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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마지막 "홍인태감(红人太监)" 소덕장(小德张)의 인생 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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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마지막 "홍인태감(红人太监)" 소덕장(小德张)의 인생 스토리

hanyuku 2021. 9. 29.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 청나라 시절, 가장 유명했던 몇 명의 환관들은 모두 청나라 말기 출신인데다 서태후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안덕해, 이연영, 최옥귀(安德海,李莲英,崔玉贵) 등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인지도나 권력의 크기 정도를 따지면 이연영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윤택하고 인생의 끝까지 결과가 좋았던 사람은 청나라의 마지막 "홍인태감(红人太监)"이었던 소덕장(小德张)이라고 합니다.

 

 

소덕장의 출세는 자희태후(慈禧太后)에서 시작되어 융유태후(隆裕太后)때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는 이연영의 후계자였으며, 청나라 마지막 태감의 총 책임자로, 홍인태감들 중에서 결말이 가장 좋았던 인물이라고 하네요.

 

 

입궁한지 22년차, 4년간 대총관(大总管)을 지내다

 

 

소덕장의 본명은 장란덕(张兰德)으로 텐진 징하이(天津静海) 출신입니다.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해서 그는 늘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라고 물었더니, 옆에 있는 친구들이 "네 밑에 달린 불알을 떼고 궁에 들어가서 태감이 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거야." 라고 무심코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덕장은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궁에 입궁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덕장은 불알을 제거하는 것도 솜씨 있는 곳에서 반드시 전문적인 사람이 손을 써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거의 독점적인 장사여서 황가에서 "소도류(小刀刘)"와 "비오(毕五)"에게 위탁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칼을 들고 스스로 제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입궁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고 그는 3년이나 기다렸습니다.

 

 

그 당시, 입궁하여 환관이 되는 것은 수많은 가난한 집안의 유일한 출구였으며,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환관이 되는 것은 인기 직업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뒷문을 이용해야만 자신의 아이를 들여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황궁에서 새로운 환관을 받지 않게 되었고, 궁에 들어가려면 빈자리가 나와야 했습니다. 소덕장은 당시에 은 50냥을 써서 노쇠하여 출궁하는 환관의 자리를 메꾸는 것으로 비로소 입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덕장은 매우 총명해서, 궁에서 출세하려면 상전의 총애를 받아야 하는 것을 알았고, 당시 가장 높은 상전이 자희 태후였습니다.

 

 

관찰한 결과, 소덕장은 자희 태후가 연극 관람을 특히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고, 그는 자진해서 궁내 극단에 등록하여 무생(武生, 중국 전통극의 남자 무사역)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의 연기는 자희 태후에게 큰 기쁨을 주었고, 그 결과 자희 태후의 생활 속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98년, 무술사변 이후, 그는 회사태감(回事太监)으로 승진하여, 민간인 신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관리층(管理层)"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900년, 경자사변이 일어나자, 소덕장은 자희 태후를 따라 도망쳤는데, 도망 중에도 자희 태후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나중에 베이징으로 돌아와 그는 수라간 장안(掌案)으로 승징하였고, 삼품 정대(三品顶戴)를 받게 되어 태감들 사이의 "고위급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908년, 자희 태후가 사망하자, 이연영은 자희 태후의 애도기간 100일 후에, 자발적으로 궁을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신하는 한 명의 천자만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자희 태후가 사망하자, 후궁의 맏이가 융유태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은 융유 태후에게 적지 않은 뇌물을 주긴 하였지만, 목숨을 지키는 것은 가능하여도 계속해서 총애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1909년, 융유 태후가 자금성의 상전이 되자, 소덕장은 장춘궁 사사팔처대총관(长春宫四司八处大总管)에 발탁되어 정식으로 태감의 1인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희 태후가 임종 유언을 남겼는데, 군국대사는 섭정 왕재풍(王载沣)이 처리하였지만,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융유 태후에게 물어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융유 태후는 후궁의 우두머리가 아닌, 대청제국의 막후의 우두머리였던 것이죠.

 

 

그래서 매일 수많은 신하들이 줄을 서서 융유 태후를 만났고, 이 모든 것은 소덕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융유 태후가 집권한 3년 동안 소덕장은 자금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911년 10월, 무창봉기가 발발한 지 4개월도 채 되지 않아, 대청국은 바로 붕괴가 시작되었습니다. 융유 태후는 눈물을 머금고 <청제퇴위조서(清帝退位诏书)>를 공포하였습니다.

 

 

망국의 거대한 심리적 부담을 안고 융유 태후는 1913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소덕장은 이제 그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자금성 후궁은 새로운 주인으로 바뀌었는데, 그녀는 광서의 근비(光绪的瑾妃)로, 현재는 "단강태비(端康太妃)"라고 불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자금성을 떠나는 것에 대해, 소덕장은 아무런 후회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해왔기 때문이었죠. 그는 이미 민국의 아름다운 세상이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계에 살며 호화주택을 짓고,

젊고 아리따운 아내를 맞아 반평생을 윤택하게 살다

 

 

민국 이후, 베이징 시내에 있던 만청 귀족들은 모두 텐진에서 거주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조계(租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곳은 민국 당국이 통제할 수 없는 사안이라 더욱 안정감이 있었습니다.

 

 

소덕장 역시 텐진으로 가는 것을 선택하였는데요, 더구나 그는 텐진이 고향이었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텐진에 막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의 양아들 장서삼(张书森)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장서삼은 소덕장의 큰형의 아들로, 소덕장이 아이를 낳지 못하여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후사가 끊기지 않도록 장서삼을 그에게 양자로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1922년, 소덕장은 땅을 사기로 결정하고, 자신을 위해 호화 저택을 지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그는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가 첫번째로 마음에 든 곳은, 영국 조계지인 케임브리지도(剑桥道)에 위치해 있는 땅이었습니다. 소덕장은 자신이 직접 도면을 다루며 건축을 도맡아서, 텐진 조계구에서 가장 호화롭게 저택을 지었습니다. 이 저택은 4327평방미터의 대지에 벽돌과 나무를 혼합하여 2층으로 지은 작은 건물로, 지하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덕장은 이 건물에서 3년밖에 못살았습니다.

 

 

1925년, 경친왕(庆亲王)이 베이징에서 텐진에 왔을때, 그가 소덕장의 이 호화 주택이 마음에 들어서 사들였기 때문이었죠. 비록 청나라가 망국이 되었지만, 태감이었던 그에겐 어쩔 수 없이 경친왕이 높은 존재였고, 거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후 소덕장은 정주도(郑州道)에 있는 땅을 사들여, 원래 도면에 근거하여 새로운 호화 저택을 지었습니다. 이 저택은 13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호화로운 마당을 만들어 누각과 다리를 놓고 물을 흐르게 했다고 하네요.

 

 

소덕장은 출궁 당시 38세의 장년이었는데요, 정주도에 있는 이 호화 저택에서 그 이후로 쭉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소태감, 하인, 잔심부름꾼을 두고 살았는데요, 그에게는 어린 아내도 있었다고 하네요.

 

 

소덕장은 일개 태감으로써 네 명의 아내를 차례로 얻었다

 

 

첫번째 아내는 어머니의 조카인 당 씨(唐氏)였는데, 소덕장이 20세 때 결혼했습니다. 본래 고향의 시댁에서 살던 당 씨는 1909년에 소덕장과 함께 상경하였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번째 아내는 청나라 말기 대총관 최옥귀(崔玉贵)의 조카였던 최 씨(崔氏)로, 7년 동안 소덕장과 함께 지냈는데,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번째 아내는 장 씨(张氏) 였는데요, 그녀는 겨우 1년 동안만 소덕장과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네번째 아내는 장소향(张小香)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소덕장에게 시집왔을 때는 불과 16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해, 소덕장은 49세였지요. 그녀는 1978년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텐진에서의 후반생은 윤택하고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소덕장은 베이징에 전당포와 상점을 가지고 있었고, 텐진에서는 각종 실업에 투자하였는데, 그는 은행에 많은 예금을 가지고 있어서 매년 이자 수익만 해도 놀라운 금액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가는 적지 않은 기업들의 주식을 사들였고, 매년 배당금으로 큰 돈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민국의 수뇌급 인물들에게 인기있는 사람이었는데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함께 나와 일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했습니다. 1917년, 장훈(张勋)은 베이징에 상경하여 다시 복귀를 꾀했는데, 텐진을 지나는 길에 소덕장을 찾아와 황궁 대총관으로 남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훈은 자기 앞길도 제대로 보전할 수 없게 되었고, 베이징에서 떠났습니다.

 

 

소덕장의 하루 일과는 매우 규칙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침 4시에 일어나,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무술을 연마하고, 아침을 먹고 나면 방에서 스스로 한약 연구를 하였습니다. 소덕장은 궁중 비법을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 많은 한약을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료로 나눠주기도 하였습니다.

 

 

소덕장이 텐진을 떠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단 두번 뿐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1933년으로, 그때 그는 다시 베이징에 돌아가보았습니다. 이때의 자금성은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참관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고, 소덕장은 그곳을 다시 유람하며 그가 생활하고 분투했던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은제사(恩济寺)에 들러 노태감(老太监)들을 만난 뒤, 다시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았스니다.

 

 

또 다른 한 번은, 고향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였습니다. 소덕장의 고향인 징하이에는 강이 하나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노를 저어 강을 건너왔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소덕장을 찾아가 다리 하나를 건설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소덕장은 1000대양(大洋, 당시 화폐 단위)를 쾌척하였습니다.

 

 

다리가 완공될 때, 소덕장을 초청하여 참관하게 하였는데, 소덕장은 이전에 미움을 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길에서 무슨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할지 몰라 두려워서 일부러 자신의 차를 타지 않고 차를 바꾸어 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징하이에 다다르자, 도로가 요동치는 바람에 차 지붕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나게 되었는데요, 소덕장은 이것이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며 이내 고개를 돌려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유턴하여 돌아오는 것이 정말로 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알고보니 현지의 도적떼들이 소덕자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이미 매복해 있다가 그를 납치하여 50만 위안을 뜯어내려고 했었던 것이죠.

 

 

이후, 소덕장은 다시는 텐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말년의 소덕장은 담배에 물들다

 

 

원래 소덕장은 담배를 매우 배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다리에 상처가 하나 있었는데 줄곧 상태가 좋지 않았고, 통증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에게 통증을 완화할 수 있도록 담배를 피우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몇 모금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는 여전히 자제하며 매일 많이 피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양자는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아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고 53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텐진이 해방된 후, 소덕장은 정주도의 공관을 기부하였고, 달인학교(达仁学校)를 세워 교장이 되었습니다. 소덕장의 다른 주택은 텐진 제1공인요양원(天津第一工人疗养院)에 기증하였습니다.

 

 

이맘때, 소덕장은 이미 73세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고용인도, 산업도 없었지만, 그는 매년 베이징 샹이하오(北京祥义号)에서 이자를 받고, 야오화 유리회사(耀华玻璃公司)에서 1500위안의 주식 배당금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돈으로 그의 노후 생활은 충분했다고 합니다.

 

 

1957년, 소덕장은 81세를 일기로 병사하였습니다.

 

 

청말민초, 소덕장은 청나라의 몰락과 민국의 혼란, 그리고 신중국의 성립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산 증인이었습니다.

 

 

구시대로부터 걸어온 사람으로서, 그는 충분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어린 시절 그가 스스로 칼을 휘두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의 말년이 이렇게 윤택한 삶을 살게 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렇게 칼을 휘둘렀던 것은 소덕장에게 있어서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8680413695748185006%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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