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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성 인생스토리 #4 - 장개석의 전처 진결여(陈洁如)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성공한 남자 뒤에는 꼭 유능한 여자가 있다고들 하죠. 장개석 뒤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송미령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만나 결혼후 헤어진 전처 진결여(陈洁如)도 있습니다. 오늘은 진결여의 인생스토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진결여는 장개석과 함께 7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했는데요,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당시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장개석과 결혼하였습니다. 초반에는 그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혼 후 7년만에 다른 여자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습니다.
1부. 결혼 전의 진결여
진결여의 본래 이름은 진봉(陈凤)으로, 그녀는 1906년 8월 26일에 상해에서 태어났습니다. 진결여의 부친은 상해의 한 상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친정은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부모는 진결여를 키우는데에 매우 신경을 써서 그녀는 지성과 예능을 겸비한 여성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녀는 중등교육도 받고 기금서화(棋琴书画, 거문고와 서예, 그림)에 능했습니다.
비록 부잣집 딸이었지만, 그녀는 매우 온화한 성품을 지녔고, 게다가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손중산은 그녀를 귀여우면서도 우아하다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진결여의 초년은 매우 순조롭고, 출신도 좋은데다가 외모와 학식도 겸비하여 그야말로 엄친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장개석을 만난 것은 그녀에게 평생의 전환점이 되었는데요, 그녀가 12세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신식학당에 입학해 공부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단짝친구 주일민(朱逸民)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주일민은 장정강(张静江, 중국의 정치 인물이자 금융 기업가)의 후처로 결혼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장가공관(张家公馆)에 드나들었습니다. 장가공관에는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손중산(孙中山), 대계도(戴季陶), 장개석(蒋介石) 등이 자주 찾는 곳이었습니다. 1919년, 장개석은 진결여에게 한 눈에 반해서 그녀를 향한 열의를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시작과 동시에 벽에 부딪혔는데, 왜냐하면 진결여가 나이 차이 때문에 직접 거절하기도 하였고, 진결여의 부모도 딸이 아직 어리다고 해서 절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장개석은 진결여를 향한 사랑이 지극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다려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결여의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했고, 진결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최고급 녹나무 관을 가지고 방문하여 위로하였고, 진결여가 가장 힘들때 그녀의 곁을 지키며 갖가지 일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진결여의 어머니가 생일을 맞이할때도 큰 돈을 들여 두 모녀의 체면을 세워주기도 하였습니다. 보통 젊은 커플들처럼 그는 진결여를 데리고 함께 여러 곳에서 식사와 여행을 했고, 함께 다니며 힐링하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감정도 급속히 고조되었습니다.
결국 장개석의 진심이 진결여 두 모녀를 감동하게 했고, 그들은 1921년 12월 5일 상해의 영안(永安) 빌딩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진결여의 나이 15세, 장개석은 34세였습니다.
2부. 결혼 후의 두 사람
진결여는 장개석과 결혼 후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두 손을 맞잡고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데, 진결여는 장개석이 얻은 내조의 여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진결여도 그 곳에서 장개석의 본처인 모씨(毛氏)를 만났고, 진결여는 모씨에 대해 매우 겸손한 모습으로 두 사람이 함께 자매처럼 시골을 산책하기도 했습니다.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蒋经国)도 새엄마를 매우 좋아하고 사이 좋게 잘 지냈습니다.
진결여는 비록 송미령처럼 엄청난 가문은 아니었지만, 밖에서 장개석의 체면을 세울 수 있을 정도는 충분한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장개석은 항상 그녀를 곁에 두었고, 그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장개석의 부인이었습니다.
진결여는 장개석 수하의 사람들한테도 매우 겸손하고 온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들었습니다.
행복하고 평온했던 두 사람의 삶은 송미령 때문에 바뀌었고, 장개석은 한 차례의 무도회 이후 송미령에게 마음을 돌리며 미친듯이 그녀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송미령의 집안은 기독교를 믿고, 일부일처제만 허용했기 때문에 진결여는 장개석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보내려고 진결여와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도록 독약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오늘부터 5년 안에 반드시 깨끗한 결혼을 할 것이다. 만약 맹세를 어기고 그녀를 데려오지 않는다면, 부디 나를 죽이고 나의 난징 정부를 산산조각 내시기를 부처님께 기도한다. 만약 10년 20년 안에 그녀에 대한 나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부디 나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나를 중국 국외로 추방하여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할 것이다."
이렇게 장개석에 의해 해외로 쫓겨나게 된 진결여는 배를 타고 가면서 자신의 이혼 소식을 알게 되었고, 장개석은 신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었음을 알렸습니다. 진결여는 비통한 마음과 슬픔에 잠겨 자살을 기도하기까지도 했습니다.
3부. 이혼 후의 진결여
진결여는 해외에 나간 후,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자신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콜롬비아 대학의 석사 학위를 무사히 취득했습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게 살았고, 원예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미국 생활은 매우 평온하여, 다른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질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분명 장개석을 매우 사랑하고 있을 것이 분명할 것 같은데요, 그녀가 이혼 당시 22세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의 재혼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버림받았지만 그녀는 결코 장개석을 헐뜯은 적이 없으며, 기자의 인터뷰에서도 여태까지 이에 대해 토로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장개석의 정적(政敌)들은 진결여를 찾아내 협박하고 돈으로 유혹하여 진결여를 통해 장개석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했지만, 진결여는 모두 응하지 않았습니다.
버림받은 상황을 앞에 두고도 진결여는 이와 같이 넓은 포용력을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선한 사람은 우대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죠. 진결여의 양녀와 장경국은 그녀에게 마땅히 효도를 다 해야 할것입니다. 비록 진결여가 태어났을 때는 여름 꽃의 화려함이 없었지만, 그녀가 죽었을 때는 가을잎처럼 고요했습니다.
만약 진결여가 만난 사람이 장개석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또 다른 풍경이 되어있었을 것이겠지요.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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