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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 이홍장(李鸿章)의 재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화신(和珅)은 청나라의 최대 탐관오리로서, 영원히 욕을 먹는 이름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데요, 사실 이홍장(李鸿章)의 자산도 매우 많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역사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재능에 감탄하기도 하였지만, 그를 매국노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와 공과를 더나서 그가 후대에 남긴 재산만 해도 사람들이 눈에 핏발이 설 정도라고 하네요.
화신의 재산을 몰수한 후, 가경제(嘉庆帝)는 사람을 시켜 그가 소유하고 있는 사유재산과 금은 보석을 집계하였는데, 총 8백억 냥의 은화 가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청나라의 국고 숭비은 연간 7천만 냥에 불과했는데, 화신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15년의 나라 수입과 맞먹을 정도니 가경제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이홍장이 병사하면서 후세에 남긴 사유 재산만 해도 4천만 냥이었고, 비록 그의 재산은 화신의 것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휘청거리던 청나라 말기에 이렇게 많은 재산을 남겼으니 화신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홍장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던 것일까요?
01.
양무운동(洋务运动)은 만청시기의 유명한 자강자립의 개혁으로, 서구 문명을 본떠 그들의앞선 과학기술과 군사장비, 공업 설비등을 도입하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그것을 발의한 사람이 바로 이홍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설립한 초상국, 개평탄광(招商局、开平煤矿) 및 은행 등의 산업에서 그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 자체가 돈줄이었습니다.
양무운동 기간 동안, 이홍장이 주재한 기업들은 거의 독점적인 경영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다양한 업종의 부를 편법적으로 독점하였고, 이러한 사업들에서 이익이 나면 그는 끊임없이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양무운동은 결국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당시에 창설되었던 초상은행, 선박(招商银行、船舶) 등의 실업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홍장의 안목은 비교적 멀리 내다본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홍장은 산업 독점 뿐만 아니라, 뇌물수수까지 저질렀는데요, 만청시대 가장 유명한 두 군대는 증국번의 상군(曾国藩的湘军)과 이홍장의 회군(淮军)으로, 회군은 태평천국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큰 역할을 한 공로로 이홍장에게 더욱 큰 기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청나라 정부의 매우 중요한 인물로 변했으며, 동시에 지위의 상승도 이루어졌고, 이는 그에게 더 많은 편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회군의 크고작은 장수들은 모두 그가 진급하면서 따라서 벼슬을 얻었는데, 군대의 우두머리를 위해 부하 관리들은 그에게 효도하고 섬겼고, 이후 양무운동 기간에는 눈치빠른 상인들이 이익만을 도모하기 위해 앞장설 때에도 한때의 선전을 베풀어 큰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홍장에게도 많은 사유재산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청나라 말기 관리들의 횡령은 거의 일상적이었고, 이홍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홍장은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할 당시 러시아 대사와 오랫동안 밀담을 나누고 러시아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이 일은 사실이었고, 나중에도 거미줄을 쳐놓은 것처럼 많이 드러나게 되었죠.
주권을 상실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홍장은 화아도승은행(华俄道胜银行)에서 300루블의 예금을 더 냈고, 나중에 이홍장이 병사한 후 그의 후손들이 러시아측에 약속 이행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중러조약의 일로 뇌물을 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지만, 증거가 있든 없든 리베이트를 먹었다는 죄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부하 관리나 상인들의 뇌물만 받았다면 몰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팔아넘긴 이홍장의 행태는 원망스러웠으며, 평생 매국노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자신은 그 재산을 쓸 복이 없어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02.
이홍장의 재산 액수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후손들으 생활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남겼는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1901년 이홍장이 병사한 후, 그의 재산은 그의 네 아들들 이경방, 이경술, 이경매, 이경부(李经方、李经述、李经迈, 李经溥)에게 남겨졌습니다. 이홍장의 네 아들들도 훌륭하여 정치권은 물론 재계에서도 몸값이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직계 손자뻘은 오히려 모두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로, 집안을 탕진하거나 망하게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이 남겨준 큰 재산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었죠. 이경방이 사망한 이후, 그의 두 아들들인 이후보와 이자가(李厚甫, 李子嘉)가 아버지의 재산을 나눠 가지게 되었는데, 이 액수는 그들이 비록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 살기에 충분한 자산이었습니다.
당시 동생 이자가가 물려받은 부동산만 해도 우후(芜湖)와 상하이의 아파트 각각 한 채씩이 있었고, 이 외에도 1만여 묘(亩)의 임대 부동산이 있었습니다. 상가와 배당금 등은 게산하지 않더라도 이 임대 부동산에서 나오는 수익만으로도 그는 일평생을 걱정없이 살아갈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매달 어머니로부터도 500대양(大洋, 옛날 화폐단위 이름)의 용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이홍장이 물려준 재산은 어마어마했습니다.
03.
시간이 흐르면서, 이홍장의 후손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운명을 겪었고, 세 억만장자의 등장은 이씨 후손들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이가창, 이가경, 이가서(李家昶、李家景, 李家曙)로,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실력있는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이들 3형제는 이홍장의 직계 후손은 아니고, 그의 동생 이소경(李昭庆)의 4대손입니다.
이씨 집안이 현재까지 발전하는 동안, 조상이 남겨준 재산은 이미 매우 적어졌고, 출세하려면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가창, 이가경 형제는 평범한 집안의 형제들로 태어나, 처음으로 홍콩에 공부하기 위해 건너온 지 십여 년 만에 유명해졌고, 지금은 환구제철소(环球钢铁厂), 첩풍 방직날염공장(捷丰纺织印染厂) 등 여러 기업을 거느리고 있게 되었습니다.
1927년생인 이가창 역시 당찬 인물이었는데요, 그는 형들과 함께 홍콩에서 성장하기보다는 싱가포르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는 창업 초기엔 원시림 채광까지 하면서 방직업을 하고, 은행업을 거쳐서 성공한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04.
이홍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인물로, 만청시기처럼 특별한 시기에 국가를 위해 많은 실무를 수행하였고, 동시에 많은 은전을 탐하기도 하였으나, 화신에 비해서는 비교적 총명하였고, 적어도 공공연히 국고를 횡령하진 않았으며, 대탐관도 되진 않았습니다.
그의 공과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고, 이제 후손들 가운데서 인재가 배출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을 욕되게 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지혜를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기사>
清朝比和珅还聪明的人,留下千亿资产,子孙至今都是亿万富翁 (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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