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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최초의 해저터널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홍콩에는 총 3개의 해저터널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홍콩은 구룡반도(九龙半岛)와 분리되어 있고, 도시계획을 위해 다리를 건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3개의 해저터널을 건설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홍콩은 인구 700여만 명에 집집마다 거의 자가용을 갖고 있고, 홍콩의 많은 회사들이 중심부 일대에 집중되어 있어서, 출퇴근 시간이 되면 해저터널은 엄청나게 붐빈다고 합니다. 이 세 개의 해저터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훙칸(红磡) 해저터널이라고 합니다. 이 터널의 한쪽 끝은 홍콩 훙칸에, 다른 한쪽 끝은 홍콩 코즈웨이 베이(铜锣湾)에 있어서, 가장 좋은 위치의 터널이자, 홍콩에 건설된 최초의 해저터널입니다.
1972년, 선박왕(船王) 바오위강(包玉刚)이 3억여 위안을 들여 이 해저터널을 건설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당시 바오위강이 막 이 터널 건설에 투자했을 때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3억 위안이라는 돈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기 때문이었지요. 1978년만 해도 리자청(李嘉诚)의 창장 그룹(长江集团) 시가총액은 6억여 위안에 불과했었습니다. 1972년에 리자청의 창장 그룹이 상장하던 당시 시가 총액은 1억여 위안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바오위강은 3억 위안 이상을 투자했는데, 이 돈으로는 이미 두 개의 창장 그룹을 인수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였던 셈이죠.
그렇다면 바오위강은 왜 이 터널에 투자했을까요? 당시 바오위강은 이미 홍콩의 선박왕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박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오위강은 해운업이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새로운 사업 구상을 하고, 해운업 방면에는 투자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오위강이 이 터널을 막 건설했던 것은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있었다고 합니다. 바오위강은 이 터널을 건설할 때 40년간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가 40년 뒤에는 훙칸 터널의 운영권과 소유권을 무상으로 홍콩에 내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바오위강은 1969년에 이 터널을 착공하여 3년만에 개통하였습니다. 바오위강은 37년간의 통행료 회수기간을 남겨둔 상태였고, 당시 홍콩의 자동차 보유량을 감안할 때 손익분기점이 오기까지 10여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당초 계산대로라면 거의 반쯤은 공익활동에 투자한 셈입니다. 당시 홍콩 주식시장, 부동산 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바오위강은 다른 부분에도 투자를 하였는데, 3억여 위안을 투자한 것을 십여 년 동안 모두 10배 이상으로 벌어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해저터널을 건설한 것은 십여 년 동안 겨우 원가를 회수하는데 그쳤는데요, 중요한 점은 이 첫 10여 년 동안 원가를 회수하고, 남은 20여 년 동안 비로소 천천히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통화가치의 인플레이션까지 고려한다면 바오위강의 이 해저터널 건설 투자는 손해가 매우 큰 셈이었죠.
1972년 훙칸 해저터널이 완공되면서, 한 점쟁이가 복상(福相)의 인물을 초청하여 테이프 컷팅식에서 가위질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오위강은 그 말을 듣고 션덴샤(沈殿霞)를 컷팅식에 초청하였는데요, 이날 션덴샤는 직접 컷팅식에서 테이프를 자른 후, 오픈 스포츠카를 타고 터널을 처음으로 통과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터널을 반쯤 지나자, 갑자기 차가 고장이 나서 터널 안에 멈춰서게 되었고, 홍콩 사람들은 이 일이 오히려 대길한 모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뒤로 터널은 항상 차가 막혀서 설 정도로 많은 차가 통행하게 되었고, 바오위강은 분명히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1972년 홍콩 증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홍콩 사람들이 큰 돈을 벌었고, 이전에 자동차는 부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많은 일반인들이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벌고 차를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홍콩 안에 자동차 수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홍콩 경제도 호조세를 지속하면서 자동차 소비가 활기를 띠게 된 것이죠.
1972년에 훙칸 해저터널이 개통된 이후, 홍콩 자동차가 정말로 끊임없이 늘어났는데, 이것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바오위강은 단 3년 만에 건설에 투자한 원가를 모두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30여년 동안 훙칸 해저터널은 홍콩 교통의 대동맥이 되었고, 하루 자동차 이동량이 매우 많아 바오위강에게도 짭짤한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홍콩에 두 개의 해저터널이 더 건설되었지만, 여전히 훙칸의 차량 흐름을 완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하네요. 1991년, 바오위강이 사망한 후, 바오위강 가문은 8년간 훙칸 해저터널을 더 운영하였고 1999년에 경영권을 홍콩에 넘기면서 40년간의 운영 기간을 마쳤습니다. 바오위강 가문은 이 터널로 100억 위안을 훌쩍 뛰어넘는 돈을 벌어들여 예상을 뛰어넘었다고 합니다.
홍콩에서 단 두 사람만이 이 훙칸 해저터널을 지날 경우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바로 이 터널의 테이프 컷팅식에 참석했던 션덴샤였는데요, 그녀가 터널을 지날 때는 돈을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바로 홍콩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리리샨(李丽珊)입니다.
바오위강 자신을 포함하여, 홍콩 총독도 물론 이 터널을 지날 때마다 돈을 내야했습니다. 사실, 홍콩의 해저터널에 관해서는 또 하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고 합니다. 1980년대 홍콩에서는 제2의 터널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결국 이 프로젝트는 홍콩에서 막 부상한 중국 내륙 부호 룽즈젠(荣智健)에게 넘어갔습니다.
룽즈젠은 당시 홍콩에 가서 사업을하면서 홍콩 중신(香港中信)을 창업한 사람인데요, 룽즈젠의 신분이 특수했던 것 때문에 당시 리자청 등의 인물들이 룽즈젠에게 배려해준 것이었다고 합니다. 리자청 등의 도움으로 룽즈젠은 홍콩에서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이후 룽즈젠은 동구 해저터널(东区海底隧)을 뚫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롱즈젠 역시도 바오위강처럼 이 터널을 만들어 큰 돈을 벌 생각이었습니다. 당초 홍콩은 다리 건설을 계획했었지만, 치더 공항(启德机场)이 바로 옆에 있어서 항공기 이착륙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다시 해저터널로 계획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룽즈젠이 거액을 들여 동구 해저터널을 건설하였고, 1986년에 터널이 개통되던 때, 예전에 션덴샤의 일 때문에 룽즈젠도 대단한 인물을 불러와 테이프 컷팅식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물을 섭외한 끝에 다이애나를 초청하여 컷팅식을 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동구 해저터널은 요금이 비싸고 위치가 외진 탓에 돈을 별로 벌지 못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홍콩인들은 룽즈젠이 게스트를 잘못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현재 바오위강은 세상을 떠났고, 룽즈젠은 나이가 들어서 이런 일들도 모두 옛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1972년 바오위강이 3억 위안이 넘는 돈을 해저터널에 투자할 만큼 실력이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는 사업적으로 절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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