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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희태후의 총애를 받던 태감총관(太监总管) 소덕장(小德张)의 화려한 일생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어느날, 자희태후의 총애를 받던 태감총관(太监总管) 소덕장(小德张)이 갑자기 유용령(裕容龄) 격격(格格, 만주족 공주를 일컫는 말)의 귀에 대고 한 마디 말을 하였습니다. 격격은 버럭 화를 내며 손을 들어 소덕장의 뺨을 때리고는 화를 내었습니다. "이 뻔뻔한 놈아, 너도 내가 누군지 안 보이는 것이냐! 네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알고있는 것이냐!"

소덕장(小德张), 본명은 장덕(张德)이며, 궁내태감(宫内太监) 서열은 "란(兰)"으로, 일명 장란덕(张兰德)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자희 태후는 "항태(恒泰)"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청나라 말기의 마지막 태감총관(太监总管)이었습니다.
<주향공화(走向共和)>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 중에 소덕장의 캐릭터가 있다고 합니다. 소덕장의 일생은 청나라의 멸망을 증언하는 시대의 증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청나라 말년에 자희 태후의 신임을 얻었고, 자희와 광서(光绪) 사이의 관계를 적절하게 균형잡았으며, 자희 태후가 총애하는 격격의 눈에 들었고, 그의 수완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이 전설적인 태감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는 기사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희 태후 주변의 유능한 태감하면 이연영(李莲英) 혹은 안덕해(安德海)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사실 자희 태후의 곁에 있다는 것은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며, 부유하기가 나라에 비견할 만한 사람인데요, 그가 바로 소덕장이라고 합니다.
소덕장은 어렸을 때 집이 가난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큰 길에서 부자를 만났고, 그 부자에게 크게 야단을 맞고 집에 돌아왔죠. 그는 질투심에 불타 어머니에게 무엇을 하면 돈이 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태감을 하면 된다."고 내뱉었습니다. 소덕장은 결국 정말로 스스로 거세를 해버렸죠.
1888년, 12세의 소덕장은 궁에 들어가 태감이 되었습니다. 4년 후, 출세하기 위하여 연극을 좋아하는 자희 태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덕장은 경극을 배우러 갔습니다.
남자 무사 역할로 분장한 탓인지, 평범한 태감들보다 훨씬 남성다워보였습니다. 이러한 역할 덕분에 관객들에게 태감과는 다른 기질로 남다른 위상을 가져보이게 하였죠.
그 후, 한 번의 공연에서 소덕장은 작은 실수 덕분에 오히려 자희 태후에게 기억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궁중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북경성에 쳐들어오자, 자희 태후는 황급히 도망쳤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궁녀들과 태감들은 당황하였지만, 오직 소덕장만이 침착한 모습으로 자희 태후의 곁을 지켰습니다.
소덕장의 고향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번은 억수같은 장대비가 내려서 차가 진흙탕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덕장은 자희 태후를 업고 길을 걸었습니다. 자희 태후는 "내 친 아들도 이렇게 효도하는건 아닌데 네가 이렇게까지 효도를 하는구나."라고 무척 칭찬하였고, 이때부터 소덕장은 자희 태후의 수양아들로 자처하였습니다.

일의 진위를 막론하고, 어쨌든 그 후로 소덕장은 벼락출세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분을 잊은 채 하마터면 선을 넘을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자희 태후 곁에는 특별히 총애하는 몇몇 격격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중국 근현대 무용 역사상 최초로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일본 무용을 배운 중국인이었습니다. 바로 유용령(裕容龄)이었죠.
유용령은 정백기 한군 기인(正白旗汉军旗人)이었는데, 6살 때부터 외교관에 해당하는 관직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프랑스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동시대에는 일본과 프랑스의 선진 문화가 유용령에게 문화적 깨우침을 주었고, 그녀의 성격도 활발해졌습니다.
유용령에게는 언니인 유덕령(裕德龄)이 있었는데, 후에 <내가 자희 곁에있던 2년>이라는 책을 써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두 자매의 경력이 모두 일찍이 외국에서 생활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하네요.
1903년에 귀국하여 자희 태후의 부름을 받은 자매들은 태후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았고 곁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용령은 14세였습니다. 이 당시에 격격들은 일찍이 시집을 갈 나이였고, 유용령에게도 막 첫사랑이 싹트기 시작하였죠.

그렇습니다. 유용령의 첫사랑 상대는 바로 소덕장이었습니다.
소덕장은 유용령보다 나이가 13세나 많았고, 궁중에서 닳고 닳은 그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용령에게 인기가 있는 것도 정상이었다고 하네요. 소덕장은 궁중에서 공연을 했었고, 유용령의 가장 큰 취미가 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취향은 어느정도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호감도 생겨난 것이겠죠. 4년 동안이나 썸을 타던 소덕장은 어느날 유용령의 귀에 대고 "당신에게 장가들고 싶습니다."라고 대담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유용령은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며 소덕장을 호되게 뿌리쳤고, 따귀를 한 대 갈겼습니다. 이로써 이 썸은 끝이 나버리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유용령의 마음 속에는 이 호감이 그저 순수한 것이었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상처받은 관계 때문인지 몰라도, 소덕장의 삶은 뒤틀려버렸습니다. 청나라가 망한 후, 소덕장은 뒤로 물러나 텐진(天津)으로 달려갔고, 22년간의 궁정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4명의 아내를 얻으며 호화판 생활을 하였으며, 유언비어도 나돌았습니다.
텐진에서의 나날 동안 그는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살았는데, 집에는 집사, 회계담당자, 요리사, 잠역부, 하녀, 그리고 그가 궁에서 데리고 나와 자신을 전문적으로 섬기는 몇 명의 소태감(小太监)들도 있었고, 매우 한가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특히 자희 태후와 광서 황제가 긴박한 형세에 처해 있을 당시, 소덕장은 구금된 광서 황제에게 매일 밥을 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희 태후는 웬만한 음식이면 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요. 그러나 눈치 빠른 소덕장은 광서 황제의 재기를 두려워하여 매번 슬그머니 음식을 바꿔주었습니다.
이때의 광서 황제는 새장 속에 갇힌 짐승이나 다름없었는데요, 한 태감의 따뜻한 마음에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비록 결국 광서 황제의 결말은 우울하게 끝나버렸지만, 소덕장의 균형잡힌 술수 덕분에 그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융유황후(隆裕皇后)에서 태후가 되자, 옆에서 극진히 보필하던 그는 대내총관(大内总管)이 되었고, 융유태후가 병사한 이후, 그 역시도 자유를 얻었습니다.

1950년대 소덕장의 가산이 몰수되자, 그는 튀김과자를 팔아 생계를 꾸리다가 8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이연영이 참수되었던 것에 비하면 소덕장은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출궁한 후부터, 소덕장은 옛일은 잊고 옛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과거의 영광과 고난은 모두 이루말할 수 없는 이야기로 변하였습니다.
유용령은 총애받던 무용수였지만, <청궁쇄기(清宫锁记)>라는 한 편의 소설을 쓰면서 인생에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십 년의 고달픈 시간 동안,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죠.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정갈한 우아함을 유지한 채 무사히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때 그녀가 때린 따귀는 그를 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분명, 그것은 세속과 규례에 용납되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이죠.

진실은 그 두 사람만이 알겠지만, 이렇게 이들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생활을 유추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清朝最后一位太监总管,受慈禧宠信,与格格恋爱,富可敌国得善终 (baidu.com)
清朝最后一位太监总管,受慈禧宠信,与格格恋爱,富可敌国得善终
一日,慈禧太后宠信的太监总管小德张,突然附在裕容龄格格的耳边说了一句话。格格勃然大怒,抬手就给了小德张一个耳光,怒斥道:“混账东西,你也不看看我是谁!你自己是男是女清楚吗
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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