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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유명 화가 치바이스(齐白石)의 풍류 인생 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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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유명 화가 치바이스(齐白石)의 풍류 인생 스토리

hanyuku 2021. 11. 1.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50년대 베이징 자금성 정문 밖에서, 셰허 병원(协和医院) 간호사장 샤원주(夏文珠)의 집안에서는 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그녀의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원주를 내게 돌려달라"고 간곡히 말하고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이 노인은 치바이스(齐白石)라는 유명한 화가로, 90세에 가까운 나이였고, 샤원주는 40대였습니다.

 

 

어르신이 나이 어린 아내의 처가에 쫓아가 무릎을 꿇고 있으니, 만약 누가 이것을 본다면 아내에 대한 정이 깊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치바이스의 인생에서 어린 아내를 맞았던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샤원주와 치바이스

 

 

치바이스의 첫번째 어린 아내는 후바오주(胡宝珠)라는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치바이스의 본처 천춘쥔(陈春君)의 선택으로 '첩'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본처는 후난성에 있고, 후바오주는 그의 곁을 지켰는데요, 이런 상태는 치바이스의 일생에서 20년 넘게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1940년이 되자, 본처 천춘쥔이 샹탄(湘潭)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 많은 친지들의 축복을 받으며 그녀는 정실 부인으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황당한 일이지만, 그 시절 중국에서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자고로 촉나라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았는데, 치바이스가 평생 마음에 들어했던 여자들 중 두 명이 모두 쓰촨사람이었습니다. 후바오주는 그 중에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후바오주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어렸을 때 부잣집에 시녀로 팔려갔습니다.

 

 

하녀라는 신분 때문에 후바오주는 당시 치바이스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합니다.

 

 

후바오주와 치바이스

 

 

57와 18세의 나이는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 관계 같은 엄청난 나이차이죠. 외부에서 보기에 치바이스와 후바오주의 결합은 마치 농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깊은 애정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57세의 나이로 홀로 베이징에 올라와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렸던 치바이스는 후난후(胡南湖)라고 불리는 한 명예와 위신을 갖춘 인물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후난후는 인재를 잘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났는데, 그는 치바이스와 후바오주 사이의 월하노인이 되어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후난후는 어느 날 우연히 치바이스가 그린 <편두도(扁豆图)>를 보고, 이 그림을 손에 넣으려고 애썼습니다.

 

 

나중에 치바이스에게 자신이 데리고 있는 한 계집종과 맞바꿀 용의가 있다고 말했고, 당시 후난후의 집에서 그의 어머니를 섬기고 있던 후바오주는 그림대신 자신이 팔려가게 되었는지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치바이스의 그림이 귀해서인지, 아니면 하녀의 신분이 천해서인지는 지금으로썬 알 수 없는 일이죠.

 

 

 

탁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후바오주

 

 

여하튼, 후난후는 정말로 계집종을 보내왔습니다.

 

 

그날, 후난후는 "사색례(四色礼)"를 가지고 치바이스의 거주지에 방문했습니다. "사색례"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덕담을 건네는 의미이기도 하고, 중매인이 찾아와서 혼담을 꺼낸다는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후난후가 가져온 "사색례"와 계집종 후바오주는 바로 후자의 의미였지요.

 

 

후난후는 계집종을 맞바꾸는 것을 "사색례"라는 형식을 빌려와서 보냈던 것입니다.

 

 

이때, 열여덟 살도 안 된 이 소녀는 치바이스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고, 본처 천춘쥔이 일찍이 남편을 위해 첩을 찾아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후바오주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합니다.

 

 

물론, 무엇보다도 치바이스가 그녀를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군압도(群鸭图)

 

 

 

후바오주는 글자는 몰라도 젊고 총명하였고, 평소에 치바이스가 그림을 그릴 때, 옆에서 보고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똑똑하고 영리한 아가씨가 곁을 지키게 되자, 치바이스는 약간 곤란스럽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예전에 후바오주는 단지 계집종이었을 뿐, 글자도 몰랐는데, 치바이스를 따라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귀동냥을 하고 실력을 갈고 닦았던 것이죠.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재능이 있어서 이미 치바이스의 많은 작품들을 모사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가짜를 진짜와 혼동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치바이스는 책상에 놓인 군압도 한 점을 보고, 자신이 그린 것인 줄 알고, 붓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습니다.

 

 

이튿날, 이 그림이 후바오주의 모사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치바이스는 경탄하며 "이 그림은 후바오주가 그린 것"이라고 정정했다고 합니다.

 

 

이후, 후바오주가 군하도를 그리자, 치바이스는 놀라고 기뻐하였고, 심지어 근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군하도(群虾图)

 

 

 

당대의 거장들도 나름대로의 사심(私心)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때 치바이스는 명성이 자자했으니 자신에게 불리한 소문이 나길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부인 후바오주가 대필한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질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치바이스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군하도에 한 대목을 올려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명성을 지키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 솜씨를 과시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조치였지요.

 

 

그러나, 후바오주는 총명하고 영리해서 치바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불수앵도서자도(佛手樱桃鼠子图)

 

 

후바오주는 글자는 잘 몰랐지만, 커다란 글자가 자신의 그림 한 켠에 등장하자,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심려를 끼쳤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후바오주는 치바이스의 그림을 모사하지 않았고, 대신 그녀는 치바이스의 건강에 온통 신경을 썼습니다. 늘 허약하고 병약했던 그녀는 치바이스의 의복과 음식, 그림 그리는 일을 극진히 보살폈습니다.

 

 

말년에 치바이스가 이 현명한 처를 기억할 때마다 그는 후바오주의 현혜함을 칭찬하였고, "바오주가 병들어 보살핀다(宝珠带病相扶持)"는 도장을 새겨 그녀에게 보내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현명한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바이스는 그녀를 저버릴 뻔 했다고 합니다.

 

 

 

 

치바이스가 70세가 되던 해, 유쾌하지도 않고 떳떳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슈화(淑华)"라는 이름의 여인을 만났을 때, 이 소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죠. 그리고 아련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슈화는 후바오주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쓰촨 출신 아가씨였는데요, 치바이스는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비록 후바오주는 치바이스 곁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아내의 명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수 년을 함께 지내왔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여자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치바이스의 집안은 시한폭탄과 같은 불안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는데, 설마 보내버릴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도 이때 큰딸 쥐루(菊如)가 와서 이 까다로운 일을 해결했다고 합니다.

 

 

 

 

쥐루는 치바이스와 본처의 딸이었는데, 후난성에서 아버지를 만나러 올라왔던 것이었습니다. 쥐루가 보기에 이 슈화라는 아가씨는 일하는 것이 시원시원하고, 생김새도 깨끗하다고 여겨서, 그녀에게 자신이 며느리로 만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치쥐루와 후바오주의 말처럼, 두 사람은 손발이 잘 맞았습니다.

 

 

치바이스는 원래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다가 하루아침에 며느리가 될 줄은 몰랐고,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슈화에게 무슨 혼수를 원하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슈화도 치바이스의 재능을 흠모하여 그를 따라왔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림 한 점을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치바이스가 그린 <앵무도(鹦鹉图)>는 슈화에게 보낸 것으로, 그림의 위에는 <허방숙화(许放淑华)>라는 시가 있습니다.

 

 

슈화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결국 다른 남자를 찾아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슈화의 등장은 치바이스와 후바오주의 삶에서 하나의 에피소드가 된 셈이죠.

 

 

하지만 치바이스는 여전히 후바오주에게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치바이스의 본처가 샹탄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바이스는 연회를 열고 좋은 친구들을 초청하여 후바오주를 정실 부인으로 맞이하는 식을 올렸습니다.

 

 

18세부터 40대까지 후바오주는 자신의 청춘을 치바이스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녀에게 마침내 부인이라는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죠. 여러 해 동안의 기다림 끝에 후바오주는 매우 기뻐했지만,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고, 그녀의 몸은 망가져버렸습니다.

 

치바이스와 후바오주, 아들 딸들

 

 

후바오주가 후난에서 베이징으로 와서 정착하는 동안, 그와 함께 살면서 7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녀가 7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치바이스는 이미 78세의 고령으로, 이것이 마지막 아이가 아닐까 생각하여 "량모(良末)"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 치바이스가 82세때, 42세의 후바오주는 또 임신하였고, 이번에는 원래도 몸이 허약했던 후바오주가 고령인데다 난산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몇 년 후 치바이스가 죽으면 자신과 함께 묻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치바이스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매우 상심하였고, 몇 년 후 그녀의 바람대로 치바이스와 후바오주의 무덤은 서로 붙어있게 되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그들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였고,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노년의 나이에도 치바이스는 <위희인(慰姬人)>이라는 죽은 아내를 그리는 한 편의 시를 썼습니다.

 

 

치바이스와 제자들

 

 

그런데 그 이듬해, 자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치바이스는 샤원주와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샤원주는 40대 후반의 간호사장이었는데, 그 나이에도 변함없이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치바이스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밖에 안 되었는데, 다른 여자와 함께 한다는 것과 더불어, 아버지가 84세의 고령이었던 터라 후바오주의 일곱 자녀들은 이와 같은 결정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뜻은 따르기가 어려웠지만, 결국 자녀들은 타협을 했고, 그들은 샤원주를 간호사로서 치바이스의 곁에 두기로 동의했지만, 결혼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으로 못박았습니다.

 

 

당시 샤원주는 치바이스의 총애를 받아 성격이 교만할 수 밖에 없었다는데요,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면서 몇 년 동안 자주 사이가 틀어졌었고, 치바이스는 결국 샤원주의 어머니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 일도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세대 거장들이 사랑에는 별로 보잘것이 없었던지, 샤원주는 7년 뒤 그를 떠났습니다.

 

 

 

치바이스와 우더쉔(伍德萱, 맨 왼쪽)

 

 

샤원주가 떠나버리고, 그에게는 다시 우더쉔이라는 여인이 오게 되었습니다. 치바이스의 곁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외부에서는 우더쉔이 비서로서 치바이스의 곁을 지켰다고 하지만, 그 사실이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당시 90이 넘었던 치바이스의 옆에는 젊은 우더쉔이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쁜 아가씨를 좋아했던 치바이스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아가씨는 마치 예술품과 같아서 누군가는 감상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에 대한 감상을 숨기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때 아름다운 평극 황후(评剧皇后) 신펑샤(新凤霞)를 만나게 되니, 그는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치바이스와 신펑샤

 

 

 

아흔이 넘은 영감이 어색하기 짝이 없게도 젊은 여인을 뚫어져라 응시하자, 우더쉔은 옆에서 여러 번 주의를 주었고, 그것은 도리어 치바이스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신펑샤는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치바이스에게 겸연쩍어 하면서도 "저는 공연하는 사람이니, 마음껏 보세요!" 라고 했다고 합니다.

 

 

신펑샤의 남편인 우주광(吴祖光)역시도 치바이스를 달래며 "보세요, 보세요. 아무도 당신이 본다고 뭐라고 안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치바이스에 대해 경의를 표하였는데요, 어쩌면 이 늙은이가 매우 재미있다고 여겨서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치바이스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펑샤가 이미 결혼한 사실 때문에 방해가 되자, "치바이스 옹이 이렇게 펑샤를 좋아하니 수양딸로 받아주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공감지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치바이스가 이 말을 듣고 만족해하자, 신펑샤 부부도 손해볼 것이 없고, 덩달아 예술가 양아버지도 한 명 더 생긴 셈이죠.

 

 

신펑샤는 서둘러 무릎을 꿇고 의붓아버지 치바이스에게 인사를 하며 이 난감한 해프닝은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더쉔이 떠난 후, 93살의 치바이스가 또 다시 사랑에 빠지니, 이번엔 22살의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아, 첩을 얻기도 전에 치바이스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치바이스와 후바오주는 함게 묻히게 되었지만, 후난 샹탄에 있는 본처의 무덤은 외롭게 홀로 쓸쓸하게 남았습니다.

 

 

 

치바이스와 샤원주

 

 

치바이스 노인이 미녀를 좋아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알지만, 치바이스를 등에 업고 무명의 여자들도 그를 모시고 성장하며 유명해졌습니다.

 

 

천춘쥔이라는 이름의 본처도 13세 때 치바이스의 집에 시집오게 되었지만, 그녀는 '민며느리' 신분이었다고 합니다.

 

 

그해 치바이스가 12살이었을 당시 집에 들어온 민며느리의 집안 형편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겨우 13세였던 천춘쥔은 이미 집안일을 훌륭하게 처리하는 일꾼이 되어 식구들이 모두 그녀가 집에 들어온 것을 기뻐했다고 하네요.

 

 

어릴 적 치바이스도 그녀가 매우 좋다고 생각하였고, 그녀를 보면 마음이 흐뭇해졌지만, 이런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의 치바이스 노인이 신펑샤를 보면서 어쩌면 젊은 시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치바이스는 어릴 적 스승을 따라 손재주를 익혔고, 19세에 출사(出师)하였습니다. 출사는 중대사였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은 축하를 위해 손님들을 모시고 연회를 열었고,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천춘쥔은 비록 후바오주같은 현명함은 없었지만, 집안에 땔감이 부족할 때 임신한 몸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 솔가지를 베어오는 등 유능하고 어진 아내였습니다.

 

 

치바이스와 천춘쥔의 결혼 생활에서 궂은 일은 그녀의 일이었고, 치바이스는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름에 천춘쥔이 그늘진 포도나무 아래에서 실을 잣고, 치바이스는 포도나무 아래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요, 그때는 베짜는 소리가 요란하게 느껴졌지만, 이 소리는 이제 더이상 들을 수 없는 것이 되었죠.

 

 

말년에 그는 <포도가하설왕사(葡萄架下说往事)>라는 한 편의 시를 쓰며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시로 남겼다고 합니다.

 

 

치바이스와 천춘쥔, 다섯 아이들

 

후바오주의 현명함은 치바이스 한 명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천춘쥔의 현명함은 치바이스 일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민국 초년에 고향에 병란이 터지자, 치바이스는 무서워하며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북쪽의 베이징으로 가서 정착하며 피난하였고, 부모를 후난에 남겨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천춘쥔은 치바이스를 위해 고향에 남아 시부모와 아들 딸들을 보살폈습니다.

 

 

천춘쥔은 치바이스에게 "나는 여자이니 시골에 남아도 괜찮다. 당신이 베이징에서 먹고 살 자리를 잡으면 내가 베이징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수시로 만날 수 있을 거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함께 있을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남편이 잘 지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 있을 남편에게 "당신 혼자 있어서 불편할테니, 첩을 한명 두기를 권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천춘쥔이 아니었다면 후바오주가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애석하게도 평생을 바쳤지만,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지 못하였습니다.

 

 

 

치바이스와 자녀들

 

 

천춘쥔은 혼자서 그와 온 집을 떠받쳤고, 치바이스는 늘 그녀에게 미안하고 감사했습니다.

 

 

치바이스가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천춘쥔은 다섯 자녀들을 데리고 그를 보러 갔는데요, 치바이스는 그때 돌에 "칠삼노부팔천리(七三老妇八千里)"를 새겨 기념하였습니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것은, 일생동안 열심히 일했던 천춘쥔이 남편이 없는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치바이스는 그 사실을 편지로 알고 한없이 비통해하다가, 나중에 <제진부인문(祭陈夫人文)>을 지어 68년간 함께 부부로 지냈던 그녀를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했습니다.

 

치바이스와 저우 총리

 

 

민며느리 천춘쥔부터 시작하여, 첩 후바오주, 샤원주, 우더쉔, 그리고 93세에 장가가려고 했던 22살 아가씨까지.

 

 

치바이스는 평생 아름다움을 감상하였고, 미인들도 치바이스의 재능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치바이스의 일생은 확실히 진정한 풍류고, 풍류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 중에서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꼽아보자면, 아마도 천춘쥔과 후바오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239760601229872181%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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