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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마지막 왕예(王爷) 다우티 마이허수티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최초의 중앙집권국가를 세우고, 최초의 황제가 되어 2천여년의 정치제도의 기본 구도를 마련하였는데, 사마천(司马迁)은 "법도를 확실히 하고, 율령을 정하는 모든 것들은 시황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진시황은 후대에 천고일제(千古一帝)라고 불렸습니다.
계급이 대립하는 것은 줄곧 인류 사회의 커다란 모순이었습니다. 봉건사회 시절, 국가의 상층부에 있던 귀족들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틀어쥐었다는 점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 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인상에 대해 오만하고, 고집이 센 등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귀족이라면, 평등사회에 대해 마음속에 반감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통치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마지막 "왕예(王爷, 봉건시대 왕 작위를 받은 사람에 대한 존칭)"는 호화로운 왕부에서 2014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고,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몸 가까이에 국기를 걸어놓았습니다. 매 왕조마다 개척자와 마지막 끝을 내는 왕들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6국을 통일한 것을 시작으로, 청대 마짐가 황제였던 푸이(溥仪)가 퇴위하기까지 무려 2000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494명의 황제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들 494명은 봉건왕조의 정통만 센 것이고, 농민이 자체적으로 세운 통치 지도자들은 포함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한 "토황제(土皇帝, 토호)"까지 포함하면 1000여 명의 황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변방에서 황제가 나았으니, 그렇다면 왕도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조정에는 왕이 다른 성으로 봉인된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쿠처왕(库车王)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쿠처왕은 '어뚜이(鄂对)'라는 이름으로, 아치무브크(阿奇木伯克)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서기 1755년, 건륭제가 이리(伊犁)를 평정하자, 어뚜이는 준가얼멍구(准噶尔蒙古)의 지배 억류에서 탈출해 청에 귀순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대, 소, 탁(大、小和卓)이 반란을 일으키자, 어뚜이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소탕하러 가서 허텐(和阗)을 지키고, 큰 공을 세우고, 베이러(贝勒, 청나라 귀족 세습작위)를 받았습니다. 청나라 1호 쿠처세습 회부의 친왕(库车世袭回部亲王)이 탄생한 것입니다. 어뚜이가 작위를 받은 지 200년, 신장 지역에서 11명의 쿠처왕이 나왔고, 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청나라 변방의 통치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쿠처왕인 다우티 마이허수티(达吾提·麦合苏提)가 가장 현대의 인물입니다.
그가 쿠처왕이라는 호를 받은 지 몇 년 만에 신중국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가 남긴 마지막 변방의 왕으로 당연히 관련 부처와 연락을 취해야 했습니다. 다우티는 신중국 출범 전 진보적 활동을 펼친 청년으로 건국 이후 최고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1949년 9월, 타오스유에(陶峙岳)와 바우어한(包尔汉) 통전봉기때 다우티는 망설임 없이 오성홍기를 은행 앞에 내걸어 이 청년이 국가에 한결같이 충성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장 지역에서 그는 은행장과 현 정부의 통역관으로 일하며, 인민들의 복지를 도모하였다고 합니다. 다우티의 전반생이 물길 따라 배를 타듯 평온하고 거침없었다면, 그의 후반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성난 파도가 해안을 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호화로운 왕부에 살면서도 왕예임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는 자신을 평범한 국민으로 간주하고 조국의 사업을 위해 분투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면하게 일을 진행하던 그는, 느닷없이 구정물을 뒤집어 쓰게 되었던 것이지요. 신중국 수립 전 국민정부가 신장과 다우티를 위문했던 것 때문에 일부 측근들은 그가 국민당과 밀접한 정보를 주고 받았다며 허위 사실을 퍼뜨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한 다우티는 징역 20년을 구형받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이 사건은 얼마 후 재심 되었고, 그의 복역 기간은 7년으로 단축되었습니다.
옥살이를 하면서 그는 건축 작업을 익혔고, 출소 후에는 농기계 수리에 일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조국의 번영을 염원하였는데요, 그래서 신분이 회복되자마자 다시 현 관리소로 달려갔습니다. 1980년대 초, 그는 쿠처현 정협 부주석으로 추대되어, 계속 이 현민들을 이끌고 집안을 일으켜 부유하게 하였고, 문명을 발전시키게 하였습니다.
여행업계의 발전을 위해 쿠처 왕부를 새로 수리하는 과정에서 다우티는 가장 아름다운 왕부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014년, 다우티는 쿠처에서 병환이 깊어졌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이 노인은 국기를 안고 손자를 불러 함께 국기 아래에서 사명을 낭독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정말 철석같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봉건 사회에서 귀족들은 모두 자신과 평민의 신분을 구분하려하며 사람을 깔보는 오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지만, 중국의 마지막 왕예인 다우티는 편안해보였습니다. 이는 물론 봉건사회의 멸망과 현대사회의 발전과도 무관치 않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왕예가 사랑받게 된 것은, 그가 수 십 년간 지칠 줄 모르고 밤낮으로 나라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복지와 이익을 도모하고, 죽을 때까지 국기를 품으며 후배를 가르치는 모습과 마음은 언제나 찬양받고 기억할만 한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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