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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武则天)의 비화

hanyuku 2020. 11. 23.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무측천(武则天)은 중국 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14세에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나이에 입궁하여 당태종 이세민(唐太宗李世民)의 여인이 되었고, 이후 그녀의 인생은 겉과 속이 다른 간사한 여인으로의 성장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입궁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이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기며 부자(父子) 두 황제의 여자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 바보같이 순수하던 어린 소녀가 권세를 위해 자신의 자식을 직접 죽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총애를 받지 못하는 무재인(武才人)

 

 

무측천이 입궁하면서부터 태종 이세민이 승하할 때까지 12년 동안 무측천은 임신하지 않았고, 신분도 줄곧 재인(才人)이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료에는 무재인과 태종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은데, 한 가지 구체적인 사건은 무측천 말년에 자신이 태종을 도와 말을 길들일 때의 이야기를 회고한 기록입니다.

 

 

당시 누군가가 좋은 말 한 마리를 진상하고, 태종이 이 말을 "사자총(狮子骢)"이라고 하명하였는데, 이 말은 성질이 너무 강해서 아무도 길들일 수 없었습니다.

곁에서 시중을 드는 무재인이 그녀에게는 방법이 있다며 스스로를 자천했습니다.

태종은 "말을 이렇게 많이 조련해본 고수도 안 되는데, 비록 그녀의 성이 무(武)씨라고는 하지만 어린 여자가 무슨 방법이 있겠어?"라며 궁금해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무재인의 대답은 태종을 놀라게 했습니다.

 

 

쇠채찍으로 먼저 때리고, 불목하면 또 쇠몽둥이로 머리를 때리고, 또 불복하면 직접 비수로 목을 벤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종은 비록 그 자리에서는 무재인에게 패기가 있다고 칭찬했지만, 필시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존경하되 가까지 하지 않는 것으로 결심이 섰을 것입니다.

 

 

무재인은 12년간 임신하지 않았다.

 

 

황제의 곁에서 충분히 오락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태종의 시야에 무재인이 어느 정도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황제의 곁에서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재인은 왜 임신하지 않았을까요?

 

 

 

 

 

대담하게 추측컨대, 이것은 무재인의 문제가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치(李治) 이후 그녀는 여러 차례 아이를 임신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재인의 문제가 아니고, 태종 이세민의 경우를 봐야 할 것입니다.

이세민은 총 14명의 아들과 20여 명의 딸이 있습니다.

이 중 막내 아들은 정관 8년(贞观八年, 634년)에 태어났고, 막내 딸도 정관 8년에 태어났는데, 그 후로는 자손이 더 늘지 않았습니다.

 

 

 

 

 

 

무측천이 입궁한 시기는 정관 11년(贞观十一年, 기원전 637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측천이 이세민의 여인으로 12년 동안 있으면서 임신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문제가 아니고 태종 이세민의 문제인 것이지요.

비록 무측천이 입궁한 그 해에 태종 이세민은 37세에 한창의 나이이고, 무측천은 14세였는데 당시로서는 정상적인 결혼 적령기였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태종 이세민이 정관 8년이후로 자손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치(李治)

 

 

태종 이세민의 여인이라는 신분으로, 무측천은 어떻게 태자 이치와 관계를 맺었을까요?

이세민이 중병을 앓던 시절, 무측천은 이치와 점차 사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세민이 승하한 후, 자녀가 없고 총애를 받지 못한 궁녀들과 후궁들은 전례대로 사찰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야 했습니다. 원래 이치와 무측천의 이야기는 그가 황제가 되고, 그녀는 비구니가 되면서 여기에서 끝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성격이 어리석고 나약해 보이는 이치는 열렬한 사랑에 푹 빠져 그의 부황의 무재인을 잊지 못했고, 그녀를 그리워하면서도 여전히 애정이 남아있었습니다.

마침 이치의 황후 왕씨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서 총애를 잃었는데, 그녀는 무측천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두고자 했습니다.

왕씨 왕후의 입장에서 볼때, 그녀가 무측천에게 은혜를 베풀고, 무측천이 나중에 총애를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감사할 것이고, 무측천이 황제의 총애를 받더라도 황후 자리를 두고 자신과의 싸움에 나설 자격이 없는 신분이기 때문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왕씨 왕후는 무측천을 과소평가했고, 이치를 과소평가했던 것이죠.

 

 

 

 

 

 

무측천은 왕씨 황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독한 존재였고, 이치 역시 무측천에게 왕씨 황후의 상상을 뛰어넘는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의 부황의 여인이었던 여자임에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필경 부황은 제왕 이원길의 왕후(齐王李元吉的王后)를 강제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한 것이죠. 이씨 부자의 몸에 흐르는 일부분의 피는 호인(胡人, 오랑캐)의 것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측천은 다시 입궁한 후, 그녀가 받는 총애는 아주 빠르게 왕씨 황후를 능가하였고, 황후의 숙적인 소비(萧妃)를 뛰어넘었습니다.

1년도 안 되어 무측천은 이치의 딸 하나를 낳았는데, 게다가 손수 이 딸을 목 졸라 죽이고 그 증거를 어린 공주를 찾아온 왕씨 황후에게 뒤집어 씌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직접 보지 않았다면, 누가 친모가 갓 낳은 딸을 직접 목 졸라 죽였을 것이라고 믿겠습니까?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hare?context=%7B%22nid%22%3A%22news_8685591785457311965%22%2C%22ssid%22%3A%22%22%7D&page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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