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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자희태후의 결정적 실수는? 본문

Chinese Culture

청나라 자희태후의 결정적 실수는?

hanyuku 2020. 8. 6.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청나라 자희태후는 권력에 욕심을 내고 사치를 즐겨서 결국 청나라를 망하는데 더욱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라를 망하게 한 일들에서도 결정타가 있었을 것인데요, 그것은 바로 신축조약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청나라 정부의 주권, 경제력 등 힘을 상실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위의 불평등 조약들을 체결한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신축조약을 체결하게 된 그 배경까지 파고들어가봐야 하겠죠. 자희태후가 한 결정적 실수가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1900년 5월, 8개국 연합군은 청나라를 향해 무장 침략을 개시하였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자희태후가 장악하고 있었는데요, 자희태후는 베이징 성이 함락되자 광서(光绪) 황제를 데리고 시안(西安)으로 도주했습니다. 1900년 9월, 이홍장(李鸿章)은 자희태후의 명을 받아 청나라 정부를 대표하여 8개국 연합군과 신축조약(辛丑条约)을 체결했고, 청 정부는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8개국에게 막대한 배상을 했습니다. 중국은 이로써 철저히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경자사변(庚子事变)에서 8개국 연합군만 배상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자희태후는 호기롭게 11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배상 단계까지 가서는 8개국에 추가로 3개국까지 배상금을 받게 되었죠.

 

 

 

 

자희태후가 11개국을 상대로 선포했다면, 왜 중국을 침공한 것은 8개국 연합군 뿐이었을까요? 나머지 세 나라는 어디로 갔던 것일까요?

 

 

청나라 정부와 서방의 1차적 원한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청 정부는 아편전쟁에서 패해 난징조약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난징조약의 최악은 중국 영토의 일부분을 이양해서가 아니라 서방세계가 청나라의 부실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여 년 후,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러시아의 지지 아래, 제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이화원은 불타버렸습니다. 또한, 영국-프랑스-러시아 3개국과 베이징 조약을 체결해서 100만 평방미터의 땅을 잃었습니다.

 

 

제 2차 아편전쟁은 서양 열강의 두 번째 탐색으로, 청나라가 겉으로는 강해보이나 실제로는 약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 십 년 동안 서방은 다시 동양으로 향해 부당한 이득을 챙기려는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 청나라 정부와 일본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서방은 중국에 대한 침략 계획을 가속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899년 의화단의 등장으로 서방 열강들은 마침내 중국 침략의 이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의화단은 본래 산둥(山东), 허베이(河北) 일대에서 유행한 민간 비밀조직으로서 '반청복명(反清复明)'을 노린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끊임없는 침입에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清灭洋)'의 구호를 내걸게 되었지요.

 

 

 

 

사실, 자희태후는 서방의 끊임없는 침입에 상당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의 힘이 약해서 서방국가에 손을 댈 수 없었지요. 그래서 의화단이 나타나자 자희태후는 사람을 보내 의화단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희태후는 의화단이 서양인들과 맞서는 것을 암암리에 방임했습니다. 그렇게되면 청 정부가 적어도 직접적인 책임은 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희태후의 방임 아래, 의화단은 외국 세력에 대해 사생결단으로 톈진(天津) 조계지까지 파고들었습니다. 톈진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의화단은 다시 즈리(直隶)로 진격하였습니다. 그 사이 청 정부에서도 의화단을 토벌하기 위한 파병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실질적 진압이 없는 보여주기식에 불과하였습니다.

 

 

의화단의 충격으로 외국인 선교사와 대사관 등은 여러 차례 충격을 받기 시작했고, 성당에도 불을 지르는 등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외국 대사관들은 자희태후에게 연락하여 안정화를 위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자희태후는 이러한 요구를 모른체 하면서 계속 방임했고, 자희태후의 이러한 태도는 서구 열강에게 직접 침입의 빌미를 주게 된 것입니다.

 

 

 

 

열강들은 곧 연합군을 조직하여 베이징에 쳐들어가 청나라와 의화단 토벌을 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열강의 무력을 통한 베이징 진입에 대해 자희태후는 여러 해 동안 쌓인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그녀는 허경징(许景澄), 원창(袁昶), 서용의(徐用仪), 입산(立山), 연원(联元) 5인을 주축으로 한 대신들 일파를 죽이고,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벨기에 11국을 상대로 직접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전쟁 발발 초기, 연합군은 2만 명 미만의 병력만을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양측의 무기 차이가 워낙 커서 연합군은 병력의 손실이 거의 없이 무사히 베이징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입성 후 "서민과 의화단의 구별이 안 된다"는 이유로 베이징 시내 주민들에게 참혹한 살상과 약탈을 감행했습니다.

 

 

전쟁 후기가 되자, 연합군의 중점은 이미 사라졌고, 전쟁이라기 보다는 앞을 다투어 약탈에 매달렸습니다. 더 큰 이익을 위해 각국 군대가 전력을 증원투입하였고, 결국 5만 명이 베이징 시내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5만 명의 군대 중 일본이 2만명을 파견하여 가장 많았고, 러시아는 1만 3천명을 파견하여 그 다음을 기록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수천 명에 불과한 부대부터 100여 명만 파견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면 벨기에, 스페인, 네덜란드 3개국은 아예 군대를 보내지 않았는데요, 스페인 등 3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당시 이 전쟁을 지탱할 충분한 병력과 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이 서양인들을 괴롭히는 과정에서 스페인 등 3개국의 대사관에도 피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자희태후가 이들 세 나라에도 선전포고를 했었기 때문에, 향후 청나라가 패한 후 3개국이 비록 병력을 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배상금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무런 힘이 없었던 청나라 정부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죠.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hare?context=%7B%22nid%22%3A%22news_9278960836387719293%22%2C%22ssid%22%3A%22%22%7D&pageType=1

 

慈禧向十一国宣战,为什么却只有八国联军来入侵,还有三国呢

1900年5月,八国联军向清朝发起了武装侵略。在北京城被攻陷后,慈禧太后带着光绪皇帝一路逃向西安。1900年9月,李鸿章代表清政府和八国联军签订了《辛丑条约》,清政府向英、美、日、俄、

mbd.baidu.com

 

자신이 누리던 권력을 잃는 것이 두려워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내려서 서구 열강들에게 침략의 빌미를 내 준 자희태후는 결국 열강들의 침입으로 자존심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추구하던 권력도, 국가의 부도 잃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서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 이러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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