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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탄 청방(青帮) 3대 형님들의 3인3색 이야기 본문

Chinese Culture

상하이탄 청방(青帮) 3대 형님들의 3인3색 이야기

hanyuku 2020. 11. 20.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서는 최근 <팔백(八佰)>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이 영화속에서 따오즈(刀子)가 목숨을 걸고 총챠오(冲桥)를 향해 전화선을 보내는 장면은 많은 관중을 감동시켰습니다. 영화 속에서 따오즈의 사람들에는 강호의 패거리 일원이 있었는데, 진짜 역사 속에서는 항일 전선에 투신했던 강호의 아들 딸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일부 패륜아들은 매국노가 되기도 했습니다.

 

 

 

 

 

상하이탄(上海滩)에서 당시는 청방(青帮)의 천하였습니다. 청방에는 황금영(黄金荣), 두월생(杜月笙), 장소림(张啸林) 등 3대 형님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3명은 민간 결사회 출신이었지만, 각자 모두 적지 않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요, 옛날 상해 사회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전민항전(全民抗战)의 시기에 이들 세 사람은 무엇을 했을까요?

 

 

 

 



1. 황금영: 악비(岳飞)는 못 되어도 진쾌(秦侩)는 안 될 것이다.

 

 

황금영(1868-1953)은 본적은 저장성 위야오(浙江余姚)이며, 쑤저우(苏州) 태생입니다. 황금영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싫어하고, 불량배와 어울렸습니다. 17세가 되자 그는 성황묘(城隍庙)에 가서 이모부가 운영하는 표구점에서 견습공으로 일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표구일로는 장래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프랑스 조계지 경찰서 경찰"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강호를 주름잡던 그의 일생이 시작되었습니다.

 

 

 

 

 

황금영의 출세는 당시 "송교인 사건(宋教仁案)" 등 굵직한 두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송교인이 상해에서 암살당하자, 황금영은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3일 동안 살인범 무사영(武士英)을 잡았고, 이때 황금영의 명성이 갑자기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황금영이 정말로 유명해진 것은 이듬 해 "산둥 린청 자동차 납치 사건(山东临城劫车案)"으로, 이 사건에서 여러 명의 외국인이 토비(土匪)에게 인질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금영은 단 5명을 데리고 변장하여 깊은 산간 지역의 토비 중심부로 들어갔고, 프랑스계 가톨릭 신부 페이위송(裴雨松)·레이디(雷狄)를 구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황금영은 이런 큰 공을 세워 곧 조계지 경찰서에서 청운의 길을 걷게 되었고, 프랑스 조계지에서 가장 권세있는 중국인 수사 팀장이 되었으며, 상해에서 흑백(黑白)을 막론하고 감히 누구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황금영은 청방 배경을 가진 임계생(林桂生)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자기 세력을 믿고 스스로 "천자배(天字辈)" 청방 보스라고 칭했습니다.

황금영은 한때 상하이탄에서 혼란을 일으키며 아편 판매, 카지노 개설, 투견장 공동 운영 등 혼자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주무르던 보스였습니다. 그 당시 샤오장(小蒋)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에도 일찍이 황금영 문하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샤오장이 진 빚도 황금영이 날려버리자 빚쟁이들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항전이 발발하면서, 장소림은 몇 명의 보스들이 일본에게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모두 홍콩섬으로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황금영은 연로하고 몸이 쇠약해진 이유로 홍콩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황금영은 상하이에 남았고, 항일전쟁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매국노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인에게 협력하는 것을 거절했고, 관우를 섬기며 매국노가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그에게 일본인과 협력할 것을 권하기도 했지만, 그는 "나는 악비(岳飞, 남송 때 금나라에 항거한 명장)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절대로 진쾌(秦侩, 거간꾼)는 되지 않겠다. 절대로 조상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를 문턱이 닳도록 찾았지만, 황금영은 끝까지 사양했고 꾀병을 부리면서까지 시종일관 매국노가 되지 않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황금영은 두문불출하였습니다.

 

 

황금영은 직접적으로 항전을 위해 힘쓰지는 않았지만, 그는 적어도 매국노가 되지 않음으로써 중국인으로서의 최소한은 지켰습니다. 장소림은 매국노가 되었는데, 황금영은 장소림에게 "당신은 매국노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는데, 당신이 스스로를 잃어버리면 자식과 후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호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2. 항전을 도운 두월생

 

 

황금영과는 달리, 두월생은 항전에 훨씬 적극적이었습니다.

두월생(1888-1951)은 젊은 시절에 밑바닥에서 치열하게 살았고, 과일을 팔았습니다. 14세 때, 청방 진세창(陈世昌) 문하에 들어가 일을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황금영에게 깊은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번영의 길이 시작되었는데요, 세가 커짐에 따라 두월생은 곧 황금영을 추월하였습니다. 그는 조폭일을 하면서 은행까지 운영했습니다.

 

 

 

 

 

두월생은 3대 형님들 중 나이가 가장 어리지만, 항전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1932년 128사변에서 두월생은 공개서한으로 적에 항거한 19로군(十九路军)을 격려하였고, "공등철심위국(公等铁心为国)으로 전 시민들에게 기세를 크게 떨쳤다"며 칭찬했습니다. 그는 수하 제자들에게 전략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차를 몰았습니다.

 

 

1937년, 송호회전(淞沪会战) 때에는 두월생이 앞장서서 자신의 수송회사의 선박을 스스로 침몰시켜 오송구(吴淞口)에서 해군을 도와 일본군을 막았습니다. 송호회전 기간동안 두월생 조직은 93만 위안의 성금을 모아 전선의 항전군대에 물자를 지원했고, 65개 수용소를 개설하여 3만여 명의 난민을 수용하였습니다.

 

 

두월생은 대우농(戴雨农)과 공동으로 "소저행동위원회별동대(苏浙行动委员会别动队)"를 창설하여 항전에 참가했으며, 두월생 수하들을 군대에 보내 작전을 돕는 것은 물론, 돈을 모아 완속기 권총 5000정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송호회전에서 유격대는 전투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용맹을 떨쳤고, 두월생 문하의 희생자들도 많았습니다.

 

 

 

 

 

항일 전쟁 시기에 두월생도 정면으로 전쟁터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적의 후방에서도 전쟁터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습니다. 두월생은 훗날 홍콩섬으로 이주하여 상하이에 있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군통(军统)을 도와 매국노인 상하이 시장 부소암(傅筱庵) 등을 암살했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 적십자사 부회장 명의로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방독면 1000개를 팔로군(八路军)에 무상으로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3. 기꺼이 매국노가 된 장소림

 

 

장소림은 샤오장(小蒋)의 동향인입니다. 13세에 날라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상하이 청방 "대(大)"자배(字辈) 번근승(樊瑾丞)이 청방의 "통(通)"자배 일원으로 소개해주었습니다.

 

 

 

 

 

상하이탄에는 "황금영은 재물을 탐내고, 장소림은 잘 때리며, 두월생은 잘 처신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한창인 장소림은 황금영과 두월생의 세력보다도 못했는데요, 황금영의 자격과 경력이 그에 비해 오래되었고, 두월생은 그를 전면에서 추월하여 장소림을 매우 언짢게 했습니다.

그는 늘 진정한 상하이탄의 우두머리를 한번 해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두월생은 홍콩섬으로 가서 항전을 지지하였고, 황금영은 절대로 일본인과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장소림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뛰어나와 일본인에게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장소림이 일본과 손을 잡은 후, "신아화평촉진회(新亚和平促进会)"를 조직하였고, 식량, 면, 군화, 약품(粮食、棉布、军火和药品)을 도매하여 일본인들을 도왔고, 국난으로부터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1939년이 되자, 장소림은 심지어 공개적으로 나서서 꼭두각시 절강성 정부(伪浙江省政府)를 기획하고 건립하였으며, 일본인은 그를 꼭두각시 절강성장(伪浙江省长)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장소림은 원래 상하이 지하의 왕만 꿈꿨지만, 관청의 수장까지 되어 성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이는 그를 매우 기쁘게 하였습니다.

 

 

매국노들은 징벌받아 마땅하겠지요. 장소림의 이러한 모든 행위는 벌써 군 통수권자의 눈 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군통은 그의 경호원인 임회부(林怀部)를 모반시키도록 하였고, 1940년 8월 14일, 장소림은 일본인이 준 "절강성 성장(浙江省省长)" 위임장을 받은 3일째 되는날, 매국노를 제거하기위해 군통과 손잡은 임회부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매국노 형님은 끝내 목숨을 잃었고, 인과응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hare?context=%7B%22nid%22%3A%22news_10459818449160277123%22%2C%22ssid%22%3A%22%22%7D&pageType=1

 

抗战里的上海黑帮三巨头,1人抗日,1人装傻,只有他做了汉奸

电影《八佰》里刀子冒死冲桥送电话线的镜头感动了不少观众。电影里刀子的人设是江湖帮派的一名成员,真实的历史里抗战时期也有很多江湖儿女投身到抗日前线,当然也有少数败类去做了汉

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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