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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후손이 아직까지 생존해있을까?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최초의 황제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전설적인 색채로 가득한만큼, 그의 후손들의 운명도 기구하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질자(质子)로, 조정(赵政)이라 불렸으며 조(赵)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진 소양왕(秦昭襄王) 56년(기원전 251년) 조정의 아버지 진자초(秦子楚)였는데요, 여불위(吕不韦)의 도움으로 진(秦)나라로 돌아가 태자로 봉해졌습니다. 여덟살의 그는 그제야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름을 영정(嬴政)으로 바꾸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는 진왕(秦王)으로 봉인되었는데, 당시의 진나라는 여전히 여불위와 노애(嫪毐)에게 힘이 견고히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왕의 즉위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젊은 진왕이 여불위와 노애에게 칼을 겨누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젊은 진왕은 잔혹한 성정의 사람임을 알게 되었죠.
먼저, 진왕은 조정의 거대한 노애 세력을 제거했고, 추종자들을 약화시켰습니다. 기원전 237년, 진왕은 여불위를 파면하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확실히 독단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시황은 이사(李斯)와 군사전문가인 위요자(尉缭子)를 임명하여 통일전략에 협조하게 했습니다. 기원전 230년, 진시황은 최고 강대국인 한(韩)나라를 섬멸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조(赵)나라에서 장평전쟁(长平战争)을 일으켜 조나라를 무찔렀습니다. 60만 군대를 동원하여 초(楚)나라를 공격했고, 이는 당시 제 2의 강대국이었던 초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왕은 줄곧 다른 나라를 공격해왔고, 400년 넘게 갈라져있던 시대를 서서히 종식시켰습니다.
6개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왕의 칭호로는 더이상 자신을 묘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자신의 칭호를 황제라고 바꾸었습니다. "황제(皇帝)"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공적을 결합하여야 그와 비견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삼황오제의 구체적인 역사는 믿을 수 없지만, 삼황오제가 세운 왕조는 수천 년에서 몇 만 년간 전해져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나라는 진 2세(秦二世) 때 멸망할 정도로 짧은 기간동안만 존재했죠.
후세 사람들은 진시황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인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진시황이 이들 6개국 귀족의 후예들을 모두 죽이지 않았기 대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이상 고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죠.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진시황의 후예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여전히 오늘날까지 혈통이 남아있을까요?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 진시황의 후손은 아마도 공자(公子)와 공자의 자손을 아우르는 분파일 것이며, 공자는 호해(胡亥, 진시황제의 둘째 아들)의 형입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고(赵高)와 이사(李斯)는 공모하여 호해를 2대 진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덕이 미치지 못하여, 젊은 2대 진왕 호해는 권력을 추구하고 왕위를 찬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형제자매를 숙청해야 했습니다. 물론 공자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는 도망가고 싶었으나, 그는 그의 가족들이 호해에게 처형될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공자는 아버지 진시황의 능묘에 순장되기로 하고 호해에게 가족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호해와 조고는 흔쾌히 동의했고, 나중에 공자의 후손들은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공자의 후손을 발견하지 못했는데요, 그들은 호해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벌써 도망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진시황의 살아남은 후손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공자의 아이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정말 모호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가 호해의 형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호해의 삼촌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공자(公子)"로 불리며 진왕의 왕위를 잇는 신분이니, 진공(秦公)의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그가 진시황의 평민 아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왕위를 다툴 자격이 없기 때문에 호해에게서 풀려난 것이지요. 공자의 아이는 나중에 진나라 3대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진 3세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유방(刘邦)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나중에 그는 전쟁 중 항우(项羽)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두 아이는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만큼, 진시황의 맥은 아직 끊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지게 될 수 있죠.
진시황의 후예들이 살아남았다면, 이들의 성은 아마 영(嬴), 조(赵), 진(秦), 봉(奉)씨일 것이라고 합니다. "영(嬴)"은 최초의 진시황의 성씨였던 만큼, 후대가 영 씨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항우가 진나라 황실에 가한 박해를 고려할 때, 진시황의 후손들은 자신의 조국을 성씨로 삼아 조 씨나, 진 씨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진시황제 영정은 조 씨였습니다.
봉 씨가 진시황의 후예일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동생이 개혁에 반대해서 상앙(商鞅,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정치가)의 공격을 받자 후손들이 성을 봉 씨로 바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봉 씨는 진나라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진나라가 멸망하자 진시황의 후손들이 먼 친척을 찾아 그 성을 봉 씨로 바꿨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봉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진나라의 후예라고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기(史记)>의 일부분일 뿐이고, <사기>에는 또 다른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중국에서 <사기>는 문언문(文言文)으로 쓰여있어서 읽고 싶어도 백화문(白话文)으로 번역된 것이 아니면 읽기가 힘들다는 점이 단점이라고 하네요.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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