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yuku

중국-필리핀 우호관계에 기여한 필리핀 첫번째 여성 대통령 코라손의 뿌리는? 본문

China news

중국-필리핀 우호관계에 기여한 필리핀 첫번째 여성 대통령 코라손의 뿌리는?

hanyuku 2021. 11. 11.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88년 4월, 세계 최초로 중국계 여성 대통령이 전용기를 타고 중국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바로 필리핀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입니다.

 

 

뜻밖에도 필리핀 여성 대통령은 수도 베이징이 아닌 아름다운 해안 도시 샤먼(厦门)을 첫 방문지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 여성 대통령은 과연 누굴까요? 그녀는 왜 샤먼을 중국 방문의 첫 방문지로 선택했을까요?

 

 

그녀의 본적은 중국 푸젠성 장저우 훙젠촌(福建省漳州鸿渐村)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대외적으로 자신이 필리핀 대통령인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신분인 "훙젠촌의 딸"이 있다고 주장해왔다고 하네요. 이번 방문은 필리핀과의 우호관계 증진 외에도 또 하나,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중국 푸젠성 훙젠촌에 특사를 보내 자신의 뿌리를 조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많은 필리핀인들이 사실 중국인의 후예이고, 나도 그 중 한명이다. 나는 중국과 그런 인연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다른 필리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중국에 직접 와서 뿌리를 찾고 싶고, 필리핀과 중국 양국이 더욱 긴밀히 협력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훙젠촌은 코라손(科拉松)의 뿌리이다

 

 

이 필리핀 여성 대통령의 원래 이름은 마리아 코라손 코우앙코였습니다. 그녀는 1933년 1월 25일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코라손'이라는 이름은 스페인어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의미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 세대는 '코라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그녀에게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대하였고, 코라손은 이름 그대로 성년이 되어 아버지 세대의 소망을 이루어주었습니다.

 

 

코라손의 신원은 매우 특수하였는데요, 그녀의 증조부 쉬위환(许玉寰)의 본명은 쉬상즈(许尚志)이며, 중국 푸젠성 사람으로, 쉬 씨 가족은 일찍이 훙젠촌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 아편전쟁으로 인해 병란이 터지자, 쉬위환이 스무 살 되던 해에 어른들을 따라 필리핀으로 건너와 해변가 마을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나가다가 필리핀 아가씨와 결혼하여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필리핀의 기후가 고무 재배에 특화된 것을 보고, 고무 재배 농장을 지었고, 설탕과 쌀, 건축 방면에서 기업을 일구어 곧 필리핀의 명가가 되었습니다.

 

 

코리손의 부친은 쉬위환의 장손이었고, 아버지, 형제 세대에 이르러 조상의 경제적 기반이 두터워지자, 가문은 정치로 분야를 옮겨갔습니다. 그리하여 조부와 아버지, 오빠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유명한 "수무롱 가족" 출신인 코라손의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부유한 집에서 살았지만 검소하게 지냈고,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가르치는 등의 삶에서 부잣집 아가씨같은 성격은 전혀 없었습니다. 코라손의 외할아버지는 상원의원으로 필리핀 부통령에 출마하였습니다.

 

 

코라손은 이러한 우월한 정치 가문의 집안 환경에서 자라 귀동냥을 하며 훗날 자신이 정치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코라손의 정치 인생

 

 

어릴 때부터 필리핀에서 정통 고전 수도원식 교육을 받은 코라손은 13세 때 미국으로 보내져 뉴욕 세인트 빈센트힐 스쿨에서 문학학사 학위를 받고, 같은 정치계의 젊고 유능한 베니그노 아키노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성을 따라 코라손 아키노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스톤힐 스쿨과 세인트 빈센트힐 스쿨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2세 때, 필리핀 자유당 총서기와 상원의원을 지낸 코라손은 당시 시장이자 반대파 지도자였던 남편과 결혼한 후, 딸 넷과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당시 필리핀 대통령은 민중의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독선적이고 자기 배만 불린 인물로, 민생을 위한 복지에 뜻을 모은 민주지사들을 모아 베니그노는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습니다.

 

 

베니그노가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애매한 죄로 체포되어 7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며 심장병에 시달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고 마르코스의 폭정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출소 후 그는 가족과의 평온한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필리핀으로 돌아가 반대파와 연대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계획으로 마르코스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지 않았고, 코라손은 남편이 마닐라 공항에서 이미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남편이 짧은 순간에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남편은 필리핀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숨진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 함께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그녀에겐 끝없는 분노와 후회가 쌓였지만, 아키노 부인으로서 본격적으로 자신이 직접 정치 무대에 나서 필리핀 국민들을 위해 제대로 된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베니그노의 사망으로 반군이 분노하면서 필리핀 전체가 혼란에 빠졌고, 군중들과 반군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코라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억누르고 마르코스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운동에 뛰어들어 국민들과 반대파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1986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가 2월 7일로 앞당겨졌는데, 마르코스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습니다. 실제로 마르코스는 최종 선거 결과를 조작하라고 은근히 국회를 압박하였고, 이것은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필리핀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마르코스 선거 결과 조작 폭로를 하며 항의한 끝에 53세의 나이로 마르코스 후보를 누르고 1986년 필리핀의 제 11대 대통령을 맡아 필리핀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코라손이 부임한 이래로, 그녀는 대내외적으로 일련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대내적으로는 대통령 연임 불가, 탐욕스러운 관리들을 정치적으로 숙청을 명시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 발전을 중시하고,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을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여 필리핀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또한 미군의 필리핀 주둔을 대외적으로 중지하게 하였고, 중국과의 우호관계 구축을 적극적으로 공개하며, 자신이 중국계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뿌리가 중국에 있다는 그녀의 중국과 얽힌 인연도 한몫 하게 되었습니다.

 

 

코라손은 비록 필리핀 태생이지만, 그녀의 조상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첫번째로 중국에 방문했을 때, 샤먼에 내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 수십 명의 중국 특파원, 필리핀 유학생들이 그녀를 환영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푸젠성 성장과 필리핀 주재 중국 대사를 대동한 코라손과 그녀의 미혼인 두 딸, 그리고 정부 관리 10여 명이 함께 그녀의 조상이 살았던 훙젠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벌써 양국의 우의를 상징하는 양국 국기와 꽃다발, 리본을 흔들며 멀리서 찾아온 귀한 손님을 반겨주었다고 합니다.

 

 

촌민 위원회 주임은 방문단을 촌민위원회 응접실로 데리고 갔으며, 온 마을을 대표하여 중국 특색을 갖춘 기념 선물을 주며 열렬한 환영을 표시하였습니다. 코라손은 두 딸을 데리고 쉬 씨 가옥을 찾아 분향하고, 증조부 쉬위환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마을의 유치원을 둘러본 코라손은 두 딸과 함께 마을의 작은 화원에 중국과 필리핀 간 우정의 유대를 상징하는 남양삼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왕자오궈 성장(王兆国省长)을 대동하고, 그녀는 광장 중앙의 연단에 올라 10여 분간 씩씩하게 연설을 하였고, 감격에 겨워 고향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온 것은 국가 원수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제가 이 마을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마디에는 중화민족에 대한 국가원수로서의 존중과 애정이 담겨있다고 기사를 쓴 기자는 평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뜨겁게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연설을 마친 뒤, 코라손은 훙젠촌에 "어린이 놀이동산"을 기부하여 아이들이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중국과 필리핀 간의 우의를 대대록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틑날, 코라손은 훙젠촌에서 제사를 마치고 두 번째 방문지인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양국 지도자는 국제와 지역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함께 발전한 지 이미 천여 년이 된 중국과 필리핀의 우호관계를 대대적으로 협의하였습니다. 코라손은 "우리 두 나라의 목표는 일치합니다. 이런 상호 이해와 지지가 양국 우호 협력관계를 만들어낸 것이죠."라고 말했습니다.

 

 

방중 사흘째인 이날, 인민대회당 푸젠청에 들른 그녀는 검은색 중산복을 입은 노인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덩샤오핑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덩샤오핑도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해주었습니다.

 

 

또한 코라손의 두 딸에게도 반갑게 인사해주며, 전혀 거드름 피우지 않고 "할아버지라고 불러주세요"라며 다정하게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덩샤오핑과 코라손 세 모녀는 사진을 찍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고, 현장에 있던 기자는 곧바로 그 훈훈한 장면을 기록에 담았습니다.

 

 

코라손의 행적은 중국의 수많은 여성들에게 고무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이제는 고인이 된 코라손을 중국인들은 중국-필리핀 우호관계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여성 대통령으로서 추모한다고 하며 기사를 마쳤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253934474235342385%22%7D&n_type=-1&p_from=-1

 

世界首位华人女总统,过年多次回福建祭祖,邓老:“我们认亲了”

1988年4月,世界上首位华人女总统乘坐专机来到了中国。她就是菲律宾历史上的第一位具有传奇色彩的女总统。 让人意想不到的是,这位菲律宾女总统并没有把首都北京作为访华的第一站,而是

mbd.baidu.com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