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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가장 대단한 풍수사(风水师)는?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서 풍수(风水)는 중화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오묘한 학문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풍수는 자연계의 힘이며, 우주의 대자기장 에너지입니다. 바람은 원기와 에너지이고, 물은 흐름과 변화를 뜻했습니다. 풍수는 상지술(相地之术)로, 터를 살피는 방법이었는데요, 지상(地相)이라고도 부르고, 고대에는 감여술(堪舆术)이라고도 했습니다. 이것은 환경과 우주의 법칙을 연구하는 일종의 철학으로,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이상 자연도 인간의 일부로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사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풍수 지식은 매우 심오한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만약 중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한다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풍수는 사실 옛 선조들의 일종의 생활이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집은 양지바른 쪽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과 같죠. 그러나 풍수학적 이론들은 또한 정통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름난 풍수사들은 몇 명에 그치고,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흠천감(钦天监, 명청 시대의 천문학 관직)과 혼동하기 쉽습니다.
흠천감도 풍수처럼 별을 보긴 하지만 "별점"이 더 많은 편이고, 풍수는 복점과 관상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많은 역학(易学)대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이순풍(李淳风)과 원천강(袁天罡)이 가장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풍수를 보는 것은 이들의 전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 풍수 분야에서 순위를 매기려면 양균송(杨筠松)이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당나라 사람인데, 이순풍과 원천강은 모두 당나라 초기 사람들이고, 양균송은 당나라 말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양균송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요?
먼저 그의 사회적 지위는 국사(国师)이고, 관직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禄大夫)였습니다. 그는 영대(灵台)의 지리를 전문으로 하는 관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순풍과 원천강 두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이순풍의 개인적인 성취는 매우 높았는데, 그의 <을사점(乙巳占)>은 세계 기상(气象) 역사상 최초의 전문 저작이었지만, 그의 관직은 최고가 장사랑(将仕郎)에 불과하였으며, 태사국(太史局)에서 일했습니다.
원천강은 사회에 대해 성망(声望)이 있었지만 사회적 명성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이세민(李世民)이 그를 자신의 고문단에 포함시켰지만, 나중에 그의 선택을 존중하여 현령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 또한 대단하여, 역술로 역사의 흐름을 밀어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순풍과 원천강 두 사람의 공동 업적은 바로 <추배도(推背图)>입니다.
양균송의 개인적 성취도 상당히 뛰어났는데요, 그는 풍수학적 저서를 많이 집필했습니다. <감용경(撼龙经)>, <의용경(疑龙经)>, <청낭오어(青囊奥语)>, <천옥경(天玉经)>, <옥척경(玉尺经)> 등의 저서가 전해져, 중국 고대 지리에 대한 상세한 문자 자료와 실물 유산을 대량으로 남겼습니다. 양균송의 풍수학은 일종의 문화였으며, 동시에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는 풍수를 보는데는 뛰어났지만, 그는 그것으로 돈을 벌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풍수학에 대한 조예는 맹자의 유학적 성취와 같아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양공(杨公)"으로 추앙하였습니다. 다만, 그가 살던 시절에는 당나라의 운명이 이미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많은 야심있는 할거 세력들이 준동했는데, 그 중에선 풍수를 고치는 방법을 통해 자신도 황제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양균송을 찾기도 하였습니다. 양균송은 풍수 지식을 이용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복을 도모해왔지만, 강도같은 제후들을 만났을때도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나라 말기 건주(虔州, 지금의 장시성 간저우시江西赣州)의 제후였던 노광조(卢光稠)는 자신이 너무나 황제가 되고 싶었기에 양균송을 데려와 자신에 대해 점치게 했습니다. 양균송은 이를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노광조가 자신의 어머니의 묘를 "천자의 땅(天子之地)"으로 옮기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역대 왕조를 보면, 황제가 자신의 능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이 이치 때문인데요, 풍수가 좋으면 자신의 자손을 보우하고 자신의 강산을 보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함풍황제는 나중에 그의 조상의 묘를 파헤쳤습니다. 그래서 풍수학에서 조상의 무덤이 잘 묻혔다는 것은 후손들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것입니다. 노광조는 모든 일을 즉시 처리한 후, 매우 기뻐서 좋은 술과 좋은 요리로 양균송을 대접했는데, 술 몇 잔을 마신 후에 노광조는 만족하지 않고, 양균송에게 또 다른 "천자의 땅"이 있냐고 계속 물었습니다. 양균송은 "일석은 십팔면인데, 면면마다 천자가 나온다(一席十八面,面面出天子。)"라고 직답했습니다. 그는 사실 노광조를 풍자하고 있었지만, 노광조가 이를 들은 직후 나쁜 마음을 품어 양균송이 다른 사람에게도 풍수학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몰래 부하들에게 시켜 술에 만성독약을 타게 했습니다. 양균송만 죽으면 자신과 더이상 다투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노광조의 생각은 완벽한 듯 보였습니다.
양균송이 건주를 떠나면서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원래는 집에 돌아와서 해독을 하려고 했는데, 독이 빠르게 효력이 나타나자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그가 타고 있던 배는 약구파(药口坝) 둑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의한 사람에게 풍수를 알려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개탄했고, 그 다음엔 자신의 삶이 끝나는 곳의 지명이 약구파(药口坝, 약을 먹어 죽다)라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양균송은 가만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임종 전에 자신의 도제에게 당부하였는데, 자신이 죽고 나서 노광조에게 다시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절반의 풍수만을 알려줬을 뿐, 무덤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간저우 마차만(磨车湾) 지역에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사거리에 우물을 뚫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광조는 이를 정말 믿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결과는 어찌되었을까요?
당시 양균송의 제자는 왜 자기 목숨을 앗아가는 사람을 돕느냐고 물었습니다. 양균송은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었는데요, 그는 자신의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노광조가 그렇게 하면 몇 년 못가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하였죠.
원래 이 두 마디에는 풍수가 배어있는데요, "마차만에 물레방아를 놓다(磨车湾安碓)"는 말은 노광조의 등에 독창이 생긴다는 뜻이고, "사거리에 우물을 놓는다(十字路开井)"는 말은 노왕(노광조)이 목을 매다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정말로 노광조는 등 뒤에 부스럼이 생겨 괴로워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합니다.
믿기 힘들지만, 정말로 풍수가 굉장하지 않나요?
사실, 몇몇 대가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풍수"라고 합니다. 선한 마음을 먹고, 남을 돕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면, 자연스레 풍수가 좋아진다고 하네요.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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