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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 개국 초대 베이징시 당위원회 서기였던 펑젼(彭真)의 인생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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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 개국 초대 베이징시 당위원회 서기였던 펑젼(彭真)의 인생스토리

hanyuku 2021. 6. 22.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49년 1월, 중국 톈진의 국민당 수비군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섬멸되면서 베이핑(北平,베이징의 옛날 이름)은 순식간에 기댈 곳이 없어졌고, 성 안의 국민당 수비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국민당 화북 토벌 총사령부 총사령관은 푸쭤이(傅作义)파와 해방군 대표 린뱌오, 뤄룽환, 녜룽젼(林彪、罗荣桓、聂荣臻)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쌍방은 베이핑을 평화적으로 해방한다는 것으로 최종 확정지었으며, 그리하여 이 천년고도는 전쟁의 피해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베이핑을 도읍으로 정한 후, 동시에 베이핑을 베이징으로 바꾸면서 펑젼(彭真)은 베이징 시 당위원회 서기(北京市委书记)를 맡아 개국 초대 베이징 시위 서기가 되었습니다.

 

 

소년 펑젼, 정의를 바로잡다

 

 

펑젼(彭真)은 1902년 10월 12일에 산시성 취워현 허우마진 뎨샹촌(山西省曲沃县侯马镇垤上村)의 한 토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래 이름은 푸마오공(傅懋恭)이었으나, 1937년 봄에 처음으로 옌안(延安)에 도착한 후 펑젼으로 이름을 개명하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펑젼의 아버지 푸웨이샨(傅维山)은 집이 가난하여 오랫동안 지주의 머슴살이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렸습니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푸웨이샨은 열심히 일하며 틈틈이 공부도 하여 동네의 명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푸웨이샨은 산둥성의 피난민이었던 웨이구이즈(魏桂枝)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을 낳았고, 바로 이 아이가 훗날 위대한 사람이 된 펑젼이었습니다.

 

 

 

펑젼

 

 

펑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는데요, 4~5세 때 아버지가 그에게 책을 읽어주며 글을 가르쳐주었는데, 한 달여 만에 백여 개의 글자를 알게 되어 부모를 크게 기쁘게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가난한 집의 아이는 일찍 철이 들어 집안을 맡게 된다"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요, 펑젼은 일곱 살 때 할머니, 엄마를 따라 목화로 방직을 하는 방법을 배웠고, 아홉 살 때는 어른들처럼 저녁 식사를 마치고나서 방직 기계 옆에 앉아 열심히 직물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은 매일 밤 한 근의 면화를 방직할 수 있었는데, 어린 펑젼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반 근이나 방직할 수 있었으며, 또한 자주 자기가 맡은 임무를 초과 완수하곤 했습니다.

 

 

펑젼이 점차 나이가 들자, 그는 아버지를 도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아버지를 따라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고, 정원에 물을 주고 김매기를 하고, 틈 나는 대로 큰 바구니를 메고 다니며 땔감을 주웠습니다. 펑젼은 어린 시절부터 삶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가난한 집안의 생활은 봉건 지주 계급의 억압 아래서 생존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펑젼은 일과 공부를 똑같이 열심히 병행하였고, 부모가 어떤 일거리를 그에게 주든간에 제때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펑젼은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고, 특히 책에 실린 지식에 대한 열망도 커졌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훌륭해지자 기쁨에 겨워 그의 아버지 푸웨이샨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아이를 위해 <삼자경(三字经)>을 한권 빌려다 주었고, 매일마다 계획대로 책을 가르치면서 붓 한 자루, 먹 하나를 사서 펑젼에게 직접 글씨를 가르쳤습니다. 한 달도 안 되어 펑젼은 삼자경을 줄줄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백가성(百家姓)>, <천자문(千字文)> 등의 책을 빌려다주었고, 그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열심히 일하면서도 책을 금세 다 뗄 수 있었습니다.

 

 

 

 

펑젼 부부

 

 

푸웨이샨은 그렇게나 빠르게 지식을 흡수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아들의 지식욕구를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고, 그리하여 온 가족이 절약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펑젼을 14세 때 번촌(本村)의 서당에 보냈습니다. 서당에서 다른 아이들이 삼자경을 읽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시경>, <역경>, <동래박의>(《诗经》、《易经》、《东莱博议》)를 배웠습니다. 펑젼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4대 명작 중 하나인 <수호전(水浒传)>으로, "횡포하고 사나운 사람을 제거하고 선량한 백성을 평안하게 하며,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을 돕는다"는 정신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고, 소년 시절의 그의 가슴이 뛰게 만들었으며 반항의식에 생기게 하였습니다.

 

 

서당에서 펑젼은 감히 선생님과 논쟁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는데요, 언젠가 그는 <수호전>에서 양산호한(梁山好汉)의 행위를 놓고 선생님과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펑젼은 그때 "가난한 사람들이 양산호한을 본보기로 하여 모두들 일어나 반란을 일으켜야 합니다! 나는 아직 어리지만, 어른이 되면 반드시 불공평함을 척결하고 정의를 수호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말에 선생님도 아연실색하면서도 동시에 펑젼을 괄목상대 하였습니다. 이미 점차 서당에서도 지식욕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취워 2고(曲沃二高)로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신식 학당 교육을 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어렵사리 나라를 구하는 길로 뛰어들다

 

 

1911년 10월 10일, 획기적인 우창 봉기가 일어나 중국에 신해혁명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청나라의 전제체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한 전국적인 혁명은 중국 인민들에게 정치적, 사상적으로 과소평가할 수 없는 해방작용을 가져왔습니다. 이어 혁명 선열들은 8년간의 고난 끝에 1919년 5월 4일, 철저한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5.4 애국운동을 전개하여 새로운 정당을 탄생시켰습니다.

 

 

 

신해혁명

 

 

 

1922년, 중국 사회가 변혁의 기로에 섰을 때, 20세의 펑젼은 타이위안산시성립 제1중학교(太原山西省立第一中学)에 입학했습니다. 여기에 신문화운동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펑젼의 사상은 해방되었고, 그는 진보조직 청년학회에 참가하여 수많은 진보 서적을 읽고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여 구국구민의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던 펑젼은 1923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흡수되어 같은 해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습니다.

 

 

공산당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교적 약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갓 태어난 새싹처럼 활기가 넘쳤습니다. 펑젼은 공산당에 입당한 뒤, 당의 지도력을 적극 받아들여 산시성 공산당 조직을 보완, 발전시켜 산시성 공산당 조직의 창절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펑젼은 1925년 당 조직의 부름에 부응하기 위해 산시성 노동자 연합회와 타이위안 총 노조를 설립하여 노동자 군중과 각계 민중을 동원하여 옌시샨 가옥 평가세 강제 징수(阎锡山强征房屋估价税)에 반대하는 투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해 5월 30일, 중국의 국내외를 충격에 빠뜨린 5.30참사가 터지면서 온 나라가 술렁이게 되었습니다. 산시성에 있던 펑젼은 제국주의 열강의 움직임에 격분하여 산시성의 각계 인사들을 동원하여 상하이 노동자, 학생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성원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뒤 이어 스쟈좡(石家庄)에서 정태철도총노동조합을 부활시키고, 정태철도총노동조합 비서를 역임하였습니다. 1927년, 장제스 등 국민당 반동파는 '412쿠데타'를 일으켜 장렬한 대혁명에 실패했습니다. 이때 펑젼은 텐진의 당서기 대리 서기 및 서기를 맡아 북방 지역에서 공산당의 주요 지도자들 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펑젼(우측)

 

 

1929년 6월, 펑젼 등은 변절자의 배반으로 텐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텐진 경찰서장이던 쩡옌이(曾延毅)는 '푸마오공(펑젼의 이전 이름)'이라는 이름을 보고 "이 사람은 산시성 옌다오쥔이 체포하겠다고 했던 빨갱이의 우두머리임에 틀림없다"며 반색했습니다. 그러나 적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체포된 동지들을 조직하여 반역자, 적들과 싸웠고, 결국 그를 감옥에 가둬야했습니다. 옥중에서도 펑젼은 비밀리에 당 지부를 조직하여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원래 펑젼은 징역 9년을 선고받았으나, 1931년 장제스가 중원대전을 승릴 이끌자 안정을 위해 정치범 특별사면을 결정했을때, 펑젼의 형기도 6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펑젼은 1935년 만기 출소하여 공산당 텐진의 당서기를 맡았으며, 텐진의 혁명 활동을 계속 이끌었습니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펑젼은 당의 주선으로 북방지역의 항일투쟁을 조직하였고, 조직을 이끌며 군중들을 동원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해 항일 근거지를 창설하였습니다.

 

 

베이징에 17년간 주재하며, 직급이 정국급(正国级)에 이르르다

 

 

1948년 11월 초, 인민 해방 동북 전장에서의 첫 번재 중요한 결전이었던 랴오선 전투(辽沈战役)가 승리한 후 동북 전 지역이 해방되었습니다. 11월 29일 중국 인민 해방군 동북야전군과 화북군구 부대를 진두지휘한 린뱌오, 뤄룽환, 녜룽전, 리우아뤄(林彪、罗荣桓、聂荣臻、刘亚楼)는 베이핑의 푸쭤이(傅作义)를 빨리 투항시키기 위해 핑진 전투(平津战役)를 벌였습니다. 핑진 전투 초기에 대내외 정세에 밀려 푸쭤이는 봉기를 주저하였고, 결국 중공에 대항해 텐진 전투를 먼저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펑젼, 주더, 저우 총리(彭真与朱德、周总理)

 

 

 

1949년 1월, 텐진 전투가 끝난 뒤, 중국인민해방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텐진을 무사히 점력하여 베이핑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습니다. 텐진 해방 후 베이핑을 외롭게 홀로 지켰던 국민당의 푸쭤이가 이끄는 25만 명은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천년 고도인 베이핑을 지키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평화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90만 명의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성 아래에 포위하고 있다는 충격에 베이핑 지하당과 다른 인사들은 고심 끝에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는데 동의하였습니다.

 

 

실제로 1948년 12월 중순, 당 중앙은 펑젼과 예젠잉(叶剑英)을 베이핑에 파견하는 것을 결정하였는데요, 펑젼은 시위 서기(市委书记), 예젠잉은 베이핑 시위 제1 부서기 및 군관회 주임 겸 베이핑 시장으로 부임하여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1949년 1월 27일, 펑젼과 예젠잉은 이화원 뒷산에서 베이핑 인수를 위한 전체 간부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펑젼은 성실하게 마오 주석의 "진경간고(进京赶考)" 정신을 관철시켰고, 전체 간부들에게 간곡하고도 의미심장하게 "베이핑은 좋은 곳이고, 인수도 잘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베이핑을 접수해야지, 베이핑이 우리를 인수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며, 우리는 리쯔청(李自成)을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월 31일, 해방군은 모원화(莫文骅)의 지휘 하에 잇달아 베이핑에 입성하여 베이핑을 접수하였고, 베이핑 평화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2월 3일, 해방군의 입성식은 펑젼, 예젠잉의 주도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6월이 되자, 베이핑 인수가 거의 마무리되어 사회 질서가 정상화 궤도에 오르게 되었고, 9월 21일에는 마오 주석이 주재하는 신정협제1차 전체회의(新政协第一次全体会议)를 열기로 하였고, 도읍의 이름을 베이핑에서 베이징으로 바꾸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신중국 성립 이후, 펑젼은 베이징 시위 서기(北京市委书记)를 맡았으며, 그리하여 개국 후 첫 베이징 시위 서기가 되었습니다.

 

 

 

펑젼과 마오 주석

 

 

펑젼이 베이징 시위 서기로 부임한 초기, 이곳은 전후의 혼란이 가득하였습니다. 미국과 국민당의 특무기관들은 여전히 물밑에서 활약하며 정보를 염탐하고 막 출범한 신중국을 파괴하는데 애를 썼습니다. 잠복해 있는 적들에 대해 펑젼은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는데 '선무후문, 선상후하(先武后文,先上后下)'의 방침을 내세우며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를 먼저 잡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도면밀한 감시 아래에서, 펑젼은 미국 간첩과 일본 간첩 등을 잡아들였고, 신중국성립 1주년 기념 축제도 원활하게 치뤄냈습니다.

 

 

1950년 10월이 되자, 베이징 시위는 펑젼의 지도 하에, 대규모 적 특수분자 진압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하여 1950년 10월 부터 1952년까지 3560여 명을 체포하여 940여 명을 대대적으로 처형하여 큰 위협을 제거하였습니다. 펑젼 서기는 1949년 10월 신중국 수립 이후 1966년 5월 베이징 시위 서기에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 베이징에 주재하였습니다. 이후 펑젼 전 서기는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역임하며 정국급까지 위치가 올랐습니다.

 

 

그리고 1997년 4월 26일 베이징에서 9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507219562037955290%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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