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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개국 황제 이연(李渊)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이연(李渊)은 당(唐)나라 개국 황제이며, 묘호(庙号)는 "고조(高祖)"로, 대당왕조 289년 국운(国运)의 기반을 일궈낸 사람입니다. 당나라 왕조는 중국 역사상 한(汉)나라에 이어 가장 강대한 왕조였고,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고대 왕조를 일컬어 습관적으로 "한당(汉唐)"으로 부르며 고대 왕조의 찬란함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백 년 동안 후대에서는 줄곧 이당황실(李唐皇室)의 신분 및 탄생지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연은 개국 황제로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
만약 이당황실의 주장대로라면, 이연은 룽산 서쪽의 오랑캐(陇西狄道)였을 것이며, 오늘날의 간쑤성(甘肃省) 사람이며, 도가 학설의 창시자 이이(李耳, 노자)의 일맥(一脉)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후세에 이당황실의 출신지를 놓고 남원북철(南辕北辙, 일의 결과가 의도와는 반대로 진행됨을 뜻함) 되었는데, 한실명문(汉室名门)인 조군(赵郡)이 오늘날의 허베이 성 경내(河北省境内) 출신인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만약 이연이 조군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이당황실은 유명 인사라는 혐의를 감출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이연은 선비민족(鲜卑民族) 계통이거나 북족(北族)과 가까운 한족(汉族)에 속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 이유로는 이연이 무천진(武川镇)에서 오랫동안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었고, 이 때 호(胡) 성씨인 "대야씨(大野氏)"를 사용했었다고 합니다. 무천진은 북위(北魏)에서 유연(柔然)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6개 군진 중 하나로, 지금의 몽골인 무천현 서쪽(武川县西)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연을 무천인(武川人)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 문제는 좀 복잡한데요, 역사서의 기록에서는 그를 두 가지 엇갈린 방향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평범하고 무능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도무략(文韬武略, 군대를 부리는 책략을 이르는 말)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평범하고 무능했다는 평가는 황제가 된 이후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고, 또 다른 평가는 아마도 그의 아들인 이세민(李世民, 당나라 제2대 황제)이 사관에게 귀띔하여 고심하여 만든 "수식(修饰)"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도무략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수많은 용감했던 면모들을 털어놓아 호걸다운 면모를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객관적으로 말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소년영무(少年英武)
이연의 조상은 권세있는 혁혁한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부친인 이병(李昺)은 조부 "당국공(唐国公)"의 작위를 물려받았는데, 조부 이호(李虎)는 서위(西魏) "팔주국(八柱国)"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7세 때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이연은 어머니에게만 의지하며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모부 양견(杨坚)은 수나라를 세웠고, 주인이 된 이모 독고씨가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이연의 벼슬길은 순탄하였습니다. 서기 617년, 수 양제에 의해 북도(北都)였던 진양(晋阳)에 파견되어 유수(留守, 옛날 황제가 수도를 떠나 순행할 때 대신이 수도에 남아서 지키던 것을 말함)를 하면서 당나라 창건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연은 모두 4형제로, 이연 본인은 막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 형이 일찍 세상을 뜬 탓에, 이연은 어려서부터 가업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연은 초기에는 귀공자가 아니라, 실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연은 승마와 무예에도 정통하였고, 훌륭한 사격술에 의지하여 무예를 겨루어 두씨(窦氏) 미인을 얻어 혼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수양제가 대업년간(大业年间), 이연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모단아(母端儿)와 역산비적 견적아(历山飞贼甄翟儿)의 폭동 봉기를 차례대로 평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연은 문무도략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는 징후를 보입니다.
2. 고첨원촉(高瞻远瞩, 먼 곳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다)
장안(长安)은 수나라 왕조의 도성이었습니다. 수 양제 때는 낙양(洛阳)으로 경제의 중심을 옮겼습니다. 이에 따라 낙양의 정치적 위상은 점차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낙양은 결코 장안을 대신하여 정치의 중심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수나라 말기, 군웅(群雄, 수많은 영웅 호걸들)은 마침 이 이 낙양 일대를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이연은 마침 태원(太原, 산시성의 성도)의 대본영(大本营, 전시 사령부)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비어있는 장안을 빠르게 점령하였고, 천하를 장악하여 우이(牛耳, 옛날에 맹약을 맺을 때 쇠 귀를 베어 쟁반에 놓고 그 피를 받아 맹세의 표시로 하였다)를 잡고, 중원을 내려다보며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하였습니다.
사실, 이연은 수나라 말기의 첫번째 기병(起兵)자도, 최강의 반수(反隋) 세력도 아니었지만, 그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고, "당랑포선, 마작재후(螳螂捕蝉,麻雀在后, 사마귀가 매미를 잡는데, 참새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중국 속담)"를 연출하며, 최종적으로 승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역사서에서는 "태원기병(太原起兵)"의 공로를 이세민의 적극적인 조달 덕분으로 돌렸지만, 사실상 조타수(掌舵者)는 이연 본인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는 주저하며 망설이는 모양새였지만, 그는 아들한테 끌려다닌 적 없이 승리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부연료사(敷衍了事)
이연의 인생에서 결함은 아들 셋이 서로 다투며 골육상잔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연출한 데에 있습니다. 만약 이연이 장남 이건성(李建成)을 태자로서 지위를 확실하게 해주었다면, 차남 이세민(李世民)에게 환상을 심어줄 여지가 없을 것이고, 그 후에 황제 및 아버지로서의 위엄으로 후계자를 정했다면, 현무문(玄武门)의 변이 일어날 확률이 크게 낮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연은 거꾸로 이세민을 태자로 바꾸겠다는 구두 약속은 물론, 끊임없이 이세민의 지위를 높여주는 일들을 해왔는데요, 예를 들어 "천책상장(天策上将)"에 봉해주고, "합동도대행태상서령(陕东道大行台尚书令)"의 직위를 주는 등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이세민의 세력은 하늘을 찔렀고, 태자 이건성은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내며, 형제의 암투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연은 이들 형제의 암투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연은 일관되게 일을 얼버무리며 사태의 악화를 방지하기는 커녕, 이세민에게 낙양을 맡아 "제후왕(诸侯王)"이 되게하는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이세민이 낙양왕이 되면, 당은 둘로 쪼개져 두 형제가 불꽃튀는 대결을 하게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다행히 신하들의 설득으로 이러한 생각은 실행되지 못하였지만, 이 때문에, 현무문의 변이 발생한 것은 이연의 "희리호도(稀里糊涂, 흐리멍텅함)"와 관련이 깊습니다.
보통, 황제들은 즉위하자마자 자기 능침(陵寝)을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이연은 눈을 감고도 흙을 한 삽도 뜨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연의 행보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데요, 서기 635년에 이연이 승하한 후, 5개월 후 헌릉이 완성되자 당태종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과 어머니 도씨의 유해를 이곳에 합장하였습니다. 비록 당 왕조의 개국 황제였던 이연이지만, 존재감이 강하지 않았고, 아들 이세민에게 역사의 후광도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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