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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젠성의 한 스님이 숨겨왔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49년 중국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푸젠성 융타이현 가이양향(永泰县盖洋乡)에서 동북쪽으로 14km떨어진 츠링촌(赤岭村)의 안팅사(闇亭寺)에 전해졌을 때, 사찰에 입사한 지 14년 된 칭양법사(磬扬法师)의 마음은 착잡해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 마오쩌둥이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당신은 좋은 동지입니다. 당은 당신의 말을 다 들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도 잘 하고 있을테니, 부담갖지 말고 잘 단련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 그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시간이 그를 다시 혹독하고 잊을 수 없었던 그 시절로 끌어당긴 듯 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전우들을 만나고 싶었고, 그들과 함께 무릎을 맞대고 지난 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오늘날 주석이 된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지만, 글을 써내려가다가 붓을 멈추고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미 출가하여 당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기 때문에, 혁명이 끝난 뒤 당 중앙(党中央)을 찾아가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부끄러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옛 친구들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고, 스스로 무어라 변론하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1999년 5월 14일, 90세의 고령의 나이로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입적한 칭양법사가 사망한 후 나흘 뒤, 중흥국위 통전부(中共兴国委统战部)에서 조의문 팩스가 날아왔고, 조문이 나온 직후 수천 명이 장례식장을 찾아 추모하는 등, 현지 정협 및 당정(政协、党政)의 고위 인사들이 그가 떠나는 마지막 길을 동행하였습니다.
왜 일개 사찰의 스님이 이렇게 커다란 영향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흥국위 통전부에서 보낸 조의문 팩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팩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양따오밍(杨道明) 법사의 입적을 알게 되어 우리는 매우 놀라고 매우 비통하게 생각합니다. 양 옹은 젊은 시절 혁명에 참가하였고, 싱궈현 소비에트(兴国县苏维埃)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장시성(江西省) 소비에트 내무장관, 중앙 내무부 부부장, 민간성(闽赣省) 소비에트 주석을 역임하였고, 소비에트 지구 싱궈 모범현(苏区兴国模范县)을 창건하는 등 제1등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그의 서거에 대하여 우리는 삼가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칭양 법사의 세속의 이름은 원래 양따오밍으로, 그가 사망한 후 이같은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젊은 시절, 혁명가였고, 홍군시절 민간성 소비에트 정부 주석을 지냈으며, 소비에트 정권 수립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중국에서 큰 인물이 왜 푸젠성 융타이현(福建省永泰县)의 사찰로 들어가 중이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실의 이야기라고 하니 더욱 궁금해지네요.
1. 무한의 잠재력을 가지고 젊은 시절 종군하다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장군현(将军县)인 싱궈(兴国)는 제2차 국내혁명전쟁 때 무려 23만여 명이 군에 입대한 지역이라고 합니다. 1909년에 장시성 싱궈현 아이첸촌(江西省兴国县隘前村)에서 태어난 양따오밍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평범함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양따오밍의 집은 평범한 농민 가정이었지만, 그의 아버지와 형이 당시 장렬했던 대혁명에 투신하였고, 그들의 귀동냥을 듣고 자라며 양따오밍의 사상도 크게 진보하였다고 합니다.
1930년 2월, 고향인 싱궈현에서 마오쩌둥과 주더(朱德)의 홍일군이 결의대회를 열자 양따오밍은 21세의 나이로 뛰어들어 아버지와 형의 뒤를 따라 본격적인 혁명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현지인인 데다, 혁명에 대한 열의가 강해 그해 9월 그는 허시향(荷溪乡)의 재무위원으로 임명되어 물자 공수와 군 후방을 지원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국민당은 한창이던 소비에트 지역에 대한 1차 토벌에 나섰고, 강력한 군대가 둘러싸고 공격하여, 싱궈현은 국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공산당이 일시적으로 싱궈현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고, 이전에 외지로 도망갔던 지주세력들도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을 공격했던 공산당에 복수하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혁명에 뛰어들었던 양따오밍 일가가 이들의 중요한 박해 목표들 중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지주의 압박으로 양따오밍의 아버지는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큰형은 국민당에 의해 살해되고, 둘째 형은 강제로 출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형수들도, 그리고 자신의 임신한 아내까지도 모두 팔려나갔습니다.
당시 양따오밍은 부대의 식량이 부족하여 식량을 조달하던 중이었는데, 그도 하마터면 지주의 무장공세에 걸릴 뻔 했지만, 제때 퇴각하여 다행히도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양따오밍 일가의 혁명 기여에 대해 조직에서도 이를 잊지 않았고, 2차 반토벌 승리 후 융펑구 단구위 조직 부장(永丰区团区委组织部长)이던 양따오밍은 그해 4월 입당을 허가받았습니다.
홍군의 별들의 불이 점차 맹렬하게 퍼져나갈 무렵, 그는 싱궈현 소비에트 주석을 거쳐, 장시성 내무부 부부장에 올랐고, 홍군의 고위층에 오른 셈이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마오쩌둥, 주더 등의 중앙 지도 간부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았습니다.
다만 1934년 8월, 당시 중앙 소비에트 구역은 왕밍(王明)의 좌편향 모험주의로 인해 5차 반토벌에서 홍군 작전에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요동치는 국면을 맞은 상황 하에서, 인재들은 중앙 소비에트 구역이 장악하고 있는 가장 큰 자산으로 떠올랐고, 그 중에서도 재치와 배짱을 갖춘 양따오밍을 민간성 소비에트 정부 주석으로 발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양따오밍은 25세에 불과하였는데, 위험천만한 운명에 처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임명에 대해 처음에는 자신이 아직 연륜도 부족하고, 투쟁 경험도 풍부하지 않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때 마오쩌둥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하였으며, 조직이 그를 믿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 희생당한 양따오밍
이후, 중앙 소비에트 지방에서 대군을 조직하여 대장정을 시작하였고, 민간성의 지도자로서 양따오밍은 자신의 부대와 함께 근거지에 남아 유격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적의 포위망 속에서 헤엄치며 격전을 치루었는데, 이것은 사실 대장정보다 훨씬 더 고난의 정도가 심했습니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밥도 먹을 수 없고, 물도 마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 환경도 열악하고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적을 만나 포위되기라도 하면 토벌될 위험에 직면하기도 하였지요.
처음에, 양따오밍의 부대에는 12, 17, 18, 19연대 등 4개의 연대 병력이 있었지만, 닝화(宁化)에서 철수할 대 매복하고 있던 적에게 당하여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서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양따오밍을 비롯한 지도부는 부대를 계속 치고 철수하다가, 샤시촌(沙溪村)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불행히도 다시 한번 적에게 기습을 당했고, 19, 19연대는 곧바로 해체되어 양따오밍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머지 군단은 고난과 엄청난 투쟁 끝에 탈출하여 민간 신편 1군단(闽赣新编第一军团)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당시의 여건은 너무나도 험난했었고, 국민당의 강력한 군대에 의해 계속 토벌당하면서 어떤 동지들은 혁명의 앞날을 비관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국민당에게 투항할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민간 군구 정치부 주임(闽赣军区政治部主任)인 펑후(彭祜)와 사령관인 쑹칭취안(宋清泉)이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부대를 변절하고 국민당에게 투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양따오밍은 그들과 같은 부대에 있었기 때문에 쑹칭취안 등이 크게 동요하지 않게 할 수 있었지만, 경각심이 강했던 양따오밍은 그들이 그런 생각을 먹자 재빨리 당시 성 당서기 겸 군단정위였던 종쉰런(钟循仁)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상의한 뒤, 곧바로 쑹칭취안 등을 회의에 불러들여 혁명에 대한 믿음을 다시 갖출 수 있도록 비판하였고 결정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1935년 5월 8일 아침, 양따오밍이 일찍 일어나보니 부대 전체가 이동했음을 알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전날 밤에 쑹칭취안 등이 변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둠을 틈타 부대를 데리고 산을 내려와 국민당 보안단에 투항하였던 것입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양따오밍은 나머지 무장 세력을 통합하여 와이자성(外加省) 위원회의 작업단 60여 명을 긴급 이동시켰습니다. 하지만, 출발 직후 얼마 되지 않아 지형을 잘 아는 펑후가 보안단을 이끌고 살벌하게 치고 올라왔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국민당 보안단은 신속하게 성 위원회의 기관을 찾았고, 성 위원회 기관은 행정부처라 전투력이 없어 교전 중 20여 명이 전사하였고 10여 명이 붙잡히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펑후는 해방후 잠입하였던 조직이 적발되자 사건의 경위를 밝히며 "양따오밍 소비에트 주석을 사살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변절자 펑후는 법에 의해 처벌 되었지만, 그의 진술에 근거하여 이전 국민당 신문의 선전과 함께 공산당 조직에서는 양따오밍이 이미 희생되었다고 생각하였고, 나중에 싱궈현 혁명열사 기념비를 세울 때, 그의 이름도 새겼습니다.
3. 난세에 중이 되기도 쉽지 않다
1966년 가을, 양따오밍의 딸 양더쟈오(杨德招)는 생산부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일어났을 대 멀리서 자신의 친정집 대부(大伯)가 그녀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중에 여러번 넘어질 뻔한 것을 보며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를 본 양더쟈오의 마음은 불안하였고, 친정에 또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걱정스러워서 막 물어보기 위해 입을 떼려고 했지만,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대부는 급하게 "더쟈오야, 네 아버지 안 죽었단다. 편지가 왔어." 라고 말했습니다.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꺼낸 한 통의 편지를 건넨 후, 더쟈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아버지는 지금 푸젠성의 융타이현에 있는 한 절에서 중이 되어 계신단다."
아버지가 혁명을 했기 때문에, 태어나서 아버지를 본 적이 없는 양더쟈오는 대부의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싱궈현의 영열비문에 그의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며 이미 돌아가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비록 당시 펑후가 고의로 거짓말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양따오밍은 당시 희생되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원래 당시 국민당 보안단이 성 위원회 기관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양따오밍을 비롯한 9명은 숲 속에 숨어있다가 무사히 빠져 나갔고, 밤이 되자 9명은 푸젠성 융타이현 쪽으로 재빨리 포위를 뚫고 나갔습니다.
다음날 그들은 쑹커우 위후(嵩口玉湖) 지역까지 도망쳤는데, 포위망을 뚫는 과정에서 두 명이 부상을 당해 고향 집에 남아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7명 중 5명은 장서이황(江西宜黄)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2명은 양따오밍과 종쉰런 두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싱궈 출신 사람들이었지만, 목표가 너무 컸고, 비교적 고위 지도자였기 때문에 집으로는 무작정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퉁안진 시안촌(同安镇西安村)에 도착했는데, 그때 길가에 절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 사람은 이때 잠시 의논한 끝에 우선 절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기회가 올때를 기다려 다시 조직을 찾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절의 주지였던 먀오즈 법사(妙智法师)는 이들이 외지인임을 알아보았지만, 신분이 간단하지 않고, 폐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안팅사(暗亭寺)의 숙소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안팅사의 주지였던 핀샹법사(品香法师)는 그들을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화를 불러올 수도 있었고, 그러면 절 전체가 망가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들은 마음이 여렸고, 그 두 사람의 호언 장담에 못이겨 결국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두 달 뒤, 절에서 시련을 겪으며 주지는 그들에게 삭발하고 출가하는 것을 받아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불문에 잠입하게 되었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경불을 올리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절에 들어온 본래의 뜻은 여전히 잠시 위험을 피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많은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이 된 뒤에도 말을 아끼고 다른 중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이들을 받아준 핀샹 법사도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핀샹 법사의 사람됨됨이를 보고 자신들의 신분을 알렸습니다.
1939년, 안팅사 주지로 추대되다.
비록 주지가 되었지만, 양따오밍은 혁명을 염두에 두고, 조직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혁명 인생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혁명 동지를 만나지 못했고, 유일한 기회였던 것도 1943년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1943년 7월, 안팅사에 지하당원 2명이 내려와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었는데, 양따오밍은 이들이 중공 지하당원임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양따오밍은 당시 병으로 인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안전을 위해 자신의 신분을 바로 밝히지 않고 자신의 몸이 나을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생각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두 동지는 임무를 가지고 급히 떠나버렸고, 양따오밍은 유일한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4. 몸은 중이되, 마음은 여전히 국가를 위하다
더욱 더 엉망이었던 것은, 그가 조직과 연줄이 닿을 수 없었던 것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 했던 것입니다.
1943년 가을, 당시 한 도적떼가 전란을 틈타 안팅사로 달려와 금품을 빼앗아갔는데, 돈 될만한 것은 모두 빼앗아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지였던 양따오밍을 산으로 끌고가서 삼나무에 매달아놓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당시 도적들은 그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는데, 세 발을 연달아 쏘았고, 이 중 양따오밍의 왼손에 총을 맞게 되어 중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도 나중에 그는 즉시 이빨로 밧줄을 끊고 치료를 위해 사찰로 돌아왔지만, 사찰에서는 감염을 면할 수 있었을 뿐 탄두를 빼내지 못하여 암울했다고 합니다.
또 한번은 1945년 7월, 융타이현에서 한 보안대 분대장을 사살한 범인을 잡기 위해 보안대가 현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한 일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개명한 데다가 현지에서 신망이 있었던 덕분에 끌려가 1년 간 옥살이를 한 뒤, 불교계 유명 인사들의 보궐선거를 거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수감생활로 심각한 폐질환을 앓게 된 그는 종종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할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적극적으로 약초를 이용하여 치료하였고, 몸이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양따오밍의 마음 속에는 시종일관 혁명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 조국을 위해 공헌하는 꿈을 꾸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반드시 좋은 신체 자질을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그 기회를 기다리지 못했고, 공산당이 다시 찾아왔을 대는 이미 현성이 해방된 후였습니다.
이 시기의 양따오밍은 마오쩌둥 주석에게 편지 한 통을 쓰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 생각은 있지만 그것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민간성 주석을 맡았을 대 실패를 당했었고, 이런 업보는 자신이 짊어져야 하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보니, 그는 당 조직에 자신의 경력을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때 그는 자신이 출가한 사람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중이 되어도 자신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중에 1966년이 되었을 때, 양따오밍은 집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 이유는 특수한 시기에 그의 사찰이 충격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걱정하며 역시 "정체 불명의 이유"로 자신의 신원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강요당해서 집으로 연락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 31년간 숨겨왔던 그의 신분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딸 양더쟈오가 부친의 편지를 받고서야 혁명열사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된 싱궈현 측은 양따오밍의 신원이 확실시 되자 장시성, 푸젠성을 비롯한 일부 지도자들이 돌아올 것을 권유하며 다시 세상에 몇몇 직책들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여기에는 그가 이미 중으로 사는데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스스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그의 임종 유언에서 더욱 잘 나타나있다고 합니다.
1998년 5월, 89세인 그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었고, 딸과 사위가 찾아오자 몇 년 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한 마디를 했습니다. "난 공산당에 미안하다, 나에게 맡겨주었던 민간성 소비에트를 더욱 장대하게 발전할 수 없을 것 같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 그때의 잘못은 그 사람 개인과는 상관이 없지만, 양따오밍은 죽을 때까지 '잘못'에 대한 집착이 강하였던 것입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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