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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실존했던 무림 고수들은 누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서 한번쯤 무림에 대한 꿈을 꿔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림이라 하면, 묘기같은 무용, 날쌘 몸놀림, 위세가 등등한 지위를 가진 이러한 무림의 고수를 꿈꾸지만, 이러한 것들은 김용, 구룡(金庸、古龙) 같은 소설가들이 지어낸 것일 뿐이지요. 실제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무술이며, 주먹과 팔 다리를 사용하는 쿵후입니다.
특히, 만청민국(晚清民国)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회 불안과 민족 자강에 대한 열띤 호소가 이어졌고, 점차 더욱 많은 사람들이 무술 훈련에 여념이 없었는데요, 당시 전국 각지에 명수들이 포진하여 다양한 문파를 형성하였고, "10대 무술 고수"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황비홍, 곽원갑(黄飞鸿、霍元甲)도 그들과 겨루어 1위를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 각각은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고수들의 절세의 기풍(绝世风采)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도(大刀)-왕오(王五)
왕오는 경사 무림(京师武林)의 이름난 협객으로, 본명은 왕정의(王正谊)입니다. 그는 훌륭한 칼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 됨됨이가 하나같이 의리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대도(大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오의 무술에 비해 사람들이 더욱 숭배했던 것은 바로 그가 정의를 위해 의협심을 발휘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구하는 호걸이었다는 점 입니다.
왕오는 유신 변법(维新变法)을 지지하며, 담사동(谭嗣同)과 함께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구국구민(救国救民)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담사동 등의 6군자가 살해되기 전, 그는 여러 중재를 통해 그들을 구하려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이 일은 왕오로 하여금 반제애국(反帝爱国)의 신념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습니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왕오는 군중들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양인을 몰아내고 정의를 수호하였으나, 이 일 때문에 그는 8개국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결국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곽원갑은 비보를 듣고 밤새 달려와 왕오의 마지막 가는길을 지켰다고 합니다.
팔괘장(八卦掌)-동해천(董海川)
이 사람의 이름은 아마 생소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독보적인 기술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명성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바로 동해천이 팔괘장을 만든 사람이라고 하는데, 팔괘연환장(八卦连环掌) 혹은 유신팔괘장(游身八卦掌)이라 불리며 널리 알려졌고, 이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오늘날에는 다섯개의 유파로 확대 발전되었습니다. 동해천은 청나라 역사에서 그다지 특별한 사적(事迹)을 남기진 않았지만, 그가 비적을 토벌하기를 좋아하여 십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늘상 직접 나섰다고 하니, 그 역시도 의협심이 가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해천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바로 그가 태극권 고수 양로선(杨露蝉)과 최고의 대결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이 무술 대결은 당초에 중국 수도권 내에서 이름이 자자했는데, 한 명의 태극권 고수와 한 명의 팔괘종사가 벌인 이 무술대결은 마치 유성이 달을 쫓는 것과 같이 매우 관상성(观赏性)이 강하여 교과서적인 비무(比武)였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정무회(精武会)-곽원갑(霍元甲)
곽원갑의 명성은 물론 두말하면 잔소리인데다, 무술세가(武术世家) 출신인 그가 만청말무단(满清末武坛)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가 고수 Pk를 매우 좋아하였고, 외국의 고수들과 싸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걸핏하면 사생결단을 맺는 등 홍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천진(天津)에 있던 시기, 곽원갑은 러시아의 장사를 무공으로 제치고, 이어 상해에 온 후에는 또 러시아의 장사와 일본의 장사에게 싸움을 걸었는데요, 먼저 자신을 천하무적이라고 밝히고 나자, 중화무술을 욕보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곽원갑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동적으로 그 두 장사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그들은 싸움을 앞두고 허겁지겁 도망쳤다고 합니다.
나중에, 일본 유도에도 도전했지만, 싸움에서 패한 이후, 음모에 희생되어 만성 기침을 앓던 곽원갑은 독약을 먹게 되었고, 이렇게 한 시대의 무림의 고수는 향년 4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홍권대사(洪拳大师)-황비홍(黄飞鸿)
역사상 황비홍은 확실히 실존한 인물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속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황비홍에 관한 영화만 해도 백 편은 넘는데, 그로 인해 황비홍이라는 이 세 글자의 이름은 이미 중국 무술의 최고 대명사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중 대부분은 허구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황비홍은 영남(岭南) 무술계의 일대종사(一代宗师)로서, 그가 창조하거나 개량한 무술에는 쌍비사, 자모쌍도, 오랑팔괘봉, 나한포, 무영각, 철선권, 단쌍호조, 공자복호권, 호학쌍형권, 오형권, 나한금전표, 사상표용봉 (双飞铊、子母双刀、五郎八卦棍、 罗汉袍、无影脚、铁线拳、单双虎爪、工字伏虎拳、虎鹤双形拳、五形拳、罗汉金钱镖、四象标龙棍)등이 있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입니다. 이 밖에도 황비홍은 의술이 뛰어났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낸다는 한의사였다고 합니다.
탄퇴명가(弹腿名家)-왕자평(王子平)
왕자평은 허베이 창저우(河北沧州)성 출신인데요, 큰 바위를 들어올려 "천근왕(千斤王)"으로 불릴 만큼 다리 힘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6로탄퇴, 10로탄퇴, 12로탄퇴(六路弹腿、十路弹腿、十二路弹腿)는 모두 왕자평의 손을 거쳐 개선된 것입니다. 문득, 영화 <쿵후(功夫)>의 캐릭터가 생각이 나는데요, 주성치는 역시 우리를 속이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이러한 쿵후가 있었던 것이지요!
왕자평의 가장 강력했던 비무는 바로 "만국경무장"에서 물리친 것입니다. 당시 과체중인 외국 장사 몇 명이 상해에 링을 만들어 놓고, 어느 한 명이라도 쓰러뜨리면 상금으로 1천개의 대양(大洋, 옛날에 유통되던 은화)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으스댔습니다. 왕자평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스스로 응전했는데, 상대방이 쓰러져 도망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왕자평은 평생 동안 많은 영예를 누렸습니다. 1928년, 중앙국술관에서 소림문문장(少林门门长)으로 초빙되었었고, 신중국 출범 이후에는 중국 무술협회 부주석과 중화전국체육총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습니다. 그만큼 왕자평은 진정한 쿵후 실력을 지녔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추앙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형의팔괘(形意八卦)-한모협(韩慕侠)
한모협은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이지만, 그는 한 마음으로 무술을 추구하여 일찍이 대사 장점괴(大师张占魁)를 따라 무술을 익혔습니다. 다년간의 꾸준한 연습 끝에 곽원갑과 함께 이름난 고수가 되었습니다. 이후 황포군관학교의 국술교관으로 초빙되었고 주로 형의팔괘권술을 전수하였습니다. 그동안 그는 숱한 외국인들의 도전을 받았는데, 외국인 고수들을 압도하였습니다. 한모협은 "대도단(大刀队)"에 참여하여, 적에 맞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땀과 열정을 쏟았다고도 합니다.
주은래(周恩来)는 천진 남개(天津南开) 중학교 재학 시절, 한모협을 따라 권법을 익히는 등, 두 사람은 무(武)로써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후 한모협은 "나는 그에게 강한 신체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가르쳐주었는데, 그는 내게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남북대협(南北大侠)- 두심무(杜心武)
두심무는 무림으로 도망쳐 무공이 뛰어나고, 위세를 널리 떨치는 무림 고수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운귀천 일대에서 호위들을 데리고 다니며 "남북대협"으로 불렸는데요, 그는 나중에 일본으로 가 발전하였고, 그곳에서 송교인(宋教仁)을 알게 되어 중국 혁명 동맹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손중산의 신변 안전을 보호하는 경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두심무는 일대종사로서, 일본에서의 기간동안 이미 비퇴절기(飞腿绝技)로 스모 고수들을 싸워 이겼습니다.
연자(燕子)-이삼(李三)
"연자이삼"이라는 칭호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 적이 있는 것인데요, 비교적 유명한 것은 허베이 바오딩의 이경화(河北保定的李景华), 그리고 산둥성 위청시의 이성무(山东禹城的李圣武)가 유명하지만, 이 칭호를 가장 먼저 사용했던 사람은 바로 허베이 창저우의 이운룡(河北沧州的李云龙)입니다. 당연히 "제비"라는 별칭은 몸놀림이 제비처럼 가벼워서 붙이는 것인데요, 이러한 별칭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경공(轻功)이 뛰어나고, 동작이 몹시 날쌘 사람들이 기본입니다.
그러나, 날쌘 비적(飞贼)이 만청민국의 10대 고수 반열에 든다는 것은, 그가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데요, 우리는 그가 행한 행적을 미루어보아 적어도 그가 악을 응징하는 의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는 권선징악을 행하고,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둘째로, 그의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점에서 연자 이삼은 무림 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반보붕권(半步崩拳)-곽운심(郭云深)
곽운심은 일찍이 형의권(形意拳)으로 시작하였으나, 나중에 그는 홀로 반보붕권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정말 대단하며, 말 그대로 반걸음 안에 있는 사람을 때려 부술 수 있는 권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곽운심에게는 "반보붕권으로 천하를 제패하다"라는 우렁찬 별칭이 생겨났습니다.
곽운심이 다섯 장사로 하여금 각목으로 자신의 복부를 받치도록 했는데, 그가 힘주어 허리춤을 돌리자 다섯 장수들이 속절없이 날아갔다고 합니다. 이 반보(半步)의 고수는 정말로 살인을 저질렀는데, 그것은 악질 토호를 실수로 때려 죽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투옥되었는데요, 이러한 일로 오히려 그의 의협심이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무술계에는 곽운심의 저서 <능설형의권경(能说形意拳经)>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형의권을 지도하는 고전이라고 합니다.
무성(武圣)-손록당(孙禄堂)
역사상 "무성"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관우가 유일했는데, 근대에는 이 별칭이 손록당에게도 해당됩니다. 위의 9명 모두 탄탄한 무림의 고수들이지만, 그에 비하면 손록당은 한 수 위이며, 명실상부한 10대 고수들 중 1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성 외에도 그에게는 '무신, 만능수, 천하제일수(武神、万能手、天下第一手)' 등 수많은 칭호가 따라붙었습니다.
손록당은 평생 동안의 전적이 더할나위 없이 뛰어나며, 수많은 싸움에서 이겼고, 러시아의 격투 고수를 무찔렀으며, 60세 때에는 일본의 사무라이를 물리쳤고, 70세의 고령에도 1대 5로, 5명의 일본 고수들을 한번에 격파하였습니다. 손록당은 무술계의 지도자로 여겨졌으며, 당대 사람들에게 "일생을 통틀어, 무공이 신명(神明)하여 최고봉에 이르는 자는 손록당이 유일하다"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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