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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에 태어나 현대까지...전기적인 일생을 살았던 중국 샤오이푸(邵逸夫)의 인생 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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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에 태어나 현대까지...전기적인 일생을 살았던 중국 샤오이푸(邵逸夫)의 인생 스토리

hanyuku 2021. 11. 30.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의 샤오이푸(邵逸夫)는 만청시기에 태어나 현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1907년 11월에 태어나 2014년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요, 무려 1세기를 살았습니다. 그는 멸망한 청나라를 보기도 했고, 휘청거리던 민국시기를 겪기도 하였으며, 번화한 중국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샤오이푸는 일생동안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는데요, 청나라 시기에 그의 집안은 손꼽히는 부잣집이었고, 그가 나중에 하게 된 사업의 성공이 그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그의 일생동안 매우 금슬이 좋은 두 번의 사랑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젊은 시절의 사랑이든, 말년의 사랑이든 간에 이 부유한 남자와 그의 반쪽은 모두 서로를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는 공익을 위한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그가 평생을 걸쳐 기부한 금액만 해도 100억 위안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청나라 태생인 그는 2014년까지 살면서 평생 100억 위안을 기부하였고, 90세에는 또 미모의 아내를 얻었다고 하네요.

오늘은 그의 인생 스토리에 대해 소개하는 기사가 있어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수한 창업의 길

 

 

청나라의 한 대가족(大家族)에서 태어난 샤오이푸는 아버지가 안료 장사를 꽤 괜찮게 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좋은 가정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샤오이푸는 학당을 마치고 상하이로 건너와 미국인이 설립한 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에서 여섯째였던 샤오이푸는 비록 그의 가족들이 대대로 장사꾼이었지만, 조상들이 걸어온 길을 걷지 않았다고 합니다. 샤오이푸는 가문이 쌓아온 업적을 물려받지 않았고, 다른 형제와 함께 의연히 자기만의 길을 나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뛰어든 길이 바로 그 당시에는 별로 알아주지도 않았던 연예계였었죠.

 

 

 

 

 

샤오이푸는 현제와 함께 "텐이(天一)" 라는 한 영화사를 설립했는데, 회사는 그들의 고된 경영 덕분에 점점 커지게 되었고, 특히 회사가 가장 컸을 때는 무려 100여 개의 영화관을 손에 쥐고 있었기에, 영화계에서 사람들은 샤오이푸를 "리우라오반(六老板)"이라고 불렀습니다.

 

 

1931년, 샤오이푸는 사업을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영화 기술을 배우고, 영화 장비도 많이 구입하였습니다. 하지만, 918사변 이후 국내 정세가 불안해지자, 샤오이푸는 홍콩으로 사업을 옮겨 계속 발전시켰고, "텐이강창(天一港厂)"을 설립했습니다.

 

 

1934년, 미국에서 기반을 닦은 샤오이푸는 우선 영화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영화상 최초로 육성영화 <백금룡(白金龙)>을 선보였는데, 이 영화는 중국인이 독자적으로 제작에 성공한 영화라는 점에서 중국 영화사에 의미있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영화 기술로는 매우 파격적었죠.

 

 

 

 

 

1938년에는 정식으로 "난양 영화사(南洋影片公司)"로 개명하였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동남아, 홍콩 및 남양(南洋) 지역이 함락되면서 영화사는 매우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샤오이푸의 둘째 형 런캉(仁槺)이 홍콩으로 돌아와 사업을 재개했고, 10년 후 "난양 영화사(南洋影片公司)"는 "샤오스 부자(邵氏父子)"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멀리 싱가포르에 있는 샤오이푸와 형 런메이(仁枚)의 "샤오스 형제(邵氏兄弟)"의 영화사도 서서히 정상화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두 대기업의 이중 협공으로 인해, 홍콩의 "부자(父子)" 회사는 타격을 입었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이후, 샤오이푸는 "부자" 회사의 칭수이완(清水湾) 부지를 32만 위안에 사들였고, 이 곳에 "샤오스 픽쳐스(邵氏影城)"를 세웠고, 홍콩에도 "샤오스 형제(邵氏兄弟)" 회사를 세웠습니다. 샤오이푸는 상대 회사에서 대량의 명역(名角)들을 캐왔는데요, 린다이(林黛)가 맡아 주연한 영화 <초선(貂蝉)>는 제 5회 아시아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포함하여 5개 부문을 휩쓸게 되었습니다.

 

 

 

 

 

린다이는 이 황메이댜오(黄梅调) 영화의 성공 덕분에 샤오이푸에게 자신감을 얻게 해주었고, 이후 상영한 <강산미인(江山美人)>, <양산백여축영대(梁山伯与祝英台)>도 꾸준한 흥행기록을 세웠습니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샤오이푸는 미스 홍콩 대회를 기획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한 사람은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또한 영화 훈련반을 개설하여 정페이페이, 천훙례(郑佩佩、陈鸿烈)와 같은 우수한 영화인들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1966년에 <대취협(大醉侠)>으로 홍콩 활극영화 시장을 열었습니다.

 

 

TV업계의 전쟁터

 

 

1965년, 샤오이푸는 다른 사람과 함께 홍콩의 무료 텔레비전 영업허가증(免费电视牌照)을 발급받는데 투자하였고, 마침내 1967년에 정식으로 방송을 시작하였습니다. 샤오이푸가 맡은 직위는 상무이사였습니다.

 

 

 

 

 

 

1980년, "신이청(新艺城)"의 흥기(兴起)로 인해, 샤오스 회사의 흥행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고, 게다가 파트너인 둥리샤오(东利孝)가 세상을 떠났으며, 미국과 영국에서 자본을 철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샤오이푸는 새로 생긴 TV 업계로 사업을 전환하면서 샤오스 회사는 회사의 영화 생산에 사용하는 부지를 줄이고 나머지를 지상파 방송사에 임대해주기도 하였습니다.

 

 

1988년에는 샤오스는 정식으로 영화 생산을 그만두었는데, 샤오스가 창립된 이래로 약 1,000여 편의 영화가 나왔으며, 중국 및 국제 영화상을 30여 개나 받았습니다.

 

 

2003년 샤오스 형제는 1억 8천만 달러로 샤오스 픽쳐스를 다시 건설한다고 발표하였는데, 2009년에 전면적으로 개장할 예정이며, 샤오스 픽쳐스를 영화 촬영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2010년에는 샤오스 회사(邵氏公司)가 26%의 지분을 매각하면서 전면적으로 퇴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무선 43주년 경축행사(无线43周年台庆)에 샤오이푸가 성장(盛装)을 하고 와 참석하였습니다.

 

 

 

 

 

 

그의 감정 생활

 

 

평생동안 두 명의 아내를 두었던 샤오이푸는, 30세 때 5살 연상의 싱가포르 재력가의 딸 황메이젼(黄美珍)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황메이젼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황메이젼은 1987년 85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는데요,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샤오이푸는 회사를 1년동안 휴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샤오이푸의 두 번째 부인인 팡이화(方逸华)는 1931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홍콩의 유력한 언론 및 행정인으로, 두 사람은 1952년에 처음으로 만났었습니다. 이후 팡이화는 샤오이푸의 곁에서 무선 방송 관련으로 일상 업무를 보다가, 1997년에 90세의 샤오이푸와 66세의 팡이화는 미국 라스베거스에서 혼인신고를 하였습니다.

 

 

 

 

 

 

샤오이푸의 재산에 대해서,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백억 대 자산을 합리적으로 분배해놓았다고 합니다. 그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는데요, 바로 아이들이 새어머니 팡이와와 재산을 두고 다투지 않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샤오이푸는 일찍이 여러 차례 중국과 홍콩 두 곳의 교육, 의료 설비와 과학 기술 등등의 분야에 걸쳐 10억 위안에 달하는 자금을 기부한 적이 있으며, 특히 교육과 과학 이 두 분야에 집중하였습니다. 샤오이푸의 기부금은 중화권 영토에 널리 퍼져 있으며, 중국 전역의 여러 대학교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인 "일부루(逸夫楼)"가 있다고 합니다.

 

 

2005년 남아시아 쓰나미 당시, 그는 1,000만 홍콩달러, 2008년 원촨(汶川) 지진때는 1억 홍콩달러를 기부하여,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기부금을 냈다고 합니다. 샤오이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 얼마를 기부하고 국가에 얼마를 기부하느냐가 중요한 일이다."

 

 

 

 

 

이렇듯, 샤오이푸는 자선가일 뿐만 아니라, 영화 및 TV 업계의 태두이기도 한 그의 일생은 '전기(传奇)적'이라고 형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매우 부드럽고 겸손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서 돈을 벌고, 사람들을 위해 사회에 환원하였습니다. 향년 107세로 2014년 1월에 자택에서 별세한 샤오이푸의 장례식은 가족들만 참석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그의 창업의 길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동업자에게 타격을 받고, TV 업계에서 큰 풍랑을 겪는 등 힘든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가 내딛은 결정 하나하나가 그의 사업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뤄낸 성공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랜 경험과 긴 안목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값진 결과물입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350351052766066094%22%7D&n_type=-1&p_from=-1

 

他生于晚清,一生捐出善款高达百亿,90岁娶娇妻,107岁高龄离世

邵逸夫,活脱脱的一个生于古代活在现代的人,1907年11月出生到2014年离世,他在这个世界上活了一个世纪之久。他见过灭亡的清朝,也见过动荡不定的民国,他更经历过繁华的中国,也死于繁华

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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