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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국가 유공자에서 수감자가 되었던 우파셴(吴法宪)의 인생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신중국 공군 역사에서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이 있다는데요, 한 사람은 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우야러우(刘亚楼), 또 다른 한 사람은 두번째 공군사령(第二任空军司令) 우파셴(吴法宪)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격동의 전쟁 시대에 신중국 공군사업에 커다란 기여를 해 55년에 임관 당시 중장 직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들은 자신의 인생 전반을 전쟁터에 헌납했다가, 인생의 후반에 퇴출당해 17년간 옥살이를 하였고, 출소한 후에는 자신의 장남도 몰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했다고 하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는 왜 국가 유공자에서 수감자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출소 후 그의 노후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오늘은 이러한 내용을 소개한 기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파셴은 장시성 융펑(江西永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피끓는 수많은 젊은 청년들처럼 1930년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15세의 나이에 현지 지주의 핍박에 시달리며, "토호들을 타도하고, 땅을 공평하게 나누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고향에서 공농홍군(工农红军)에 지원했습니다.
나중에 고향을 떠난 우파셴은 국군잉 집안의 물건을 다 약탈하고 집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아버지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분노한 우파셴은 이러한 반혁명분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더욱 큰 일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들을 도와 밭일을 한 경험이 있던 덕분에 그는 손발이 부지런했고 고된 일도 참고 견디는 성질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총명하고 기억력도 좋아 그는 5년간 아버지의 후원 하에 공부를 하기도 하였고, 용감하게 당의 부름을 받들어 홍군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조직의 청년 주요 인물이 되어 간사와 청년 과장을 거치며 군 청년들에게 정치 선전을 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후 우파셴은 그가 몸담았던 부대를 개편하여 당시 홍 1군단을 지휘하던 린(林) 총재의 휘하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파셴은 경위통신련(警卫通信连)의 지도원으로 린 총장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고, 린 총장의 눈에 들었습니다. 이후 우파셴은 홍군 군대에서 각지를 다니며 싸웠고 반토벌 투쟁과 홍군 장정에 다섯 차례 참가하였습니다. 뤄딩챠오(泸定桥)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서 우파셴은 직접 부대를 이끌고 나루터로 가서 정탐하였습니다.
총알 파편에 손가락 2개가 부러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사다리를 기어 올라갔습니다. 이와같은 그의 용감한 행동에 대해 당 조직은 그를 대대적으로 찬양하였고, 홍군이 샨베이(陕北)에 도착하여 장정의 승리를 거두자, 젊고 유능했던 우파셴은 당시 최정예 22연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때가 그는 21세에 불과하였습니다.
항일전쟁 기간동안 685연대 정위를 지낸 우파셴은 양더즈(杨德志)와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의 인솔로 658연대는 쑤루(苏鲁) 변경으로 내려왔는데, 나중에 이곳은 쑤루 지대(苏鲁支队)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우파셴은 이 지대(支队)의 사령관이었던 펑밍즈(彭明治)와 호흡을 잘 맞추어 민심을 얻었고,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 합류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결국 1만여 명이 모였는데, 이미 이것은 1개 사단의 규모와 맞먹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우파셴은 펑밍즈와 함께 부대를 지휘하며 현지에서 일본군과 게릴라전을 펼치며 적의 침공을 물리쳤고, 불과 5일 만에 700여 명이나 되는 위조 일본군을 소탕하는 등 한동안 적이 패퇴하게 만들어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파셴은 해방전쟁 때 동북쪽으로 건너가 다시 린 총통의 휘하에 배치되어 리우젼(刘震)과 제2종대를 결성하여 종대정위(纵队政委)를 맡았습니다.
우파셴이 이끄는 2종대에서 잇따라 사평보위 전투(四平保卫战), 삼하강남, 추동공세, 요심, 평진(四平保卫战、三下江南、秋冬攻势以及辽沈、平津) 등의 전투에 참전하였습니다. 그의 부대는 최초의 선양 진격팀이자 당시 린 총재 아래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했던 부대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공을 세워 우파셴은 린 총장의 중용을 받을 정도로 승진이 빨랐습니다. 그는 이를 존중하고 감사해하며 이후 수십 년간 린 총재의 말을 듣고 훗날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는 복선을 깔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중국 출범 이후에는 그동안 공군의 힘이 약했던 점을 감안하여 당에서는 현대화된 공군을 조직할 계획이었습니다. 우파셴은 린 총재의 추천으로 공군 제1부정위 겸 정치부 주임이 되었는데, 이것은 공군사령관 리우야러우(刘亚楼)의 아래였습니다.
그와 리우야러우의 공동 관리 아래, 신중국 공군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한때 군 입대자가 7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중국의 공군력은 세계 3위에 오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1955년 임관식에 이어 중장 직함을 부여받은 우파셴은 공군 정위로서 공군 지휘권을 리우야러우와 함께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65년 리우야러우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정치적 친구로서 우파셴은 매우 괴로워했습니다. 린 총장은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마오 주석에게 추천하여 우파셴을 리우야러우의 후임으로 선임하도록 천거하였고, 그는 두번째 공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파셴에게 "내 마음 속에서 이 자리는 네 것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몇 차례, 우파셴은 지위로 인한 충격을 받게 되었고, 린 총장의 보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파셴에게 더욱 황송한 마음을 갖게 만들었고, 린 총장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져서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중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챙기기 시작하였는데요, 군에서 3년도 못채우고, 심지어 당에 입당하지도 않았던 린리궈(林立果)를 공군사령부 사무실 비서로 앉혀 놓고,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빠르게 실권을 장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파셴은 흑백을 뒤바꿔 동료와 상관을 모함하였습니다. 저우 총리(周总理)가 전화를 걸어서 우파셴에게 뤄뤼칭(罗瑞卿)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하였지만, 우파셴은 오히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하자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파셴의 여러가지 행위들은 마오 주석에 의해 발각되었고, 마오 주석은 그에게 매섭게 비평을 하면서도, 그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한 통의 반성문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우파셴은 마지못해 머리를 숙이고 반성문을 썼습니다. 그러나 반성문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과실을 벗어나도록 썼습니다. 아무리 마오 주석이 재차 비평을 해도, 우파셴은 여전히 조금도 잘못을 고치려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71년, 반혁명세력의 음모가 저지되었고, 우파셴은 1973년에 격리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앙에서 퇴출되어 당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었고, 뒤이어 1981년 징역 17년에 정치 권리 박탈 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우파셴은 죄를 인정하는 태도가 좋았고, 심문에서도 협조하여 범행 일체를 자백하였습니다. 감옥에서 반성을 하면서 그는 마음을 다스리고 잘못을 뉘우치며 솔직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옥중에서도 그는 몸을 단련하고, 책을 많이 읽으며 생각을 개진하였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수장을 불렀으며, 들어오면 반드시 보고를 외쳤고, 재판에서도 문답에 반드시 대답하는 등 죄를 인정하는 자세와 잘못을 뉘우치는 태도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981년 8월, 당 조직에서 그의 과거 혁혁한 전공과 그의 고령을 참작하여 그가 보석받아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소식을 들은 우파셴은 감격스럽고 막막하여 며칠 동안 잠을 설치다가, 아내와 아들이 그를 데리러 왔을때, 아들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큰아들은 머리가 희끗해지고, 더욱 여윈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우파셴은 시대의 죄인이지만, 또한 혁명의 영웅으로, 신중국에 기여하였는데요, 국가에서는 그를 잊지 않고 인민 대중들도 그를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파셴이 출소하자 당 조직에서는 그의 일가를 지난(济南)으로 보내 독채의 작은 건물에 머물게 하며 월별로 수당을 지급하였고, 병간호를 위해 홍기차(红旗车)도 배치해주었다고 합니다.
우파셴은 2004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내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우파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자녀들은 장서 융펑의 고향에 그를 안장하였습니다. 우파셴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부하 전우들과 후손들, 그리고 현지 인민 군중들이 천명 가까이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우파셴은 고향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반혁명분자들을 벌하기 위해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반혁명분자들은 이미 처벌을 받았지만, 오히려 우파셴은 자신이 권력 앞에서 한 걸음씩 잘못된 길로 나아갈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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