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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2,000여 년 전의 고분에서 발견된 풀리지 않는 비밀들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고, 절대 뒤로 되돌릴 수 없다는 불가역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 않으며, 특히 긴 시간이 흐르고 나면 과거에 일어난 일은 되풀이하기 어렵게 되지요. 고대에 대한 탐구는 책의 단편적인 부분이나 일부 유물에 그치고, 이러한 자료들은 고분 발굴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고분 1기가 성공적으로 열리면서 역사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당혹감을 주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이것이 바로 인류가 끊임없이 탐지하고 발전하는 근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국은 고대 오랜 기간동안 도굴범들이 기승을 부려 많은 문화재의 묘혈이 파괴되었지만, 정부가 즉시 발견하여 응급처치를 하고 역사의 신비를 살려낸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 중 가장 신비로운 것은 아마도 장사(长沙)의 마왕퇴(马王堆汉墓)일 것입니다. 2,000여 년 만에 다시 나타난 이 무덤은 "세계 제일 요묘(世界第一妖墓)"라고 불릴 정도로 인류에게 충격을 주었는데요, 왜냐하면 이 묘가 발굴되었을때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1971년 말의 평범한 어느 날, 366전비의원(战备医院)을 개조하기 위해 현장 근로자들이 계속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름모를 기체가 출현하였습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다른 근로자가 담배를 피우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고, 전설의 "도깨비불(鬼火)"이 나타났습니다.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 뿔뿔이 도망쳤다고 합니다. 마왕퇴는 이런 가운데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 불"과 폭발음은 바로 마왕퇴의 자기보호장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현지 박물관장이 관련 자료를 조사해보았고, 이 결과 이 곳에 역사가 유구한 고분군(墓葬群)이 있을 것이라 확정하였고, 심도있게 고찰한 결과 그것은 2천여 년 전의 서한(西汉)시대에 유래한 것으로, 이 무덤의 주인은 바로 유방을 도와 천하를 빼앗는데 성공하도록 도왔던 유명한 도인(道人) 리창(利仓)이었습니다.
마왕퇴는 총 세 사람이 묻혀있는 무덤이었는데, 1번부터 3번까지 총 3개의 묘갱이 있어서 각각 신추부인(辛追夫人), 리창 본인, 그리고 리창의 아들의 무덤이었습니다. 이 3개의 묘갱에서 약 3천여 점의 진귀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한 가지 분명히 해야할 점은 이것들이 이미 부분적으로 파괴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고, 시대적인 특수 원인으로 일손과 노동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2,000여 년 이상 잘 보존되어 있던 마왕퇴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퇴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는 도저히 복원해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제일요묘"라는 별칭이 붙고 이 것이 점점 퍼져나간 것이죠. 하지만, 마왕퇴는 2016년 세계 10대 고분으로서 희귀한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마왕퇴에서 출토된 3,000여 점의 유물에는 모두 곳곳에 신비한 요소들이 드러나있습니다. 견직물, 백서(帛书), 백화(帛画), 한약재(中草药), 심지어는 음식물까지도 보존 수단과 그 생산 수단이 감탄을 자아내는데, 사람들은 그 속에서 2,000여 년 전 인류가 먹었던 연근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여전히 뚜렷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근조각보다 더욱 전설적인 이 세 점의 유물들이 마왕퇴에 신비한 색채를 더욱 풍부하게 덧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신추부인의 시신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하냐하면, 2,000여 년이 지난 후 신추부인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머리카락과 지문이 여전히 뚜렷하고, 연조직(软组织)이 탄력이 있었으며, 심지어 손발의 관절까지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추부인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부액을 투여했더니 모세혈관이 선명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2,000여 년 된 시신이 처음 출토됐을 대만해도 죽은지 2주 된 시신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경이롭기 그지없었습니다.
물론 전문가들은 이것을 두고 신추부인의 시신은 모두 9층으로 보호되어 있었으며, 가장 바깥쪽은 흡수성과 흡습성이 뛰어나 수분과 산소가 유입되는 것을 막았고, 가장 바깥쪽에 2겹의 층이 존재했기 때문에 신추부인의 유해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방수와 방습의 두 가지 재료를 만들어 내기 힘든데, 2천여 년 전 한나라에서는 어떻게 그런 것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 다음으로 신비한 것은, 소사 단의(素纱襌衣)일 것 입니다. 이것은 국가 1급 문화재인데, 옛날 옷 한 벌이 뭐가 놀라울까 싶지만, 겉보기에는 별로 놀라운 구석이 없어보여도 그 무게는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 잘 보존된 소사 단의의 무게가 49g에 불과해서, 옷 한 벌을 성냥갑 하나에 보관할 수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기술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방직 공법을 쓴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물론, 그 후 어떤 전문가는 삼면잠사(三眠蚕蚕丝)라는 특수한 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지만, 삼면잠(三眠蚕)은 일찍이 소멸되었고, 오늘날에는 사면잠(四眠蚕)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삼면잠이 재배된 뒤에도, 소매와 깃을 없앤 뒤에야 겨우 이 홑옷의 무게에 접근할 수 있어서 지금의 기술로는 이 옷을 복제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천하 "제일 요묘"에서 출토된 많은 국보들은 현대의 과학 기술로도 복제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마짐가으로는 신비한 <덕도경(德道经)> 한 권입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아마 <도덕경(道德经)>은 들어보았지만, <덕도경>은 무엇인가 궁금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덕도경>은 <도덕경>의 원본인데, 혹자는 <덕도경>이 진정한 <도덕경>이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후세에 전해지는 <도덕경>은 모두 제왕들의 수정을 거쳐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편리한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왕을 보좌하던 리창이 비록 도인이긴 하지만, 왜 이런 책을 보유하고 있었을까요? 그 전에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겪었고, 그 시절에는 문화유통이 지금처럼 광범위하고 편리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희귀한 이 보물 3점이 출토되고, 이 "제일 요묘"는 신비한 베일에 둘러싸여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장사의 마왕퇴는 겹겹의 베일에 싸여 있어 사람들이 한 겹씩 비밀을 풀어내고 역사의 진실을 찾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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