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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오룽 죽음 이후 자허(嘉禾) 영화사를 견인한 사람은?

hanyuku 2021. 5. 27.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서 대략 1970년대 "샤오스(邵氏)"는 홍콩 영화계를 제패한 영화사였습니다. 그러나 샤오스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샤오이푸(邵逸夫)는 커다란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는데요, 제작 매니저인 저우원화이(邹文怀)와 의견이 맞지 않았고, 결국 저우원화이는 샤오스 영화사를 퇴사하고 나와 "자허(嘉禾)" 영화사를 차리게 됩니다.

 

 

<독비도왕(独臂刀王)>

 

 

샤오이푸가 더욱 화가 난 것은 바로 저우원화이가 혼자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독비도(独臂刀)>와 <독비도왕(独臂刀王)>를 가지고 나가서 '밀리언셀러'로 만들었고, 당시 인기있는 왕위(王羽)와 연출자 장처(张彻)까지 데리고 나갈 뻔 했지만, 다행히도 장처는 신중히 생각해보고 결국 샤오스 영화사에 남기로 했던 것이었습니다.

 

 

자허 영회사는 왕위가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에는 샤오스 영화사에 밀렸고, 앞서 나온 <천룡팔장(天龙八将)>, <귀노천(鬼怒川)> 등 여러 편의 영화가 샤오스에게 흥행에서 밀렸습니다. 왕위가 주연한 <독비권왕(独臂拳王)>은 100만 홍콩달러를 벌었지만, 같은 해 장처 감독, 장다웨이(姜大卫), 디룽(狄龙) 주연의 샤오스 영화 <신독비도(新独臂刀)>는 160만 홍콩 달러를 벌었습니다.

 

 

 

리샤오룽과 왕위

 

 

하지만, 자허 영화사에는 리샤오룽이 찾아왔기 때문에 1년이 되지 않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우원화가 '자허' 영화사를 창립했을 때, 리샤오룽은 할리우드에서 성장하고 있었지만,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한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리샤오룽의 이력이 언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홍콩으로 돌아와 발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리샤오룽이 홍콩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목표했던 것은 단연코 자본이 많은 샤오스 영화사였습니다. 그러나 샤오이푸는 리샤오룽에게 미온적인 태도로 계약 체결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편당 2000달러의 출연료만 약속하여 리샤오룽을 기분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자허는 틈만 나면 미국으로 사람을 보내 리샤오룽을 섭외하고 편당 7500달러의 출연료를 제시하며 성심을 다했고, 자허는 결국 리샤오룽을 휘하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대중들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자허에서 출품하고, 리샤오룽이 주연인 홍콩 영화 <당산대형(唐山大兄)>이 320만 홍콩 달러를 돌파하며 역대 흥행 기록을 세우자, 비록 역사는 짧지만 홍콩 영화계는 이제 빛나는 리샤오룽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지요. 이듬 해 <정무문(精武门)>과 <맹룡과강(猛龙过江)>이 나란히 영화사의 기록을 깼을때, 당시 샤오이푸는 아마 복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맹룡과강>

 

 

뜻밖이었던 것은, <용쟁호투(龙争虎斗)>가 개봉도 하기 전에, <사망유희(死亡游戏)>는 액션 씬만 몇 차례 찍었던 것에 불과했는데, 향년 32세의 리샤오룽이 여배우 딩페이(丁佩)의 집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을 뒤흔들었고, 자허 영화사의 버팀목이 쓰러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샤오스에는, 떠난 지 여러 해 된 감독 리한샹(李翰祥)이 귀환을 선언하였고, 장처, 추위안(楚原) 등은 물론, 당대 한창 나이였던 디룽, 장다웨이(狄龙、姜大卫) 등이 모두 일대 톱스타로 성장했습니다. 이에 비해 자허는 리샤오룽이 세상을 떠난 뒤, 무일푼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자허는 조급해하지 않았고, 1년 후 리샤오룽의 바통을 받아 홍콩 영화 역사에 등장한 또 다른 톱스타는 바로 쉬관원(许冠文)이었습니다.

 

 

<대군벌>에서의 쉬관원

 

 

 

쉬관원은 일찍이 방송국에서 사회자로 일하다가 샤오스 영화사의 리한샹 감독의 눈에 띄어 <대군벌>,<일락야>,<성색견마>(《大军阀》《一乐也》《声色犬马》) 등의 흥행 코미디에 출연하였고, 홍콩 영화계에서 최고의 코미디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훗날 저우싱츠와 마찬가지로 배우만 하는 게 달갑지 않았던 쉬관원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 <귀마쌍성(鬼马双星)>을 들고 샤오이푸를 찾아가 촬영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흥행시 일부 수익을 갖는걸로 자신의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쉬관원

 

 

샤오이푸는 이것을 듣자마자, 횡포한 성격이 다시 발동하여, 대본을 썩혔다며 쉬관원을 거절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쉬관원은 동생 쉬관졔(许冠杰)의 추천으로 자허 소속의 저우원화를 찾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귀마쌍성>이 개봉하였는데, 이 영화는 홍콩 영화사 최고치인 625만 홍콩 달러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후 쉬관원은 자작극인 <천재여백치>, <반근팔량>,<매신<반근팔량>,<매신계>,<마등보표> (《天才与白痴》《半斤八两》《卖身契》和《摩登保镖》) 네 편을 내놓으며 모두 연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고, 이 중 <반근팔량>과 <마등보표>는 모두 영화사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자허 영화사도 리샤오룽의 죽음 이후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반근팔량>

 

 

쉬관원이 자허의 성공에 큰 공을 세운 사이, 두 사람이 더 자허 영화사의 새로운 기둥으로 떠올랐는데요, 그 사람들은 바로 훙진바오(洪金宝)와 청룽(成龙)이라고 하네요.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10067504870601197419%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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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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