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yuku
마오 주석의 증손자 마오둥둥(毛东东)은 어떤 인물일까?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천백 년의 풍습을 보면, 중국 사람들의 생활은 '퇀위안(团圆, 한데 모이다, 함께 단란하게 지내다라는 의미)'이라는 이 두글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합니다. 중국의 명절, 경축일, 음식 이름, 사상적 측면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사람들의 '퇀위안'에 대한 집착은 다른 민족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하네요. 100년 전 혁명지사들에게 '퇀위안'은 희망이었고, 혁명에 참여하던 날부터 그들은 편안하고 안일한 삶과는 멀어졌고 숭고한 사명감만 남게 되었습니다.
후난(湖南)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마오 주석은 젊은 지사(志士)들과 마찬가지로 원대한 이상을 품고 혁명 대열에 합류했고, 그의 동생과 아들 딸들도 그의 뒤를 따라 부패한 관료주의 계급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마오 주석의 삶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그의 말년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혁명 사업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의 희생이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혁명 초기에 마오 주석의 친동생인 마오쩌탄(毛泽覃)은 마오 주석이 포함된 대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혼신을 다해 적의 추격을 유인하였고, 그 과정에서 결국 용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마오쩌탄이 사망한 뒤, 그의 아들 마오안청(毛岸成)은 민간으로 보내졌고, '허루청(贺麓成)'이라는 가명으로 불리며 마오 주석이 사망할 때까지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중국 성립 후, 마오쩌둥 주석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은 안일한 생활을 포기하고 중국 인민지원군(中国人民志愿军)을 따라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가족 간에 헤어지는 충격을 받게 된 마오 주석은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자신의 곁에 두고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살기로 하였습니다. 차남인 마오안칭(毛岸青)과 장녀 리민(李敏)이 잇따라 결혼했지만, 마오안칭은 몸이 약해져 요양하러 가야 하는 바람에 손자를 보고 싶은 마오 주석의 바람은 접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 마오안칭이 부인 샤오화(邵华)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마오신위(毛新宇)를 낳게 되자, 썰렁했던 마오 집안에 기쁨이 흘러넘쳤고, 마오 주석의 옛 전우들과 동료들도 그를 진심으로 축복해주어 그나마 위안을 삼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손자 마오신위가 여섯 살 때, 마오 주석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것은 중국 국민들에겐 큰 상실로 다가왔습니다. 비록 마오 주석이 손자의 성장을 함께 지켜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사상은 마오가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있다고 합니다. 마오안칭 부부는 아들이 하루빨리 할아버지가 남긴 위대한 사상의 계승자가 되어 할아버지를 능가하는 업적을 남기길 바랐습니다. 부모의 바람을 등에 업고, 마오신위는 중국의 정치인재 배출 대학인 인민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중앙당교(中央党校) 석사 학위, 군사과학원 박사 학위를 잇달아 취득하여 손꼽힐 정도로 우수한 학력과 배경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그는 부모의 주선으로 군에 입대하여 10년 만에 소장(少将) 직위를 부여받아 집안의 이름을 빛냈습니다.
2003년, 마오신위 소장은 부인 리우빈(刘滨)과 결혼하여 마오 주석의 탄생 110주년 기념일에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마오 주석의 4대 후손이 세상에 태어나자, 중국은 떠들썩해졌고,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던 마오 주석의 딸 리너(李讷)마저 깜짝 놀라 마오신위 소장 일가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장남의 이름을 지을 때 일가족은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들은 이 중요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우의(寓意)적인 이름을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베이징대 문학과 출신이었던 리너는 '마오둥둥(毛东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네요.
마오둥둥은 온 가족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족들이 그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 마오신위 소장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독립 자주와 여러 방면의 자질을 강화해왔고, 위인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 영예를 감당하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노력과 댓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집에서 마오둥둥은 일찍부터 효성스러워서, 어려서부터 모든 집안일을 챙기고, 퇴근하는 부모님에게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도 마오둥둥은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것은 물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해왔으며, 성적 역시도 줄곧 학교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명실상부한 우수생인 마오둥둥은 성적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취미활동에도 조예가 높았습니다. 마오둥둥의 최대 취미는 고시어(古诗词)연구와 서예 연습이었는데, 이것은 마오 주석이 살아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취미활동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혈연을 초월하는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마오둥둥은 마오 주석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이 경박한 시대에 많은 젊은이들은 역사 서적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혁명 선배들의 업적을 인내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마오둥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오신위 소장은 아들이 어릴적부터 그의 사상 교육에 힘썼고, 마오둥둥은 마오 주석과 관련한 책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오둥둥과 같은 젊은 피가 가미된 마오 주석의 사상은 곧 중국 내에서 새롭게 힘을 얻어 명맥을 이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 의미가 클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2021년이 된 지금, 앳된 얼굴의 마오 집안의 후손은 이제 18세의 뜻있는 청년으로 자라났고, 그의 외모도 마오 주석과 닮아졌으며, 훤칠한 외모도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카메라 앞에서 수줍음을 많이 타던 어린 남자아이는 이제 젊은 청년으로 자라나며, 자신이 짊어진 모든 것을 알게 된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마오 주석의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는 물론이고, 마오둥둥은 마오 주석의 좋은 점들을 많이 물려받아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라고 합니다. 이 마오 가문의 훌륭한 후손이 계속 분발하여 자신의 총명함과 지혜로 국가와 인민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란다며 기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조상들의 훌륭한 사상과 덕목을 계승하고 발전하는 것은 훌륭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毛新宇的儿子,主席的第四代曾孙,今年18岁,和青年的毛主席神似
纵观中国人民千百年来的习俗,不难看出人们的生活始终离不开“团圆”这两个字。从节日庆祝,到食物名称,再到思想层面都能看出中国人民对“团圆”有着非比寻常的执念,这种执念是其他
mbd.baidu.com
'China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쓰촨성에서 32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이야기 (0) | 2021.11.05 |
---|---|
중국 암 발생 지도 공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암과 그 지역은 어디? (0) | 2021.11.04 |
근대 중국의 유명 화가 치바이스(齐白石)의 풍류 인생 스토리 (0) | 2021.11.01 |
중국 창춘시 '지하황제'였던 량쉬둥(梁旭东)의 결말은? (0) | 2021.10.29 |
메이퇀(美团)의 허울뿐인 공동부유(共同富裕)? (0) | 2021.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