘못된 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예를 이용하여 현지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더후이시 조직 폭력배들과 어울리게 되었으며, 2년 후에는 그는 자주 싸움질을 하고, 치안을 악화시키는 비뚤어진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죠.

 

 

1993년까지만 해도, 그는 회개할 줄 모르고 다시 야심을 드러냈지만, 우연히도 그는 천(陈) 씨, 장(张) 씨, 쑨(孙) 씨와 친분을 쌓게되어 "양노(两劳, 노동 개조형)"일당들을 규합하여 조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현지에서 범행을 일삼으며 상습적으로 모여 싸우며 세력을 키워갔고, 그 세력이 점점 커져서 훗날 독주하는 범죄조직으로 거듭났습니다. 량쉬둥은 양노 석방자들을 다수 알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향후 량쉬둥 범죄조직의 2인자였던 두룽쥔(杜荣军)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수하들의 야심이 점점 커지자 그들은 창춘시를 타겟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싸움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무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량쉬둥은 창춘시를 타겟으로 삼을 때부터 권총, 엽총, 칼 등의 흉기를 불법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고, 량쉬둥은 자신의 경찰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일당을 위해 뒷문까지 열어주며 세력을 키웠고, 창춘시에서 량쉬둥 범죄 조직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그의 형님의 역량이 워낙 크고 인맥도 넓어서 량쉬둥은 그를 경찰에서 건져낸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배후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을 창춘시의 한 부서의 보위과장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여기까지만 하고 범행은 저지르지 않았을 법도 한데, 그의 형님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를 그 자리에 앉히기까지 했으니, 그 배후의 인맥이 얼마나 두터운 지 알 수 있습니다.

 

 

1996년 7월, 량쉬둥은 드디어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대출 수속 불합격 사유로 주(朱) 모씨 대부과장의 거절을 당했는데요, 주 씨는 량쉬둥의 대출 요청을 거절했던 이유가 다름아닌 저당잡힌 사업자 등록증을 갖고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업자 등록증이 량쉬둥 본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인데요, 량쉬둥은 합작을 이유로 모 회사에 사업자 등록증을 요구했던 것이었죠. 대출이 거절 당하자 불만을 품은 량쉬둥은 주 씨에게 보복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달 28일 오후 9시경, 량쉬둥은 주 씨의 퇴근길에 그를 마구 폭행하였고, 대형 몽둥이로 머리를 때리며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량쉬둥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주 씨를 폭행 및 협박한 후에도 주 씨가 자신의 결정을 고수하며 대출 수속을 거부하면 어떻게 할까였습니다. 그래서 량쉬둥은 주 씨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방식을 생각해냈습니다. 바로 주 씨의 사랑하는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찾아가겠다고 아이를 두고 협박했던 것입니다.

 

 

사건 다음날, 협박을 받은 주 씨는 량쉬둥의 대출 요청을 승인해주었고, 량쉬둥은 원하는 대로 180여만 위안을 받아갔습니다. 이 돈의 행방도 정상적인 소비가 아닌, 고리 대금업에 사용할 목적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는 민경(民警)의 신분으로 많은 공직자들을 사귀고 차근차근 발전하며 범행을 저질러갔습니다. 그는 범죄 조직에서 죄를 저지르면, 높으신 분들이나 그의 형님에 의해 제재를 모면해왔고, 빚 독촉이 있을 때는 그의 아우들이 무력을 휘두르며 채권자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해왔지만, 아우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되고, 고리대금업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결국엔 공안 기관의 수사와 추적을 받게 되었고, 량쉬둥은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비록 당시에 량쉬둥 일당은 잘나갔다고 하지만, 량쉬둥은 일이 터지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과연 어느정도 엄격한 규칙이었던 것일까요? 그들 조직은 등급이 명확해서 부하직원에게 일이 생기면 상급자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처리할 수 있었고, 규정을 가볍게 어기면 손가락을 잘랐으며, 규정을 어긴 정도가 중하면 다리를 잘랐습니다. 이렇게 엄격하고, 조직에 충성하게 하는 관행 덕분에 그들 패거리는 승승장구하였고, 범죄조직의 세력이 날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량쉬둥이 31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창춘시에서 내로라하는 조폭가의 두목이 되어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절정기를 달렸지만, 그의 방자함과 오만함은 결국 그가 멸망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갑자기 상부의 지시를 받고 집무실로 출근하여 업무를 보고하게 되었는데요, 간단한 업무라고 생각한던 량쉬둥을 기다렸던 것은 바로 경찰의 제재였습니다. 그는 다시 붙잡힌 뒤에도 자신 위에 높으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심문이 두렵지 않다고 하며, 두 달 정도면 나갈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그의 배후에 있던 인맥이 무용지물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법원은 량쉬둥 일당이 1994년부터 2000년 사이에 100여 건의 범죄를 저질렀으며, 살해한 사람은 51명에 달해 다수의 피해자가 있고, 전국적인 '1.29 참사'를 일으킨 것으로 범행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형을 명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되었네요.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8995131242572095304%22%7D&n_type=-1&p_from=-1

 

长春曾经的“地下皇帝”梁旭东,手下团伙作案百余起杀害51人

但让梁旭东没有想到的是,在经过严刑拷打之后,朱某仍旧坚持自己的决定,拒不办理贷款手续,梁旭东这一想,自己如果没有钱的话,之后的发展还怎么能进行下去,随后再经过思考想出了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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