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yuku
이소룡과 샤오이푸(邵逸夫), 쩌우원화이(邹文怀) 세 사람 사이에 얽힌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인 세계 최초의 쿵후 톱스타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이소룡(李小龙)일 것입니다. 현재 우징(吴京)의 총 흥행은 200억 위안이 넘지만, 전 세계에서 영향력을 따져보면 여전히 이소룡이 1위입니다. 이소룡은 단순한 쿵후 스타가 아니라, 무술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이소룡이 창립한 절권도(截拳道)는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소룡 역시도 자신의 무술에서 자신만의 인생 철학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이소룡의 인생은 현란한 불꽃과도 같았고, 그는 빠르게 폭발하고는 떨어졌죠. 1973년, 33세의 이소룡이 여자 스타 딩페이(丁佩)의 집에서 사망한 일은 전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소룡을 말하자면, 두 사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는데요, 하나는 샤오이푸(邵逸夫), 또 다른 하나는 쩌우원화이(邹文怀)입니다. 샤오이푸와 쩌우원화이는 홍콩 영화계의 두 개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두 사람은 오랜 라이벌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이루말할 수 없다는데요, 그 폭발점이 바로 이소룡에게 있다고 합니다.
샤오이푸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큰 자선사업가로 비쳐지고, 사람들의 인상에는 자선사업가라면 대범해야 하지만, 샤오이푸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샤오이푸는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는데요, 얼마나 인색했던지 샤오이푸의 아들이 납치되었을 때도,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의 몸값을 절대 주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도망칠지언정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샤오이푸는 일생 동안 수십억 위안을 기부했지만, 그의 직원들에게는 인색한 것으로 홍콩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샤오이푸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감독이나 배우나 모두들 같은 직원일 뿐, 다른 직종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당시 덩추이원(邓萃雯)은 나는 무척 유명하지만, 무척 가난하다고 불평하였다고 할 정도라네요.
홍콩의 많은 스타들이 유명해보이지만, 가난하게 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샤오이푸에게서 시작된 전통이라고 합니다. 샤오이푸는 당시 영화사를 차리고 방송국을 하는 것도 이러했는데요, 그는 직원들에게 적은 월급을 주면서 긴 계약까지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샤오이푸는 그 당시에도 이렇게 인색하게 굴다가 큰 실수를 저질러 결국 이소룡을 놓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1970년, 할리우드에서 성장이 좌절된 이소룡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이소룡은 할리우드에서 10여 편의 영화를 촬영했지만, 반응은 미온적이었죠.
하지만 무술계에서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이소룡이었고, 그는 여러 차례 무술 고수들에게 도전하여 승리하였던 바가 있습니다. 이소룡은 홍콩으로 돌아간 뒤 자연스럽게 샤오스(邵氏) 영화사와 호흡을 맞추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샤오이푸가 운영하던 샤오스 형제(邵氏兄弟)는 홍콩 영화의 절반을 독점하고 있었던 큰 영화사였기 때문입니다.
샤오이푸는 20대 초반부터 영화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상하이에서 부터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으로 이어져왔습니다. 당초 홍콩 영화 시장의 가장 큰 영화사는 뤼윈타오(陆运涛)의 마오예 그룹(懋业集团)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력이 풍부한 뤼윈타오는 당시 대만에서 항공 사고로 사망했고, 샤오이푸는 운이 좋게도 일이 생겨서 대만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해서 화를 면했습니다.
뤼윈타오 사망 이후, 샤오이푸는 홍콩의 영화시장을 독식했습니다. 이소룡은 홍콩으로 돌아온 뒤 첫번째로 샤오이푸를 찾아가 협력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샤오이푸 역시 이소룡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당시 홍콩 영화의 최고 장르는 무협영화였는데요. 이소룡은 무술 고수였기 때문에 잠재력이 결코 작지 않았죠.
이소룡은 영화 한 편당 1만 달러의 출연료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동시에 이소룡은 샤오이푸에게 회사의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더 큰 권한을 갖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소룡이 제시한 두 가지 조건은 샤오이푸에게 모두 통하지 않았습니다. 샤오이푸는 이소룡에게 2500달러의 출연료만 주겠다고 하였고, 이것은 이소룡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무척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샤오이푸와 이소룡의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쩌우원화이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에 쩌우원화이노 샤오스에서 일했었는데요, 샤오스가 굴기(崛起)하던 당시 쩌우원화이의 공헌도 적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샤오이푸의 오른팔이었으며, 샤오스에 대한 애정도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쩌우원화이는 자신의 수입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며 샤오이푸에게 자신의 수입을 올려달라고 부탁했지만, 결국 샤오이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쩌우원화이는 샤오스에서 대규모의 인원을 데리고 떠나 따로 회사를 차렸는데, 바로 이것이 자허 영화사(嘉禾电影)였습니다. 자허는 첫번째 영화 <독비도대전맹협(独臂刀大战盲侠)>으로 흥행에 성공하였습니다. <독비도(独臂刀)>는 원래 샤오스의 간판이었으나. 지금은 자허에서 슬쩍해갔으니, 샤오이푸는 자연히 불만스러워했고, 쩌우원화이를 고소했습니다.
쩌우원화이는 소송에서 져서 10만 위안을 샤오이푸에게 배상하였습니다. 이어서 쩌우원화이는 몇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는 쩌우원화이 역시 실의에 빠져있던 시기였는데, 쩌우원화이는 마찬가지로 실의에 빠져있던 이소룡과 마주치게 되었고, 두 사람은 함께 박자를 맞추게 되었습니다.
쩌우원화이는 이소룡에게 7500달러의 개런티를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이소룡을 단순히 배우가 아닌, 영화 제작 과정에 더욱 깊이 관여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쩌우원화이는 이소룡을 중시하였고, 결국 쩌우원화이는 훗날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소룡을 빼앗는데 성공했습니다.
샤오이푸는 그렇게 7500달러를 아끼려다 이소룡을 놓쳤고, 결국 자신의 영화 사업도 실패로 몰고 갔습니다. 1971년, 쩌우원화이가 이소룡과 합작한 첫 영화 <당산대형(唐山大兄)>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글며 그해 홍콩 최고 320만 홍콩달러의 흥행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이소룡을 월드스타로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허 영화사를 다시 살려냈습니다. 이 영화 이전에는 이런 현대 격투기 영화는 거의 없었고, 과거 무협 영화를 찍었던 이소룡이 영화에서 보여준 격투기법은 더욱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샤오이푸는 이때도 후회막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이소룡에게 연락하였지만, 그때 이소룡은 샤오이푸를 단호히 거절하고 쩌우원화이와 계속 호흡을 맞췄고, <정무문(精武门)>과 <맹룡과강(猛龙过江)>을 촬영하여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화 한 편 한 편 더욱 전작보다 높은 흥행 기록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국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영향력 역시 커졌습니다.
쩌우원화이는 샤오이푸의 교훈을 받아들여 감독과 배우들을 중시하였는데, 쩌우원화이는 이후 뛰어난 영화인들과 함께 많은 배당을 받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홍금보, 성룡 등은 모두 쩌우원화이와 함께했습니다. 당시 자허는 산하에 많은 위성 회사(卫星公司)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위성 회사들은 모두 쩌우원화이와 대스타들이 함께 합작하여 설립한 것들이었습니다.
1973년, 이소룡의 <사망유희(死亡游戏)>의 촬영이 채 완료되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사망한 것은 쩌우원화이와 샤오이푸에게 또 한번의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샤오이푸는 기회를 잡지 못했고, 쩌우원화이는 패배를 당하지 않았죠.
이소룡의 성공으로 경험을 얻은 쩌우원화이는 홍금보, 성룡, 이연걸 등 세 명의 쿵후 스타들을 잇달아 발굴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쩌우원화이가 스타들에게 수익금을 배분해주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톱스타들이 속속 자허 영화사로 옮겨가고 있었죠. 결국 샤오스는 샤오이푸 때문에 인색하게 굴다가 1987년에 영화 생산을 그만두었습니다. 이후 샤오이푸는 TV로 시장을 옮겨서 TVB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TVB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잔꾀를 이어가고 있었죠. 오늘날 TVB도 이제 사양산업이라고 합니다.
만약 샤오이푸가 이소룡을 데려왔다면, 이소룡의 영향력 덕분에 샤오스는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고, 샤오이푸는 적어도 백억 위안은 더 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샤오이푸는 너무 인색하여,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실패로 치닫게 되었고, 오늘날 TVB의 발전도 미흡하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为省下7500元错过李小龙,邵逸夫后来少赚百亿,还让公司陷入停产 (baidu.com)
'China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세에 자수성가하여 백만장자가 된 왕치청(王麒诚)의 인생 스토리 (0) | 2022.03.22 |
---|---|
최근 중국 온라인상에서 뜨거운 화젯거리가 된 성룡과 찍은 사진 한 장! 대체 무슨 일이길래...? (0) | 2022.03.21 |
중국식 패스트푸드 "향촌기(乡村基)"를 설립한 리훙(李红)의 인생 스토리 (0) | 2022.03.17 |
베이징대 학생 식당에서 공부벌레들의 흔한 풍경 (0) | 2022.03.16 |
117세까지 장수한 양밍위안(杨明远)의 장수 비결은?! (0) | 2022.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