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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 동안 모은 수천 억 위안의 가치를 지닌 소장품들을 국가에 무상으로 기증한 장백구(张伯驹)의 인생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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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 동안 모은 수천 억 위안의 가치를 지닌 소장품들을 국가에 무상으로 기증한 장백구(张伯驹)의 인생스토리

hanyuku 2021. 6. 24.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이 물건들은 꼭 나한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기부할 수 있다. 만약 보물이 영원히 우리의 땅에 보존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 말은 중화민국의 사공자(四公子)들 중 한 명인 장백구(张伯驹)가 지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는 재주가 넘치고 서화를 소장하는 것을 즐겼는데요, <평복첩(平复帖)> 한 점을 보호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장백구는 건국 초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화를 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하였는데, 그 가치가 총 1136억 위안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 말년에는 장백구가 병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당시 그의 가족들이 노인인 그를 위해 병실을 바꿔줄 수 있느냐고 묻자, 병원 측에서는 그의 등급(级别)이 부족하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장백구는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장백구는 어떤 사람인가

 

 

1898년, 장백구는 허난 샹청(河南项城)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의 이름은 장금방(张锦芳)입니다. 나중에 그는 아버지에 의해 큰아버지 장진방(张镇方)의 뒤를 잇도록 보내졌습니다.

 

 

청나라 말기, 장진방은 총독(总督)에 직속되었다가, 민국 시기에 다시 허난 도독(都督)으로 전임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장백구의 사촌은 '대총통' 원세개(袁世凯)였습니다.

 

 

즉, 장백구의 출신은 전반적으로 '고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장백구는 매우 총명했는데요, 일곱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9살이 되자 시를 쓸 정도로 똑똑했던 꼬마 신동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는 외국인이 설립한 학교인 텐진 신서학원(天津新书学院)과 허난 육군소학교에 차례로 입학하여 각 방면에서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민국 시기의 쟁쟁한 인물이 되기 위한 초석을 닦았습니다.

 

 

당시 세간에 떠돌던 "민국사공자(民国四公子)"들 중에 한 명이 바로 장백구였다고 합니다.

 

 

 

 

 

장백구를 제외한 "민국사공자"의 나머지 3명은 바로 장학량, 부동, 원극문(张学良,溥侗,袁克文)이라고 하는데요, 이 세 사람의 배경도 모두 매우 엄청나다고 합니다.

 

 

장학량은 동북 군벌인 장작림(张作霖)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재주가 넘쳤고, "소사(少帅)"라는 별명으로 칭송받았다고 합니다.

 

 

원극문은 원세개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재주가 넘쳤고, 곤곡(昆曲) 방면에 조예가 높았다고 합니다. 성장한 후, 그는 텐진에서 청방(青帮)을 창립하여, "남쪽에는 황금영, 두월생, 북쪽에는 진북의 방주(津北帮主) 원한운(袁寒云,원극문)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부동은 내력이 훨씬 대단한데요, 그는 애신각라(爱新觉罗)의 후손으로 그의 부친은 애신각라 재치(爱新觉罗·载治)로 청나라 말기의 중신 중 한 명(진국장군, 진국공 镇国将军、辅国公)이었습니다.

 

 

상술한 소개에서 알 수 있듯이 장백구는 이들 세 명과 함께 이름을 날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장백구는 고귀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그의 조상의 그늘이 아닌 그의 실력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장백구는 문화인으로서 서예에 비교적 높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유명인의 서화를 연구하고 소장하는 것이었는데, 거의 홀린 듯이 취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장백구와 그의 서화

 

 

장진방(장백구의 아버지)는 일찍이 염업은행(盐业银行) 회장 출신으로, 성년이 된 장백구는 염업은행의 사장과 상무이사를 지냈습니다.

 

 

재벌 2세로서 높은 자리에 있기까지 하니, 장백구가 가진 돈은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한 폭의 서화를 위해 일확천금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다년간의 수집 활동으로 인해, 장백구가 모은 서화 컬렉션은 거의 수천억 위안에 달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는 오늘날에도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러 서화들 가운데 가장 의미가 있고, 깊은 이야기가 있는 서화가 바로 <평복첩>이라고 합니다. 당시 장백구는 이 한 폭의 서첩을 얻기 위해 고심하였고, 이를 보호하려다가 황천길로 가버릴 뻔 했다고 합니다.

 

 

 

 

 

 

<평복첩>은 진나라 대문호 육기(晋代大文豪陆机)의 작품으로 "중화제일첩(中华第一帖)"이라고도 칭송받는데, 훗날 이 서첩은 부유(溥儒)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전쟁 당시, 부유가 경제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이 작품을 팔아야만 했고, 이로써 <평복첩>은 장백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항일전쟁 시기에 일본인들은 장백구가 <평복첩>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에게 20만 위안을 주고 사겠다고 제시하였지만, 장백구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그를 잡아들여서 감옥에서 온갖 괴롭힘을 자행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백구는 이 서첩을 일본인들에게 넘기길 원치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일본인들은 그를 구금할 수 밖에 없었고, 몇 개월이 지난 후 그는 풀려났습니다.

 

 

일찍이 일본인들은 중국에서도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들을 탈취해갔다고 하는데요,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문화재들이 많아 이러한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이렇게 문물을 지키기 위해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장백구의 정신은 정말 탄복할 만합니다.

 

 

 

 

 

 

특히 일본인을 상대로는 모진 고문에도 절대로 <평복첩>을 내놓지 않았지만, 장백구는 국가를 위해서는 그렇게 소중하게 지켜온 것을 그것도 공짜로 바쳤다고 합니다.

 

 

말년의 처량한 생활

 

 

건국 이후, 국가가 문화적인 방면으로도 관리에 엄청난 힘을 싣는 가운데, 장백구는 소장하고 있던 문화재 대부분을 국가에 넘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화 유물들에는 <평복첩>, <유춘도>, <증장호호시>, <도복찬>(《平复帖》、《游春图》、《赠张好好诗》、《道服赞》) 등이 있는데, 모두 손꼽히는 세계적인 대작들로 총 가치는 1136억 위안에 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고궁박물관의 절반"을 기증했다는 말도 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국가는 20만 위안을 장백구에게 보상금으로 주었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장백구는 그저 이것들이 국내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심없는 훌륭한 인물의 말년의 생활은 처량했다고 합니다.

 

 

1960~70년대 중국에서는 "특수한 시기"가 도래하였고, 장백구 역시도 박해를 받아 경제 수준과 생활 형편에 중대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가산을 팔아 생계를 꾸려야만 했다고 합니다.

 

 

1980년에 이르러서야, 장백구의 문제는 비로소 해결되고 평범해질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이때의 그는 이미 인생의 말년기였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장백구는 여러 문화 조직의 사장, 회장을 역임하며 중국의 문화 사업에서 빛을 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2년 어느날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파티에 참석했던 장백구는 갑자기 심한 감기에 걸렸고, 가족들은 급히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일반 병실의 환경이 시끄러워서인지, 가족들은 그를 위해 좋은 병실로 바꿔주려고 했지만, 병원 측에서는 "그의 등급이 부족하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고궁박물관 측에서 나서자 비로소 이러한 요구가 허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장백구는 자신의 반평생 동안 소중하게 모은 보물과 소장품들을 박물관에 바쳤는데, 그가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1982년 2월 26일, 장백구는 병원에서 별세했다고 합니다.

 

 

 

 

 

장백구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비록 구사회에서 태어나 구사회에서 자랐지만, 신중국에 대한 감정에는 어떠한 사심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행위로 보건대, 그의 등급이 모자라다면 아마도 그보다 자격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꼬집었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10872709065741971735%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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