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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마오 주석의 혁명 열사 사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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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마오 주석의 혁명 열사 사랑

hanyuku 2021. 10. 6.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58년 7월 어느날, 반 백이 넘은 소박한 옷차림의 한 여성이 두 명의 여자 아이를 데리고 구이저우(贵州)부터 수천 리 길을 달려와 기차역을 나와 베이징에 도착하였고, 경비가 삼엄한 중난하이 대문(中南海大门)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녀는 누구일까요? 대체 무엇을 하러 온 것일까요?

 

 

그녀는 마오 주석이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초청한 손님이었는데요, 사람들은 25일이나 묵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다고 합니다.

 

 

말년의 마오 주석

 

 

신중국 성립 후, 마오 주석은 매일 같이 공무를 처리하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베이징에 상경한 친척들과 오랜 친우들은 비록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주석 업무 때문에 바빠서 보통 한번 만나거나, 하루 이틀을 머물거나, 길어야 3~5일 머문 후 돌아갔기 때문에 오랫동안 머무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오래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자주 올 수 있었고, 1959년과 1960년에 두 차례에 걸쳐 중난하이에 초청받은 영예를 가진 사람으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그때로부터 40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고 합니다.

 

 

1918년, 후난성 제1사범학교 학생이었던 마오쩌둥은 샹탄 현립고등소학(湘潭县立高等小学)에 입학한 후 창샤 고등공업학교의 뤄져(罗哲)와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였고 친해졌습니다.

 

 

뤄져는 소학교 때부터 마오쩌둥이 이끈 신민학회(新民学会)의 영향을 받아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혁명의 큰 흐름에 뛰어든 지 오래였습니다.

 

 

 

 

 

 

마오쩌둥보다 9살 아래인 뤄져는 공업학교 대표로서 학생들을 이끌고 마오쩌둥을 따라다니며 형제처럼 지냈고,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들이 형제라고 착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1922년, 뤄져는 베이징 아문법정학교(北京俄文法政学校)에 입학하여 소련의 10월 혁명 경험을 깊이 연구하고 응용하였고, 1925년 학교 대표로 530운동에 참가하여 학생들을 이끌고 단기서 정부(段祺瑞政府)에 청원했다가 북양 군벌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뤄져는 홀로 맨 뒤에서 행군하였고, 모두를 긴급히 퇴각 시켰지만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가는 길에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1926년, 뤄져는 318시위를 주도하였고, 용감하게 돌진하다가 반동군경에 다리를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때 그는 24세에 불과하였습니다.

 

 

 

 

 

베이징에 있는 동안, 뤄져는 마오쩌둥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혁명의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당시 뤄져처럼 이론도 알고 실전 경험도 있는 혁명가는 많지 않았는데요, 마우쩌둥은 자신이 설립한 광저우 농민운동 강습소로 그를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1926년, 뤄쳐는 부상에서 회복된 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 차오윈팡(曹云芳)과 함께 학교를 떠나 광저우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강연을 하면서 마오쩌둥의 소개 하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1927년 초, 뤄져는 전국농민협회 준비위원회 비서를 맡아 마오쩌둥의 전국농민협회 사업 준비를 도왔습니다. 이 기간동안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혁명적 우의를 다졌습니다.

 

 

차오윈팡도 광저우에서 양카이후이(杨开慧)와 당시 4~5세였던 마오안잉과 마오안칭(毛岸英,毛岸青)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뜻이 맞는 동지인데다 같은 고향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두 가족은 매우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순탄할 리 없고, 그에 더해 자녀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는 더더욱 안되었습니다.

 

 

 

 

곧 광저우 백색 공포가 고조되었고, 혁명의 중심이 우창(武昌)으로 옮겨졌습니다. 궈져 부부는 마오쩌둥 부부를 따라 우창으로 넘어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412 반혁명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은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후난으로 돌아가 조사하기로 결정했고, 뤄져는 상황이 불투명하다며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 조사를 하면서 농민 봉기를 일으킬 때를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오쩌둥이 다시 돌아올 때를 위해,조직에서는 그의 의견대로 준비를 하였습니다.

 

 

뤄져는 이 험한 길에 아내를 함께 데려갈 수 없어서, 우창에 남겨둔 채 후난으로 떠났습니다. 헤어진 뒤, 아내는 자주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매번 그에게 "특히 열심히 공부 하고, 특히 매운 음식 많이 먹지 마세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마오저둥은 이를 두고 "차오윈팡은 앞으로 '특히'로 이름을 바꿔야 겠다"고 농담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형세의 변화가 매우 빨라서 1927년 7월이 되자, 왕징웨이(汪精卫)의 반변혁명(叛变革命으로 인해 우창에서도 더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추수 봉기를 일으켜 차오윈팡을 먼저 뤄져와 합류시킨 뒤, 후난에 도착한 이후 그들을 찾아가 돕기로 하였습니다.

 

 

 

 

뤄져는 미리 돌아와 상황을 익혔기 때문에 추수 봉기로 조직을 대거 회복하고, 군중을 동원하는 일을 맡으면서 매일 반대편의 뒤통수를 치느라 바빴습니다.

 

 

마오쩌둥은 밤늦게까지 불빛이 켜진 뤄져의 집 앞으로 달려가 안부를 묻기도 하였는데, 뤄져가 대답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혁명적인 감정이든 개인적인 친분이든 매우 돈독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추수봉기 패배 후 마오쩌둥은 징강산(井冈山)에 올랐고, 뤄저, 차오윈팡 부부는 샹탄현 당위원회 조직 부장, 공정위 서기를 맡으며 적진 후방에서의 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의 이별은 그들과 마오쩌둥 주석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하던 시기인데다, 혁명 저조기(低潮期)였고, 지하 공작은 엄청난 어려움과 위험에 직면해 있었으며, 혁명 행렬 중에선 의지가 확고하지 않아 변절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1928년 7월, 뤄져와 차오윈팡은 변절자에 의해 나란히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옥중에서 뤄져는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죄명을 모두 홀로 뒤집어썼습니다. 농촌 아낙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전혀 몰라서 밖에서 활동할 때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죠.

 

 

당시 차오윈팡은 임신 중이었는데, 요행히도 고문은 피했지만, 여전히 형을 선고받고 갇혀있는 중이어서 쌍둥이 딸은 옥중에서 태어났습니다. 2년 후, 쌍둥이 딸은 조직에 의해 구출되어 출소되었다고 합니다.

 

 

국민당 반동파는 뤄져의 입에서 공산당의 비밀을 얻어내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마오쩌둥에 관한 소식을 얻어내려고 하였지만, 48일간의 고문에도 그는 꿋꿋하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어떠한 유용한 정보도 얻을 수 없자, 반동파는 그를 살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28년 9월 11일, 뤄져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내내 줄곧 "단결하여 반동파를 타도하자"고 소리쳤습니다.

 

 

반동파는 겁에 질려 뤄져의 입을 찔렀지만, 여전히 그의 노성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형장에 가서 반동파는 뤄져에게 무릎을 꿇게 하였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반동파를 타도하고 공산당 만세를 외치며 의로운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뤄져가 숨진 뒤, 차오윈팡은 두 아이를 데리고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출소 후엔 아이들을 데리고 옛 숙소로 돌아가 유품을 찾아 기념으로 남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그들이 함께 사진을 찍지도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생각나는 것은, 그들이 신혼때 혼수로 가져왔던 나무 상자 하나가 전부였지요. 차오윈팡은 이 나무 상자를 평생동안 간직했다고 합니다.

 

 

나무 상자 하나와 두 딸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주저우(株洲)로 돌아간 뒤, 아이들을 그곳에 정착시킨 뒤, 자신은 당 조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이내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당연히 시댁 가족들에게 맡기는 것이 몸은 편하겠지만, 아이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이 엄마로서 애틋한 마음이 앞섰던 것이죠.

 

 

그때 혁명을 하는 것은 모두 목숨을 내어놓고 하는 일이었으며, 한번 헤어지면 영원한 이별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아이는 아직 포대기에 싸인 아기였는데, 이 아기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었죠.

 

 

결국 차오윈팡은 큰딸 뤄텐위안(罗天元)은 시댁에 남겨두고, 작은 딸 뤄텐야(罗天亚)는 데려가는 것으로 시댁 식구들과 상의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을 위해 최소한 한 가닥의 핏줄이라도 남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이후 차오윈팡은 작은딸을 데리고 조직을 따라 상하이로 이동하였고,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한 편으로는 지하 공작을 전개하였습니다.

 

 

구순장(顾顺章)의 반란으로 상하이 정세가 매우 긴박해지자, 차오윈팡은 다시 긴급하게 이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창사(长沙)와 구이양(贵阳) 등지를 떠돌며 힘들게 지냈습니다.

 

 

 

 

 

나중에 차오윈팡은 구이저우의 당 조직과 연락을 끊고, 지하당원이었던 메이룬화(梅润华)와 부부의 연을 맺어 구이양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은 멀고 교통이 불편하여 어쩔 수 없이 은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전쟁 시대에 통신이 어렵고, 정보가 두절되자 국민당은 근거지의 소식을 빈틈없이 봉쇄하였습니다. 마우쩌둥은 뤄져와 차오윈팡의 생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고, 뤄져가 희생되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장정(长征)이 끝난 뒤에야 차오윈팡과 함께 상하이에서 일했던 동지로부터 뤄져는 오래전에 죽었고, 차오윈팡은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오 주석은 비통해하며 뤄져 열사의 미망인인 차오윈팡과 그들의 딸을 반드시 찾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전쟁터에서 흩어진 사람을 찾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지하공작원들은 모두 익명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작은딸 텐야가 엄마한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차오윈팡은 감히 뤄져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고, 그저 매우 용감했던 사람이라고만 말해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마오 주석은 1945년 국공협상 기간에야 후난 학련(湖南学联) 초대회장이었던 장쉐이커우(张维口)로부터 "차오윈팡이 구이양에서 재혼하여 수년간 연락이 끊겼으며, 구체적인 상황은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1949년, 구이저우가 해방되자, 마오 주석은 차오윈팡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였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1956년에야 구이양시 당서기관이 가까스로 차오윈팡을 찾았고, 그녀에게 마오 주석이 계속 당신을 찾고 있었다고 알렸습니다.

 

 

차오윈팡은 이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마오 주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즉시 편지를 써서 그동안의 근황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만났던 아이들 마오안잉, 마오안칭의 안부도 물었죠.

 

 

당시 정보의 폐쇄 때문에 당시 마오안잉이 희생된지 이미 몇 년이 지난 후였지만, 차오윈팡은 전혀 몰랐고, 구이양시위원회도 마오 주석의 아픔을 찌르는 이 편지에 대해 무어라 할 수 없었습니다.

 

 

 

 

28년을 고생한 끝에, 드디어 편지를 받은 마오 주석은 감격에 겨워 곧바로 답장을 보냈고, 몇 마디 되지 않는 일반 답장과는 달리 200자가 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마오 주석은 오랜 세월 찾아헤맨 옛 친구를 다시 찾은 기쁨과 일상적인 안부 외에도 뤄져에 대한 깊은 애정도 드러냈습니다. 그중에서도 "뤄져는 당을 위해 힘들게 일했고, 나는 그걸 증언할 수 있다"고 하여 차오윈팡을 눈물짓게 했다고 합니다.

 

 

특히, 조기 희생자는 드문데다가 건국이후 그들에 대한 처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오 주석의 직접 증언 덕분에 뤄져는 열사 자격을 확인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마오 주석은 편지에 300위안과 "뤄져 동지의 묘" 비문을 동봉하며, 뤄져의 묘를 잘 고쳐달라고 부탁하며, 혹시 다른 어려움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녀가 편지에서 안부를 물어본 아이에 대해서도, 마오 주석은 그것을 다시 언급하는 것이 비록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것과 같았지만, 피하지않고 편지 말미에 자애로움과 허탈함을 동시에 보이며 "당신이 보았던 두 아이는 한 명은 전쟁에서 희생되었고, 한 명은 병폐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은 차오윈팡은 계속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사실 마오 주석 일가의 처지 또한 그녀보다 나은 것이 아니었고, 뤄져가 사망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양카이후이도 1930년에 장렬하게 목숨을 바쳤으며, 화기애애했던 일가족이 망가져버린 것이죠. 혁명을 위한 마오 주석의 희생이 절대로 작지 않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편지 왕래가 있은 뒤, 힘든 시련을 겪었던 두 가족은 다시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후속 편지에서 마오 주석은 차오윈팡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중난하이로 오라고 여러 차례 초대하였습니다. 주석을 방해하지 않으려던 차오윈팡은 결국 전설적인 여행을 떠나게 되었죠.

 

 

1958년 6월 말, 차오윈팡은 쌍둥이 외손녀 두 명을 데리고 구이양을 출발해, 7월 초순에 이르러 도착하였습니다. 차오윈팡은 30년 만에 마오 주석을 다시 만나게 되었죠.

 

 

이들이 온 것을 반색하며 마오 주석은 일정이 꽉 차있는데도 불구하고 틈틈이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습니다.

 

 

 

차오윈팡의 회고에 따르면, 후난에서 농민 봉기와 뤄져의 옥중 일기가 주요 화두였다고 합니다. 차오윈팡은 뤄져에게 매운 것을 먹지 못하게 했던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그 작은 나무 상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마오 주석은 양카이후이와 그가 사랑했던 아내에게 써주었던 <접련화(蝶恋花)>를 언급하여 슬픔을 건드렸고, 두 오랜 친구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며칠을 묵은 뒤, 차오우니팡은 마오 주석이 바쁜데도 매일 시간을 내서 자신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미안하고 쑥쓰러워하며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마오 주석은 그녀들에게 베이징에 머물며 해방 이후의 모습을 좀 더 둘러봐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차오윈팡은 아이들을 데리고 20여 일을 더 머물며 수도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그녀는 천안문을 둘러보고, 역사 기념비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고 합니다.

 

 

마오 주석은 그동안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분투하자는 글을 차오윈팡에게 써주었습니다. 그녀가 데리고 온 두 손녀들도 마오 주석을 매우 좋아해서, 그는 자신이 직접 돈을 내서 그 아이들을 위해 각각 새 옷을 한 벌씩 사주었다고 합니다.

 

 

무려 25일이 지나자, 차오윈팡은 다시 한번 용기를 내 주석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이번에 마오 주석은 각자의 집안 사정이 있는 것이니 더이상 머물러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떠나기 전에 마오 주석은 차오윈팡에게 억지로 300위안을 쥐여주었는데, 그때 마오 주석의 한달 월급이 겨우 400위안에 불과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아무리 사양해도 거절하지 못하자, 차오윈팡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베이징을 떠나 구이양으로 돌아가려던 차오윈팡은 뤄져의 고향인 후난 주저우 마자허(湖南株洲市马家河)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남편 묘소를 찾아 뤄져에게 마오 주석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그에게 편안히 쉬시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차오윈팡은 마오 주석과 찍은 사진을 확대해서 뤄져 가족들에게 전달하여 영광스러운 일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곧이어 1959년, 3년 동안 가장 어렵고 힘들던 그 시절에도 마오 주석은 차오윈팡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통감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오라고 초대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1년 만에 다시 차오윈팡은 상경길에 올랐습니다. 이번에 데려간 사람은 두 외손녀가 아니라,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3세의 메이쿤셩(梅昆生)이었습니다.

 

 

마오 주석은 이 아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오래전 잃었던 자신의 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내 아들 대신 이 아이를 남겨놓고 가면 내가 잘 키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차오윈팡은 마오 주석의 호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농담에 농담으로 자신도 이 아들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오 주석은 웃으며 차오윈팡과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메이쿤셩이 뜻밖이었던 것은, 마오 주석이 자신에게 공부를 많이 하고 신중국을 위해 공헌해달라고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곡식이 잘 자랐는지, 고향의 시장에서는 무엇을 팔고 있는지 등등 시골의 시정 견문을 흥미롭게 넌지시 물어보았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야 메이쿤셩은 이러한 것이 민정을 이해하려는 주석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손님이 와서, 며칠을 머무르고 나서야 두 옛 친구는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은 1960년 9월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차오윈팡과 함께 온 사람이 또 바뀌었는데요, 구이양시 당위원회 기관의 리정중(李正中)이라는 젊은 간부였습니다.

 

 

그 시기는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리정중의 인상에 깊게 남았던 것은, 마오 주석의 바지에 커다란 기운 자국이 두 개나 붙어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식사 할 때 상차림이 가지볶음, 계란볶음, 두부구이, 참외볶음, 배추볶음, 두부유, 양고기볶음, 어두탕 등 기본적으로 나물이 대부분인 소박한 식사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오 주석이 직접 차오윈팡과 리정중에게 국을 떠주자, 그들은 감동하였습니다. 더욱 눈물나는 것은, 리정중과 차오윈팡의 밥은 쌀밥이고, 마오 주석은 자투리 쌀로 만든 밥이었다고 합니다.

 

 

리정중이 차마 먹을 수가 없어서 마오 주석에게 밥을 바꿔주겠다고 하였지만, 마오 주석은 "나는 이런걸 오랫동안 먹어서 익숙해졌다"고 하며 웃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장서서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며 경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마오 주석은 이들에게 국경일이 다 지나고나서 돌아가라고 붙잡았는데, 그러면 또 일주일 넘게 머무르다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모두들 고령이 되면서 이들 혁명 고우(革命故友)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계속 서신은 주고받았고, 마오 주석은 구이양시위 동지에게 부탁하여 차오윈팡의 삶을 돌보았습니다.

 

 

사실 마오 주석은 차오윈팡 뿐만 아니라, 대의와 정의를 중요시 여기고 마음 속에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모든 혁명 열사에 대해 혁명적인 감정을 쏟아붓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라고 합니다.

 

 

1930년, 천창(陈昌) 열사가 희생된 후, 부인 마오빙친(毛秉琴)이 세 살배기 딸 천원신(陈文新)과 함께 힘겹게 지내고 있을때, 마오 주석은 건국 후에도 그들을 열심히 찾았고 여러 차례 후원하였으며, 천원신을 두 차례 접견하며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진보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다고 합니다.

 

 

마오 주석의 격려를 받고, 열심히 공부하여 유명한 토양 미생물학자로 성장한 천원신은 2001년 중국과학원 원사(院士)로 선출되었다고 하네요.

 

 

 

 

1932년에 희생된 리우즈쉰(柳直荀)의 미망인 리슈이(李淑一)를 배려해서 마오 주석은 그녀를 위로하였고, 1959년 6월에는 창샤 롱위안(长沙蓉园)에서 직접 리슈이를 만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마오 주석은 자신과 혁명의 뜻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끝까지 힘껏 위로하고,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힘써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오윈팡에 대한 배려는 수천만 혁명열사의 가족들을 아끼는 수령의 관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마오 주석의 혁명 감정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이러한 혁명 감정이 오랜 세월동안 대물림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578663547073342083%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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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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