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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간 이어져 온 제염(制盐) 마을이 몰락해버린 이유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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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간 이어져 온 제염(制盐) 마을이 몰락해버린 이유는?

hanyuku 2022. 6. 6.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 충칭(重庆) 땅에는 커다란 산속 깊은 곳에 한 작은 마을이 있는데요, 산수(山水)는 서로 의지하며 있지만, 인적은 묘연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미 20년 전에 거의 다 이사를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한때 번화했던 마을은 100호도 안 되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요?

 

 

닝창구진(宁厂古镇)은 우시현(巫溪县) 북면 18킬로미터 지점에서 동서로 향하는 작은 산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골짜기 안에 흐르는 강은 바로 허우시허(后溪河)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외부인들만이 부르는 이름이고, 현지인들은 "샤오허(小河, 작은 강)"라며 친근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 강의 흐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며, 닝창구진 주변을 둘러싼 산수 경계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좁고 긴 강기슭을 따라 분포되어 있는데, 읍내의 집들은 대부분 작은 강의 남쪽 강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작은 마을의 생활 공간은 매우 작았고, 많은 집들이 언덕 위에 세워져있었죠. 이러한 조건 하에서 자연스럽게 거리도 사치스러워지고, 일반적으로 도로도 매우 좁아졌습니다. 현존하는 도로는 적어도 30~40년 전에 포장된 것이라고 하네요. 최초의 시기에는 평탄하고 큰 길은 없었고, 작은 마을 전체가 매우 콤팩트한 번화가의 축소판이었다고 합니다.

 

 

 

 

우시현은 모두 8개의 구로 나뉘어 있는데, 닝창구진은 제 2구로 나뉩니다. 닝창진(宁厂镇)의 중심은 헝자젠(衡家涧)으로 불리고, 현지인들 말로는 헝자간(衡家赶)으로 발음하였습니다. 2구 행정사무소에는 관리가 주재하며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고장은 여전히 경치가 아름답고 수려합니다. 그 사이로 작은 강이 허우시허와 따닝허(大宁河)가 만나는 지계(地界)에 굽이쳐 흐릅니다. 작은 강은 작은 마을의 사방을 둘러싸고 흐르는데, 맑고 그윽하며 푸른 물이 산수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물은 구경만 할 수 있을 뿐, 마실 수 없는 물이라고 하네요.

 

 

충칭의 우시현을 흐르는 작은 강의 위쪽에는 따닝챠오(大宁桥)라는 돌로 만들어진 판교가 있고, 다리 끝에는 큰 돌사자가 두 마리씩 있는데, 눈은 언제부터인가 벽돌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그 다리 위에 서면 한쪽에 흐르고 있는 따닝허(大宁河)를 볼 수 있습니다.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아직 무너지지 않은 일부 다층집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여주듯, 한때는 닝창구진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거의 폐가촌에 가까워졌고, 100호도 채 거주하고 있지 않습니다. 폐가 건물들 맞은편 큰 산 사이에는 잔도(栈道)가 하나 이어져 있는데요, 잔도도 황폐화되었지만, 잔도 아래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습니다. 이 구멍들은 대체 무슨 용도였던 것일까요?

 

 

 

 

 

원래 이 구멍들은 소금물을 운반하는데 쓰이는 지하도였다고 합니다. 1960년대, 개량된 제염공장이 있었던 이곳은 오늘날 철책 너머로 충칭시 중점문화재 보호단위에서 준 "제염 작업장(制盐作坊)"의 작은 비석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제염 공장은 바로 따닝 공장(大宁厂)으로, 총 3개의 제염 공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제3 공장의 모습만 보존 정도가 양호하다는데요, 이곳에는 소금을 끓이는 장작 아궁이와 석탄 아궁이도 볼 수 있습니다. 도로변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데, 바로 연탄을 사용하는 작업장에서 석탄재를 배출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옛날 염장에서는 소금을 만들 때 땔감을 많이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석탄 자원이 그리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풍부한 마른 장작을 사용했었습니다. 특히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인근 산의 숲이 소금 제조에 필요한 주요 원료가 되었죠. 닝창구진 부근의 산에는 나무가 모두 컸기 때문에 벌채하여 연료료 사용하다가 1980년대에 민둥산으로 전락하자, 후손들이 인공적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무들은 가지와 줄기가 가늘고 수령이 적음을 알 수 있죠.

 

 

이후 서서히 발전한 후에 닝창구진에서 비로소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작은 마을인데다 외진 곳에 있고, 육로가 불편하였기 때문에 소금을 굽는데 사용할 석탄은 모두 수로 선박을 통해 운반되었습니다. 이때 큰 배는 대부분 목선으로 평균 적재량이 4톤 정도였고, 깊이는 1미터도 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강의 깊이가 부족하여 사람들은 인공 수로를 더 깊게 팠고, 석탄선의 왕래를 위해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상류에 수력발전소가 세워졌고, 하천의 수위는 더욱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허우시허에도 다리가 하나 있는데요, 이것은 철교는 아니지만, 이렇게 산수로 둘러싸인 마을에서는 이런 다리도 빠질 수 없는 '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강 하나에 네 다섯개의 작은 다리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베이안(北岸)이라는 현수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면 작은 마을의 정가(正街)가 나오는데, 길 위는 석판이 깔려 있어서 노면이 깨끗하지만, 양쪽에 민가가 빽빽히 늘어서 있어서 이 길은 현재로서는 좁은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 작은 도시에는 사람이 살고는 있지만, 100명도 채 안 되는 인구인데다,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원주민이 아니라 산골짜기에서 내려와 이주한 경우라고 하네요.

 

 

메인스트리트 한 쪽에는 커다란 붉은색 오각 별이 박혀 있고 청벽돌(青砖)로 지어진 모퉁이 건물이 있는데요, 이곳은 원래 닝창구진의 '공급 판매 협력사(供销社)'라고 합니다. 현재는 "충칭시 훌륭한 역사 건축물"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고 하네요. 이 건물의 옆에는 골목길이 붙어있고, 골목길에도 석판이 깔려 있습니다. 그 끝에는 돌계단이 있어서 올라서면 아치식 문구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문구멍은 매우 세월감이 느껴집니다. 그곳을 지나면 둥그렇게 둘러쳐진 채소밭이 있고, 그 주변의 벽돌담은 얼룩덜룩하게 이끼가 끼어 있습니다. 제철을 맞이하면 파릇파릇한 채소밭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곳은 한때 읍내 곡물 창고였고, 사방에는 옛날에 사용되었던 직원들의 숙소도 보입니다.

 

 

 

 

 

작은 마을의 안에는 칠리반변가(七里半边街)라는 마을길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한 쪽변에만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다른쪽 변에는 작은 강이 흐르며, 강을 사이에 둔 맞은 편에는 험준한 고산(高山)이 펼쳐져 있습니다.

 

 

중심가 뒷편에는 가지런히 수상 가옥들이 늘어서 있는데요, 이 수상 가옥들의 뒷면은 녹색 담쟁이 덩굴이 깔려 있어서 매우 운치있어 보입니다. 현지 마을 주민의 소개에 따르면, 1980년대 이전에는 닝창구진에 많은 수상 가옥들이 있었는데, 이런 수상 가옥들이 모여있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백 명의 화가들이 마을에 모여 그림을 그리며 사생하는 등 수많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아름다웠던 풍경이 스러져버렸고, 모래바람과 습기를 거치면서 기둥이 파손되어 폐가가 되어버렸고 더 이상 이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연결시키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수상 가옥들 부근에는 클럽 터가 이어져 있는데, 옛 터의 벽돌 구조를 근거로 보아 1960년대의 산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이 "클럽"은 이미 벽이 반쯤 허물어져 남아있고, 지붕의 형태였던 것들로 추정되는 것만 남아있습니다. 일찌감치 무너져 사라지고 퇴락한 연극무대와 텅 빈 객석만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클럽과 멀지 않은 곳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들이 있는데요, 부지의 면적을 보면 상인들의 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벽들이 허물어지고 형태가 훼손되었지만, 규모와 건물의 골격으로 보아 큰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지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옛날에 현지에서 제염업이 흥성했을 때 부자들이 살다가 쇠락하여 옛날의 부흥했던 시기의 흔적만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해방 이전에, 일찍이 닝창구진의 제일 가는 부자였던 상씨 집안(向家)은 소금 제조를 하였었는데, 일찍이 소금을 끓이는 다섯 개의 아궁이와 일곱 개의 소금 제조용 바구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를 일컬어 "오조칠농(五灶七笼)"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상씨 집안은 우한(武汉)에더 여러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히 요즘 말로 재벌이라고 할 수 있었죠. 주인집에는 적어도 십여 명의 보디가드가 동행하였고, 집주인에게는 각각 '셔, 지앙, 마오(佘、蒋、毛)'성씨를 가진 세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중 지앙씨 부인은 줄곧 닝창구진에서 살다가 7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집안의 화려함은 사라져버리고 옛집의 규모에서만 약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인데요, 집의 대부분은 이미 침식되어 누더기가 되어버렸고, 집안의 뒤쪽으로는 소금 작업장이 있는데, 작업장의 규모와 비교적 흔한 소금 작업장 기구 설비들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원의 영향을 떠나서, 어떤 사람들은 산수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사는 생활은 실제로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며, 사방의 산들이 항상 사람들에게 매우 억압적인 느낌을 주기 쉽다고도 합니다. 크고 웅장한 산들이 둘러싸인 곳에서는 대부분의 햇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아침 9시 이후에야 비로소 태양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저녁 무렵에는 늦은 밤처럼 금세 어두워져버리죠. 다리 너머로 보이는 폐건물들도 20~30년 이상 방치되어 있고, 다른 폐건물들의 보존 정도와 비슷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따닝챠오를 따라 7리쯤 되는 길을 쭉 가면, 양쪽에 폐건물들이 길게 이어져 있고, 무너진 가운데서도 웅장한 기백이 드러나 있어 오가는 손님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다리 끝까지 가면 양족에 잡초가 우거진 도로가 나오고, 도로 근처에도 허름한 누더기 건물이 있는데, 마치 거지가 가슴을 펴고 앉아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도 놀라운 느낌을 준다고 하네요.

 

 

이렇게 산과 물을 끼고 있는 지계에 있는 이러한 건물들은 마치 산굴에 숨바꼭질하듯 박혀있는데요, 한때는 10만 명의 사람들이 세상 밖 무릉도원을 방불케 하는 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70년 정도가 흐른 후, 이제 이곳에는 70~80 가구만이 남아, 상전벽해의 쇠락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과 창문이 낡고, 지붕과 벽은 푸른 이끼로 가득 차 인기척이 없고, 다리 밑과 도로 옆 돌 틈 사이로 이따금씩 희미한 담뱃불만이 피어오를 뿐이죠.

 

 

이곳은 어쩌다 이렇게 쇠락하게 되었을까요?

 

 

 

 

 

풍부한 자원이야말로 이곳을 천지개벽하게 만든 원인입니다. 모든 것은 바로 이곳에서 염천자원(盐泉资源)이 발견될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죠.

 

 

작은 읍내 북쪽 바오위안 산굴(宝源山洞)에는 샘이 하나 있는데, 소금샘이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 소금샘의 유량은 연간 16,000톤으로 기록되어 있고, 소금샘이 발견된 이후부터 현지인들에 의해 제염, 운송되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고, 닝창구진의 제염사는 4~5천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夏)나라 때부터 제염업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규모와 기술이 원시적이었기 때문에 염천자원의 소모가 크지 않았었고, 송(宋)나라 시기에 이르러, 당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대녕감(大宁监)을 설치하고 세금을 거두었는데, 그 작은 마을들은 국가에 부지기수로 염세(盐税)를 바쳤습니다. 그것에서 알 수 있을 정도로 제염업이 번창하여 수확이 많았었고, 명청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10대 염도(盐都) 중 하나로 성장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소금샘에 의지하여 풍족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해방전기까지도 이곳은 산간벽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불안정한 시국도 전란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여전히 소금을 만들고 자원을 채집하며 생활하였으며, 외지인들이 대거 몰려와 장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이곳에 공장을 지어 제염업에 뛰어들었고, 서서히 일용직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이후 사회 시국의 영향으로 많은 사설 소금 공장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집단 염장, 즉 따닝창(大宁厂)이라 불리는 곳을 이뤘죠. 따닝창은 처음에는 잘 운영되어 60~70년간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발히 운영되었습니다.

 

 

 

 

 

 

1990년대까지 이어진 제염 공장들은 아무런 예고 없이 파산하였고, 염천 자원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현지인들의 주요 경제원이 끊겨버리자, 하루아침에 이 마을은 노쇠해버렸고, 이 마을은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닝창구진은 수천 년 동안 제염업으로 살아왔는데, 작은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인 험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농경지도 없었고, 다른 부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집단 염전이 파산한 이후 마을 주민들은 유일한 경제적 원천과 발전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생계에 허덕이던 이곳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농민들처럼 결국 외지로 나가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고,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일하러 가게 되었죠. 이렇게 해서 이곳에는 사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졌습니다. 현지에는 변변한 학교도 없고, 학교 건물도 민가로 전락하였고, 건물 전체에 단지 한 가구만 남게 되었습니다. 슈퍼마켓도 없고, 심지어 의사도 없었습니다. 병원과 진료소를 대신한 작은 진료실마저 지금은 엉망진창이고, 누더기가 된 문패와 약장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 생활 부대 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유일하게 수돗물과 전기만이 공급되어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네요.

 

 

 

 

 

닝창구진의 흥망성쇠의 궤적을 보면, 염천 자원과 제염업으로 수천 년 동안 빛내다가 완전히 몰락하게 된 것은 시국의 영향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지금과 같은 광경을 연출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인간의 부족합이라고 합니다. 닝창구진에 사는 사람들은 "산에 기대어 산으로 먹고 살고, 물에 기대어 물로 먹고 산다."는 옛 생존법칙을 따라 생활할 수 있었고, 풍부한 염천 자원으로 대대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스러운 근성은 그들이 끊임없이 이 지역의 염천 자원을 개발하게 하였고, 투자 유치에 미쳐 이러한 행위가 미래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이 자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자원이 소진되고 나면 더 이상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도 말이죠.

 

 

결국 광란의 채광제염은 오랜 영광을 누려온 마을의 쇠락을 가속화하였고, 자원이 고갈되자 제염소들이 도산하였으며, 주민들은 고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사라졌습니다. 불가피한 생활고 때문에 결국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떠나게 되었고, 쾌적했던 제염 공장 사장에서부터 떠돌이 일꾼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수도와 전기밖에 들어오지 않는 폐촌이 되어 버려 마땅한 삶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죠.

 

 

 

 

고향의 땅이든, 산수 자원이든, 선조들이 후대를 위해 보존해 온 자산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생산과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후대를 위해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을 사랑하고 미래 후손들에게 귀중한 자산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10万人的盐都小镇仅剩80人,辉煌了几千年仅40年就没落,为何? (baidu.com)

 

10万人的盐都小镇仅剩80人,辉煌了几千年仅40年就没落,为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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