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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가수 장위셩(张雨生)의 31년 삶이 남긴 아쉬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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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가수 장위셩(张雨生)의 31년 삶이 남긴 아쉬움

hanyuku 2021. 5. 28.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80년대, 중국에서는 진기하고 재치있는 연예계의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장궈룽, 리종셩, 뤄다요우, 왕페이(张国荣、李宗盛、罗大佑、王菲) 등 가요계의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고, <당애이성왕사>, <선가>, <개도도마> (《当爱已成往事》、《船歌》、《开到荼靡》)등의 명곡들도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도 여러 해 전의 음악들을 들으며, 그 때를 추억할 수 있고, 그러한 오랜 세월의 흐름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듣는 이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인재 배출의 황금 시대에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빛을 발했던 장위셩(张雨生)은 음악의 마술사로 불리며, 그의 노래는 도처에 퍼져 흘렀고, 그가 만든 <아적미래불시몽(我的未来不是梦), <대해(大海)> 등의 노래는 지금까지도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하늘도 그러한 음악적 재능을 시기하였는지, 그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시절

 

 

1966년, 장위셩이 대만에서 태어났을때만 해도, 이 아이가 앞으로 가요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가 태어난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를 "위셩(雨生)"이라 이름지어주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마을에서 영화를 자주 봤었는데, 아버지가 영화를 좋아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늘 어린 장위셩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5위안 짜리 영화 티켓은 그의 좋은 기억들을 담고 있었으며, 영화의 씨앗도 장위셩의 가슴 속에 깊게 박히게 되었습니다.

 

 

아홉 살 때, 온 가족이 이사를 온 장위셩은 비행기라는 거대한 물건을 처음 봤지만, 공중으로 날아오른 그는 전혀 겁내지 않았고, 비행기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높게 날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위셩은 학창 시절 교과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지루한 독서보다는 오히려 음악에 심취해 음악을 듣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음악적 재능은 그때 조용히 싹을 틔웠는지도 모릅니다.

 

 

이 밖에도 그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소설 쓰기를 시도해왔고, 장위셩은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꾸준히 기록해왔습니다.

 

 

 

 

 

가요계에 진출하다

 

 

유명해진 이후, 장위셩의 황금같은 목소리는 많은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고, 그의 독특한 목소리에 팬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대학 입학 전까지는 공개 석상에서 노래를 부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장위셩이 노래를 하게 된 계기는 사실 비극적인 계기로부터 시작했습니다. 75년 7월, 한여름이라 쨍한 햇볕에 먹구름 한 점 찾아보지 못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온 가족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는데, 장위셩은 학교에 있어서 아버지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장위셩에게는 어릴 적부터 오빠를 많이 의지했던 여동생인 장위샨(张玉仙)이 있었는데, 오빠가 집을 떠나 학교에 가 있게 되자, 가족이 모일 시간이 적어졌고, 장위샨이 오빠를 매우 그리워하자, 아버지는 장위셩에게 시간이 나면 집에 자주 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전화를 끊고 난 후, 장위셩은 여동생 장위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만약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았더라면, 그는 다 팽개치고 집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신나던 가족 여행은 비극으로 변했습니다. 장위샨이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졌고,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흐르는 물에 떠내려갔던 것입니다. 가족들은 장위샨이 난관을 극복해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위셩은 매우 비통해했습니다. 여동생은 자신처럼 음악을 사랑했고, 재치도 넘쳤고, 나중에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던 아이였습니다. 만약 그녀가 살아남아 가수가 되었더라면 중화권에서 또 한 명의 빛나는 스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동생의 죽음으로 성숙해진 장위셩은 동생의 소원을 그가 직접 이루어주기로 하였습니다.

 

 

 

 

 

 

장위셩의 수많은 노래에는 여동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음표에 담아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여동생이 늘 떠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미래는 꿈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어, 나는 매 분마다 열심히 살아" 1988년, 맑은 목소리와 함께 <아적미래부시몽(我的未来不是梦)>은 전국을 뒤흔들었습니다. 가사는 진지하고도,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갈망이 가득하였고, 피가 끓는 순수함 덕분에 지금도 중국에서는 졸업 시즌마다 이 익숙한 선율이 고등학교에서 심심찮게 울려퍼진다고 합니다.

 

 

장위셩의 대표작인 <대해(大海)>도 여동생에 대한 기념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노래에서 그의 목소리는 외롭고도 진정성이 담겨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수많은 상을 휩쓸었습니다.

 

 

 

 

 

 

하늘이 재능을 시기하다

 

 

1997년, 누구도 이런 훌륭한 가수가 갑자기 추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평범했던 그날 밤, 장위셩은 막 하루의 일을 마치고 검은색 오픈카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시곗바늘은 이미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강도 높은 리허설로 날이 저물자 피곤에 지친 장위셩은 차량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는 매우 심각해서, 장위셩의 머리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미약한 맥박만 남아있는 채로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그는 중태에 빠졌고, 결국 합병성 폐렴으로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장위셩의 시신은 "우생원(雨生园)"에 안장되었고, 이제 팬들은 더 이상 그의 다음 앨범을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해>의 동명 앨범 재킷이 마지막 앨범이 아닐 것이라고 약속할 정도로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최고봉을 달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의 약속은 기약없는 것이 되어버렸지요.

 

 

아들과 딸이 연이어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의 어머니에겐 파멸적인 충격이었습니다. 부모는 여동생 장위샨과 오빠 장위셩을 합장하였고, 우애좋던 두 남매는 이렇게나마 다시 상봉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장위셩의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자녀와 남편도 잃은 장위셩의 어머니는 혼자 남게 되었고, 집안은 더 이상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함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우생원"이 있는 이산 묘원(梨山墓园)으로 이주하여 차가운 묘비를 마주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족을 지켰습니다. 장위셩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로 연인을 잃은 그녀는 10년 동안이나 결혼하지 않고 그를 기린 후에야 다른 사람을 만나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것은 우연이 평생의 상처로 남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늘도 장위셩의 재능을 시기하여 젊은 그를 데려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그가 약속했던 앨범, 아직 쓰지 못한 노래에 대한 아쉬움은 더 이상 메울 기회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31년의 삶을 살다간 장위셩은 수많은 고전적인 작품들을 후세에 남겼고, 그의 노랫소리는 수록되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악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꿈이 아닌" 미래를 개척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493410086832177320%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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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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