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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통무술의 허와 실 본문

Chinese Culture

중국 전통무술의 허와 실

hanyuku 2020. 11. 17.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서 쿵후는 줄곧 중국인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는 중국인들이 모두 쿵후를 잘하는 것으로 인상이 각인되어 있는데, 개개인이모두 이소룡처럼 무술을 잘하는 것은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무술 수련인이라면 정말로 문예 작품속의 대협처럼 어떤 외부의 힘이나 장비 없이도 날아올라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사실, 이것도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현대 무술이 해낼 수 없는 것은 그당시의 신공을 모두 다 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약 100년 만인 1929년, 첫 전국무술대전에서 "대부분의 전통 무술은 모두 실전에는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당백이라는 전설의 전통 무술은 정말 사람들의 환상일 뿐일까요? 화려해 보이는 이런 수법들이 왜 통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날의 전통 무술은 또 어떤 새로운 발전이 있어야 실전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잘 치는 북방인(能打的北方人)

 

 

그 해, 중화민국이 건립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지만, 국가는 여전히 부강하지 못했습니다. 1929년 초, 중앙국술관 부관장(中央国术馆副馆长)인 이경림(李景林)이 "전국 무술대회(全国打擂比赛)"를 제안하였습니다. 국술이란 당시 무술에대한 호칭을 말합니다.

 

 

항저우에서 대회가 거행되었는데, 풍광이 빼어난 강남(江南)은 남부 선수들에겐 출전히 훨씬 편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회 지원자는 원래 125명이었으며, 109명이 참가했습니다. 모두 네 그룹으로 나누어졌고, 문벌의 제한이 없었으며, 관중은 6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경림(李景林)

 

 

아쉽게도, 최종 결과 상위 10명등 수상자 중 상위 5명은 모두 허베이 사람이고, 6위는 안후이 출신 선수였습니다. 남쪽인지 북쪽인지 모르는 채로 대회를 진행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쪽에 편향되어있어서 당시의 남북 무림 격차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 사람들은 전통 무술이 얼마나 멋지고 자부심 가질만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전통 무술은 실전에도 안되고 허울뿐인 "공두권술(空头拳术)"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싸울때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남권북각(南拳北腿)"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이번 무술 경연대회에서 북쪽 사람들이 압승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상에 중화민국의 무술은 "동아병부(东亚病夫)"간판을 단 정무문(精武门), 검은 옷을 입고 영춘권을 휘두르는 엽문(叶问), 불산무영각(佛山无影脚)의 황비홍(黄飞鸿)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웅들은 모두 남쪽 사람들이었지요.

 

 

 

 

 

 

아마도 이에 대해 사람들은 옥신각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저 사람들의 인상에 각인된 무술 세계일 뿐인데, 그것은 영화나, 이야기, 연의, 소문에 존재했을 뿐, 아무도 역사에서 사실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영화의 기준을 의심할 수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사람들이 늘 창작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진실과 허구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듣기만 하면 곧이곧대로 믿게 되듯이, 소문을 듣고는 "내가 지금 말한게 왜 틀린거냐"며 펄쩍펄쩍 뛰며, 바로잡을 생각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타인이 속이는 것을 원망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실제로 잘 속기 때문인데요, 말하는 대로 곧이 곧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믿을지 안 믿을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만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문예 작품이 진실이라고 믿기보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의식이 있어야 하겠지요.

 

 

한쪽 말만 듣고 보면서 믿는 것은 근거없는 풍문일 수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들어보면 진실이 있을 수 있는데, 또한 허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서는 모두 스스로 진실을 구별해내야 합니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함(花拳绣腿)

 

 

그렇다면, 남북 무림 격차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선, 남방의 기법은 자체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타인과 덜 상대하고, 사람들과의 실전 경험이 부족하여 북방 선수들과 큰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당시 남북의 신장차이가 컸ㄱ 때문인데요, 남방인들의 골격은 작고, 그 시절에는 영양도 부족했기 때문에 키의 차이가 체력과 힘을 대표했습니다. 마치 아이와 어른이 싸우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아무리 어린이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어른의 키와 체형에 압도된다면 싸우는 것은 어렵겠지요.

마지막으로, 종파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승자가 자신의 가문을 알릴때, 비록 모두 다양한 전통 문파에서 왔지만, 예외없이 밖에서는 암암리에 또 다른 고유한 격투훈련을 합니다. 이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우승자가 직접적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위협하면 재미가 없겠지요.

 

 

 

 

 

또한 다른 시스템이 중국의 전통 무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전통무술은 한 가지 시스템 안에 있지 않은데요, 한 가지만 가지고는 자신은 잘 알지 몰라도, 상대방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산타(散打)와 태극(太极)을 배운 사람들은 잘 대처할 수 있지만, 태극만 배운 사람들은 산타의 동작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남방 사람들은 여전히 한 수 아래였던 것이지요.

 

 

모두 "지과위무(止戈为武, 止와 戈가 합쳐져 武가 되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무술을 철학적 높이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무술은 무엇일까요? 바로 체계적인 싸움입니다. 원래 강한 수법을 쓰는 것이지만, 연습에 들어가서 변질되어 맥이 빠지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미명까지 얻게 되었는데, 이런 수법은 겉만 요란할 뿐 실제 싸움에서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과(止戈)의 목적은 도달했지만, 먼저 멈춘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입니다. 실용성의 기능이 갑자기 원래의 실천적 의미를 상실한다면, 그것은 이미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로만 공리성(功利性)을 추구하면 안된다고 하며, 실제로는 스스로 공리성을 추구하는데요, 공능성(功能性)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꺼리고 있습니다.

 

 

만약 무술이 결국 관상성(观赏性)만 남겨지게 된다면,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이겠지요. 이것은 무술의 본질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공리심(功利心)이 없을 수는 있지만, 기능(功能)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겉모습에 만족하여 "예의염치(礼义廉耻)"만 남게되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고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망한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각 직무에 있어서 만약 어떤 자리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다시 돌아가서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할 능력을 얻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한 무술

 

 

무술은 현대에 와서는 스포츠의 한 종류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중화무술은 "전통군계무술(传统军械武术)"과 "전통도수무술(传统徒手武术)"의 두 가지 유형을 이룹니다.

 

 

오늘날 전통 무술로 불리는 각종 무술 유파들은 고대에는 다양한 강호와 거장들과 농민들의 전투술이었습니다. 과거에 전통무술은 늘 공연과 경기에 국한되었었지요.

 

 

 

 

 

현대에 중국 무술은 서양 스포츠의 다양한 형태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동양 전통 스포츠 형태로, 깊은 사상과 두터운 문화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무술은 스포츠가 아니라, 스포츠의 상위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중국 무술은 공연의 형식적 요소에서 벗어나 점차 세계와 접목되고 있습니다.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자리 잡게되어 무술은 더 많은 놀라움을 안겨줄 것으로 믿습니다.

 

 

세상은 계속 변화하고 있고, 사람들은 변혁을 제창하고, 혁신하며, 정수를 취하고, 찌꺼기를 없애고 있습니다.

 

 

 

 

 

스승을 존경하는 중도(重道)는 좋지만, 학생이 선생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현대의 요구와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공자의 상상 속에 담긴 주례(周礼) 역시도 역사의 흐름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순종하는 자는 창성할 것이며, 거역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다.(顺我者昌,逆我者亡。)"라는 이 말은 아주 포악한 것이지만, 만약 시간에 대입해본다면 맞는 말이 됩니다.

 

 

과거의 것을 억지로 되살리거나 복고시킬 필요는 없으며, 너무 지나치면 사라지게 되고,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면 세상에서 사라지진 않습니다. 복원할 수는 있지만 부활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다면 더욱 아름다울지도 모릅니다.

 

 

전통 무술은 계속 발전해왔고,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흡수해왔지만, 그것을 옛 것으로 회귀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고, 현재의 흐름에 맞추어 발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hare?context=%7B%22nid%22%3A%22news_9141651522194216899%22%2C%22ssid%22%3A%22%22%7D&page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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