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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朱元璋)의 명효릉(明孝陵)은 600년 동안 왜 아무도 도굴하지 못했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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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朱元璋)의 명효릉(明孝陵)은 600년 동안 왜 아무도 도굴하지 못했을까?

hanyuku 2022. 6. 13.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97년에 중국에서 고고학자들이 명나라 주원장의 묘를 탐사하였는데요, 도굴당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고대 제왕들의 능묘가 대부분 도굴된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주원장은 대명 개국 황제로서 당연히 무덤 안에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텐데, 왜 아무도 도굴하지 못하였던 것일까요?

 

 

주원장은 매우 지략적인 황제였는데요, 그것은 그가 묫자리를 선택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원장은 생존해 있었을 때, 자신의 묫자리 위치를 난징 쯔진산(南京紫金山) 남쪽 기슭의 독룡사(独龙寺)로 정하였습니다.

 

 

<강희왕조(康熙王朝)>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이러한 단락이 나온다고 합니다. 강희가 남경을 순시하며, 남경에 가서 주원장의 명효릉에 제사를 지내는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서,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킨게 아닌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청나라의 황제가 왜 명나라의 개국황제인 주원장의 능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일까요?

 

 

게다가 당시 "주삼태자(朱三太子)"가 홍의대포(红衣大炮)로 강희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스스로 좋은 틈을 타서 일을 만들어보려고 하였으나, 위동정(魏东亭) 사람에게 들켜 주삼태자는 실패하였다고 하네요. 게다가 쯔진산의 사찰에서는 은 300여만 냥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주원장이 묫자리를 이곳으로 선택한 것은 유백온(刘伯温)의 건의를 들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백온은 제갈량과 함께 명성이 높은 총명한 사람이었는데요, 천문 지리에 밝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묫자리를 고를 때 그가 쯔진산에 하시라고 권고한 것은 그곳이 풍수가 뛰어나고, 진짜 용혈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 안장되면 명나라가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명효릉(明孝陵) 능궁(陵宫)과 보성(宝城, 제왕 묘지를 둘러싼 벽돌담)은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备左青龙、右白虎、前朱雀、后玄武)의 풍수사상을 갖추고 있는데, 효릉의 삼도방어하천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형태로, 풍수에서는 관대수(冠带水)가 되어 보기 드문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주원장이 이렇게 능묘의 위치를 선택한 것이 바로 풍수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명나라 개국 제왕으로서 풍수를 중시하는 것은 정상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이 명당임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양대(梁代)의 민풍보지(民风宝志) 선사(禅师)와 사제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원장은 사실 동한(东汉) 때 제갈량, 손권(诸葛亮、孙权) 등이 이곳을 용반지지(龙蟠之地)라고 불렀던 점을 더 많이 고려하였다고 합니다.

 

 

주원장은 금릉(金陵)의 용맥(龙脉)을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종산의 남쪽에 자신의 제릉을 조성하고, 종산의 뒷쪽에는 배장공신을 두어 자신의 신하들이 죽은 뒤에도 자신을 호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원장은 선사(禅师)의 묘를 옮겨 능묘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능묘가 조성된 이듬해, 마황후(马皇后)가 죽자, 그 무덤에 묻혔습니다.

 

 

마황후의 시호는 효자(孝慈)였는데요, 후궁을 다스리는 것을 자효(慈孝)로서 다스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원장의 능을 효릉이라 불렀는데,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후에 마황후와 합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원장이 효릉에 묻힌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효릉이 조성된 이후, 안쪽에서 1000여 마리의 꽃사슴을 길렀고, 1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으며, 담장 둘레가 45리 길이에 이를 정도로 능묘는 사치스러웠습니다. 능묘 안에는 부장품이 풍부할 수 밖에 없지만, 고고학자들은 명효릉의 지하 궁전은 온전하며 도굴된 흔적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원장의 능묘는 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원장의 살기가 너무 강해서 도굴꾼들조차 업보를 받을까봐 경원시한다고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근거없는 속설일 뿐이며,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구체적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 효릉을 도굴하기는 어려운데 그 난이도가 어느정도인가?

 

 

명효릉은 산을 가로로 뚫어 내부에서 공간을 파내어 현궁(玄宫)을 지었는데, 이러한 횡혈(横穴)방식의 건축공사는 매우 대단하며, 매우 견고합니다. 무덤을 열기 위해서는 다이너마이트가 없으면 불가능하며, 이렇게 기사사 등등한 능묘를 폭파하는 것도 도굴꾼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명효릉의 묘도(墓道)는 한가운데가 아니라 옆쪽에 있어서 많은 도굴꾼들이 허탕을 치게 하였습니다. 주원장 능묘의 지궁의 봉분 위에는 봉토된 흙이 있고, 봉토에는 대량의 자갈이 있어서 만약 지궁을 파헤치려고 한다면, 대량의 자갈이 떨어져내려와 길목을 막게 됩니다.

 

 

 

 

 

 

둘째, 주원장이 명효릉에 묻힌 이후, 명나라 두 번째 황제 주윤문(朱允炆)은 천 명의 영위들을 파견하여 명효릉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 영위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각지의 군대와 중국에서 선발된 엘리트들 중 엘리트들이었다고 합니다. 명효릉에는 아직도 500명의 대열이 밀착 보호를 하고 있는데, 후에 주체(朱棣)가 북경으로 천도하였을 때도, 명효릉에 필요한 보호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셋째, 청나라가 된 후에도, 왜 아무도 이 묘를 도굴하지 않았을까요? 주원장은 평민 출신으로 천하를 얻었고, 황제가 되고 난 후에도 간신을 응징하고 악을 물리치는 등, 백성을 사랑하고 바른 정치를 하였던 좋은 황제였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청나라가 말 위에서 얻어진 천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주 팔기 자제들은 입관(入关, 중국 관내로 들어가다) 후, 자연히 한인(汉人)들을 자신들에게 복종하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청나라 황제들은 명나라 왕조 13릉과 주원장의 효릉에 대해 필요한 보호조치를 취하고, 황릉을 도굴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고 명문화하였습니다.

 

 

홍수전(洪秀全)이 남경(南京)을 공략하였을 때도, 감히 효릉만큼은 건드리지 못하고 공손히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 후 민국 시기가 된 후, 손중산은 제일 먼저 명효릉에 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주원장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朱元璋的明孝陵600年来为何无人敢盗呢 (baidu.com)

 

朱元璋的明孝陵600年来为何无人敢盗呢

1997年考古学家对朱元璋的陵墓进行勘察,竟没有丝毫被盗过的痕迹;孙殿英如此大胆为何也不敢碰呢? 其实我们纵观古代帝王的陵墓大多都有被盗过的痕迹,朱元璋作为大明开国皇帝,墓葬中

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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