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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의 호화 저택, 기둥 하나에 24억 위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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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의 호화 저택, 기둥 하나에 24억 위안?!

hanyuku 2022. 3. 4.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어떤 집이야말로 "호화 저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틀림없이 국내외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저택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갑부들이 사는 집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베이징 고궁 같은 옛 건축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중국에는 기둥 하나에 24억 위안이나 되기 때문에 세계 최고 부자조차 살 수 없는 호화 저택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혹자는 혹시 이 기둥을 벽돌로 한장 한장 쌓은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하는데요, 그렇지 않으면 대체 왜 이렇게 비싼 것일까요? 사실, 이 건축물이 "호화 저택(豪宅)"이 된 것은 그것만의 독특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집은 역사의 변천과 왕조의 흥망성쇠를 잘 보여주는 집이며, 사실 호화 저택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이름이 있는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바로 "공왕부(恭王府)"라는 곳이죠.

 

 

1. 공왕부의 낙성(落成)

 

 

공왕부는 북경 서성(北京西城)에 위치하고 있는데, 6만 평방미터의 부지에, 3대의 주인을 거쳤으며, 일련의 역사적 변천을 거친 후, 지금은 국가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공왕부의 건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첫번재 주인인 화신(和珅)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화신은 젊은 시절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재능으로 건륭황제의 인정을 받아 건륭제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불과 몇 년 만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万人之上)"의 지위에 올라 황제의 신임을 받는 신하가 되었고, 조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된 기록을 세웠습니다.

 

 

화신이 권력을 장악하자, 그의 야망은 저절로 부풀어올랐고, 그의 욕심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함부로 뇌물을 받아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수중에 막대한 재산이 축적되었죠.

 

 

이때의 화신은 이미 많은 백성들과 동료들의 강한 불만을 샀지만, 황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여전히 그를 신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절대적인 신임은 심지어 황실의 공주를 화신에게 배필로 내주기에 이르렀고, 화신도 반쪽짜리지만 황실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화신에게 큰 기쁨이 되어주었는데요, 왜냐하면 이것 덕분에 자신이 거리낌없이 재물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래에 황제가 이것을 발견하더라도 공주의 체면을 봐서 그를 살려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이 혼사를 축하하기 위해 건륭제는 화신에게 수도 내에 저택을 짓도록 허락하였는데, 1784년 허션은 저택 부지를 선택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그 당시 수도 내의 땅은 곳곳이 금싸라기 땅이었기 때문에 어디를 택하든 틀림없이 좋을 것이 분명하였지만, 허션은 여전히 매우 신중하였기 때문에 많은 풍수대사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엄밀한 계산 끝에 저택의 위치를 스차하이(什刹海) 옆으로 결정했죠.

 

 

듣자하니, 이 땅은 황궁과 마찬가지로 용맥의 비호를 받는 곳이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재물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땅을 얻었으니 화신은 자연히 매우 만족하였는데요, 하지만 이곳은 황무지가 아니라 원래 거주하는 사람들이 2백 가구나 되었습니다.

 

 

 

 

 

화신은 그들을 몰아내고 권세로 사리사욕을 도모하기 위해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결국 이 4만여 평방미터의 땅 안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쫓겨나고 말았고, 그는 돈을 물쓰듯이 퍼부어 이 땅 위에 저택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2. 3대에 걸친 전설적인 주인

 

 

4년에 걸쳐 경성(京城)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저택은 마침내 건립되었습니다.

 

 

이 저택의 호화로움은 근본적으로 화신과 같은 일개 신하가 가질 수 있을만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화신이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자신의 신분을 도외시했다거나, 심지어는 이 저택에 야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건륭제는 그의 이러한 행태를 개의치 않았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그가 이렇게 행동을 개시할 때까지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시기가 늦어버려서 어찌할 수 없을 때를 기다렸을지도 모르죠.

 

 

 

 

 

 

그러가 그가 화신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황자들도 처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습니다.

 

 

건륭황제의 몇몇 아들들은 모두 화신에게 이렇게 황실 권력을 헛되이 허락한 것을 몹시 불만스러워 했습니다. 그래서 장차 누가 즉위하더라도 화신을 꺾어버릴 것을 상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건륭제가 퇴위하고 태자 영염(永琰)에게 황위를 물려주자, 영염은 화신으로 하여금 건륭제의 사후 뒷처리를 맡겼는데, 이후 화신의 죄상이 줄줄이 열거되어 드러났고, 화신의 재산을 몰수하고난 후, 찾아낸 은냥만 해도 무려 8억냥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만큼, 그의 저택은 그가 가진 부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이죠.

 

 

화신이 퇴출된 후, 그의 저택은 영염의 동생 영린(永璘)이 마음에 걸려서, 그는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고, 이 저택을 동생에게 하사했습니다.

 

 

 

 

 

그래서 이 저택은 두 번째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고, "경왕부(庆王府)"라는 호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경왕부는 줄곧 안정되게 계승되었고, 1849년에 경친왕이 당시 황제에 의해 왕부에서 쫓겨나자, 그 저택은 주인이 바뀌어 다시 공친왕 혁흔(恭亲王奕訢)에게 하사되었습니다.

 

 

경왕부는 이로써 다시 "공왕부(恭王府)"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는데요, 혁흔이 이사한 이후, 함풍황제(咸丰皇帝)는 특별히 명을 내려 다시 한번 왕부를 수리하라고 명령하였고, 현재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3.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

 

 

공왕부의 내부는 화신이 살던 시기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꽃과 풀을 모두 신경써서 놓았고, 건축 자재 역시 모두 귀한 것만 사용하였습니다.

 

 

듣자하니, 처음에 화신이 건축하였을 때, 한 수레의 재료에 약간의 흠이라도 있으면 이 수레에 담긴 재료는 모두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보충하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을 추구하였죠.

 

 

 

 

 

 

이렇게 엄청나게 돈을 쏟아 부었으니, 이 곳의 기둥은 모두 값진 금사남목(金丝楠木)을 쓰고 있는 것도 그리 신기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기둥 하나에 24억 위안이라는 값어치가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라는데요, 이런 기둥이 몇 개나 있는 것인지, 또한 이런 귀중한 재료들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 어떤 호화 저택이었든, 청나라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청나라 멸망 이후, 공왕부도 전승이 끊기고, 공적인 곳에서 공매될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것을 사간 곳은 보인대학(辅仁大学)이었는데, 그들이 공왕부를 사간 다음해에 한 교회에서 일부 돈을 내고 보인대학과 함께 공왕부에 학교를 차렸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많은 기관과 주민들이 입주하여 평범한 땅이 되면서 더욱 "서민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역사가 남긴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에, 결국 국가에서 공왕부를 복원하여 그 역사적 가치를 재현시키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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