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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8톤을 가지고도 비참하고 쓸쓸한 결말을 맞이한 대만의 장교 마훙쿠이(马鸿逵)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신중국 성립 후,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대부분의 장성들이 대만에서 패퇴하였습니다. 일부는 해외로 도망가 장제스의 장성들을 결사적으로 따르기도 하였고, 일부는 여전히 내륙으로 돌아가 조상을 인정하고 귀종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항일전쟁 기간에 많은 공헌을 했고,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가 좋았으며, 신중국 집권에 대한 열망이 높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귀국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하는데요, 그 사람은 바로 전 국민당 장교 마훙쿠이(马鸿逵)였습니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귀국하려다가 거절당한 것일까요? 그는 무려 8톤의 황금과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홀로 쓸쓸히 죽었을까요? 기사를 살펴보면서 알아보겠습니다^^
1982년, 간쑤성 허저우(甘肃河州)에서 태어난 마훙쿠이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혁명 사건들을 보고 들어서 익숙했고, 자란 뒤에는 군대에 들어가 아무 말단 관직이나 얻고자 하였습니다.
졸업 후, 마훙쿠이는 비밀리에 동맹회에 가입하여 반청(反清)활동에 참여하였고, 청나라 군대와 한 전투에서 청나라 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마훙쿠이의 아버지 마푸샹(马福祥)은 청나라 조정의 관리로서, 수중에 군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부친 덕분에 그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군대에 가서 백랑봉기를 막았고, 청나라가 멸망하자, 그는 닝샤 신군도통(宁夏新军都统) 자리에 이르게 되었으며, 백랑을 토벌한 공로로 위안스카이(袁世凯)에게 상장(上将) 직함을 부여받고, 이후 위안스카이의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위안스카이가 죽자, 마훙쿠이는 아버지 마푸샹이 민국 정부 대총통(民国政府代总统) 펑궈장(冯国璋)과의 동맹관계로 국민정부에 계속 남아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바람 부는 대로 돛을 다는 임기 응변식의 마훙쿠이는 펑위샹(冯玉祥) 휘하에 투신하여 예하 사단장을 맡았고, 이후 세력을 확장하여 1926년, 펑위샹이 우위안(五原)에서 전투를 맹세하자, 마훙쿠이는 그의 북벌 호소에 호응하여 다시 출세길을 타게 되었고, 총사련관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 공산당원 리우즈단(刘志丹)은 마훙쿠이 밑에서 정치부 주임을 맡았는데, 마훙쿠이는 리우즈단의 애국심에 영향을 받아 북벌에 적극 협력하여 산시(陕)로 가서 전투를 벌여 전승을 거두었습니다.
몇달 후, 장제스가 당파를 청산하자, 마훙쿠이는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는 또 목숨을 걸구 리우즈단 일행을 데리고 산베이(陕北)를 나왔습니다.
자신이 국민당 안에 있으면서도 공산당을 돕는 것은, 마훙쿠이가 옳고 그름을 따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항상 자신의 활로를 남겨두고 양쪽에 밉보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장제스의 세력이 커지자, 여러모로 심사숙고한 끝에 마훙쿠이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펑위샹을 쓰러뜨리고 장제스의 진영에 투입되어 중책을 맡게 되었고, 장제스의 많은 군비교부금과 군사물자의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원대전(中原大战)이 시작된 후, 장제스는 마훙쿠이에게 요직을 맡겼으나, 그는 다른 사람의 선동으로 반란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마훙쿠이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장제스의 세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그 당시 장제스는 쑹메이링(宋美龄)과 결혼하여 공, 쑹(孔、宋) 두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대량의 미국식 장비를 들여왔고, 반대로 그에 대항하는 옌시샨(阎锡山) 등의 부대는 병사들이 모두 구식 총을 들고 있었으며, 장제스의 병력이 강해서 장제스에게 반기를 들려면 자신이 책임질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훙쿠이는 자신에게 반란을 부추기는 사람을 은밀히 장제스에게 전보로 보냈고, 장제스는 그 소식을 듣고 재빨리 이들을 숙청하여 싹을 잘라버렸습니다. 이때부터 마훙쿠이에 대한 장제스의 신임이 두터워지게 되었습니다.
장제스는 마훙쿠이가 이런 정보를 밀고하기 전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결국 장제스의 강함에 굴복하여 공을 가로채기 위해 이간질한 것뿐이었습니다.
1932년에, 장제스는 마훙쿠이를 보내 토벌을 맡겼는데요, 마훙쿠이는 비록 자신이 장제스에게 의탁하고 있지만, 자신의 앞길과 퇴로를 위해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는 장제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대를 신양(信阳)에 주둔해놓고 있으면서 행동을 개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마훙쿠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가 아주 이기주의적이고 실리추구자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훙쿠이의 이런 행동은 장제스의 불만을 샀고, 그는 또 다른 군대를 파견하여 신양을 포위하고 마훙쿠이를 격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마푸샹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즉시 아들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마푸샹은 장제스가 있는 한커우(汉口)와 신양 사이를 오가며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사정했는데, 이때의 마푸샹은 병세가 위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뛰어다녀서 몸이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몸이 더욱 나빠지자 베이핑(北平, 베이징의 옛 이름)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치료를 받으러 가던 중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푸샹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군심(军心)을 안정시키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는 한 노인이 아들의 죄를 무마시키기 위해 병세에도 불구하고 발벗고 나섰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면 장제스 자신이 도량이 좁아 조그만 일에 얽매여 큰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제스는 화를 반쯤 가라앉히고, 마훙쿠이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를 닝샤 정부 주석(宁夏政府主席)으로 임명했고, 그는 2개 연대의 병력을 이끌고 닝샤로 진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훙쿠이는 군대의 정예 병사들을 몰래 데려가 은밀히 이 부대를 이동시켰고, 허난(河南)에는 노쇠하고 약한 병사들만 남겼습니다.
이때부터, 마훙쿠이는 닝샤에서 잔혹한 통치를 시작하였고, 현지 백성들은 마훙쿠이에게 17년간 억압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마훙쿠이는 '서북사마(西北四马)' 중 하나로 불리게 되었는데요, 이 의미는 '사람을 해치는 말'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닝샤에서 마훙쿠이는 거의 토황제(土皇帝)로 군림하였습니다. 현지의 교육청장을 제외한 다른 중요한 직위들은 모두 그의 측근으로 심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국민당은 교육을 매우 중시하여 교육에 대한 투입이 매우 컸고, 교육청장은 부수입이 매우 큰 자리였습니다. 마훙쿠이는 연속으로 교육청장에 5선이나 하면서 자신의 뜻을 이뤘습니다.
인민들의 고혈을 착취하기 위해 마훙쿠이는 겉으로는 애국애민(爱国爱民)을 가장하면서 내심 불합리한 정책을 펼쳤고, 백성들은 말(马)이 있으면 세금을 내야하고, 장사꾼들도 현지에서 장사를 하려면 그에게 돈을 바쳐야 했습니다.
항일 시기, 백성들의 생활은 이미 고달팠지만, 마훙쿠이는 항일을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헌금을 강요하였고, 돈을 내기를 원하지 않으면 반역이라는 명분을 씌웠습니다. 심지어는 집까지 빼앗아 이 돈을 모두 자기 주머니에 챙겼습니다.
평생 미색에 빠져 살던 마훙쿠이는 본처 외에 다섯 명의 첩이 있었고, 두번째 첩은 원래 자신의 의형제의 아내였지만, 마음에 들어 강제로 빼앗아왔습니다.
1949년, 펑다(彭大) 장군의 지시하에, 서북지방의 국민당 군벌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마훙쿠이도 그 속에 있었는데, 마훙쿠이는 도망가기 전에 직접 장제스를 만나 그에게 알랑거렸기 때문에 자신이 장제스와 관계가 그런대로 괜찮다고 여겼고, 자신이 대만에 건너가 한 자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제스는 결코 이런 그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서북의 실각 때문에 장제스는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직접 마훙쿠이를 해임하고, 그를 철저히 실각시켜버렸습니다.
마훙쿠이는 매우 분노하였지만, 자신에게는 어찌할 힘이 없었습니다. 권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장제스의 감시에도 항상 시달리게 된 마훙쿠이는 도망칠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마훙쿠이는 자신의 한 첩에게 병이 있다는 핑계로 홍콩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는 장제스에게 첩의 병문안을 하러 가겠다며 장제스에게 휴가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홍콩으로 달려간 후, 자신이 닝샤에서 핍박 정치를 하던 시절 갈취한 금 8톤을 들고는 장제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본처까지 버리고 가장 예쁜 첩 세 명만 데리고 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마훙쿠이는 많은 금전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의 여생이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측근이 배신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미국에서 주색에 빠져 돈 관리에 소홀했던 마훙쿠이는 자신의 한 첩에게 모든 돈을 맡겼지만, 이 첩이 결국 돈을 싸들고 도망가버렸고,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훙쿠이는 조국을 떠난 것을 점점 더 후회하게 되었고, 중국에 계속 귀국을 요청하였는데, 중국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거짓된 사람을 귀국할 수 있게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미국에서 가난과 병이 겹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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