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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에서 평범한 사람으로...웨이용캉(魏永康)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는 15세 최연소 과학자 탄팡린(谈方琳), 바둑소년 커제(柯洁) 등등 내로라하는 천재 소년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때 잘 나가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하는 상중용(伤仲永)과 같은 예도 많다고 하네요.
오늘 살펴볼 기사의 주인공은 13세에 샹탄 대학(湘潭大学)에 합격하고, 17세에는 중과연(中科院)에서 석박사 연계과정에 들어갔지만, 20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권고퇴직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때의 천재가 한순간에 웃음거리가 되자, 그의 어머니도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어서, 그가 일찍 죽기를 바랐다는 독설까지 내뱉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떤 이야기인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서 이름이 나다
1983년, 웨이용캉(魏永康)은 후난(湖南)성의 작은 현성(县城)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는데, 부상을 입은 것이 남아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그의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일하며 온 가족을 먹여살렸다고 합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고, 아들이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미 예전에 대학생이 될 뻔했으나,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교를 그만둬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고, 집안 형편에 관계없이 반드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집착했습니다.
생후 두세 달 밖에 안 된 웨이용캉에게 그의 어머니는 당시와 송사(唐诗宋词)를 읽어주고, 조기 교육을 시키며 아직 포대기에 있는 웨이용캉을 위해 상세한 미래 학습 계획을 세워주었습니다.
이렇게 조기 교육을 받으며 자라 두 살이 된 웨이용캉은 이미 한자 1000여 자를 알고, 수학의 가감법을 할 수 있어서 이웃들 사이에서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정 형편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이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자신과 남편은 몇 년째 새 옷 한 벌 사지도 않고 오로지 아이 교육에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어쩌면 그게 중국 서민 가장들의 가장 큰 슬픔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아이에게 희생하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점을 이 기사를 쓴 기자도 안타까워했습니다.
여하튼, 당시 웨이용캉은 어머니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조기 교육을 열심히 받아들였고, 그는 신동같이 진도를 깨달아가며 남들보다 더 빨리 진도를 나간다는 이유로 친구도 없었습니다.
남들은 초등학교를 6년동안 다니지만, 웨이용캉은 2년만에 8세의 나이로 현지의 명문 고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3세에 대학 수학능력 시험에 응시해서 샹탄 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2000년, 17세의 우수한 성적의 웨이용캉은 선생님의 추천과 자신의 노력으로 중국 과학원(中国科学院)에 들어가 석박사 과정에 들어갔고, 이러한 소식은 그가 나고 자란 시골 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을 뒤흔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린 나이에 유명인사가 되었죠.
생각지도 못한 퇴학
웨이용캉의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원에 합격하여 대도시에 입성하자, 집안의 운명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녀는 오랜 고생이 드디어 보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였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웨이용캉이 중과원에서 퇴학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죠.
대학에서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 뿐만 아니라, 전면적으로 발전하는 인재가 더욱 필요합니다. 웨이용캉은 일찍이 어머니의 조기 교육과 전심전력으로 공부를 뒷바라지 해준 것때문에 정상적인 학습은 고사하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었고,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도 몰랐으며, 정상적으로 실험과 연구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웨이용캉의 어머니의 교육 방식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웨이용캉은 지금까지 줄곧 감정없는 학습 기계처럼 공부만 했고, 웨이용캉의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하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얼굴을 씻고, 목욕을 시켜주며, 허리를 숙여 신발끈조차도 매지 못하게 하고, 아들의 입에 밥을 떠먹여 주는 등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책을 한 번이라도 더 읽도록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웨이용캉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친구를 사귈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특히 아들이 여자와 왕래하지 못하게 하고 말도 못걸게 하였다고 하네요.
어릴 적, 웨이용캉은 어머니에 의해 집 안에 갇혀서 나가 놀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에는 그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을 잘 하지 않았던 것도 플러스가 되었는데, 또래보다 항상 앞서 나가있는 공부 진도까지 더해져 그의 곁에는 함께 놀 친구가 없었습니다. 만약 친구가 생겨서 그에게 전화라도 걸면, 곧바로 그의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우 관계는 단절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혼자서 베이징으로 건너간 웨이용캉은 이전처럼 공부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생들은 팀워크가 필요하고, 여러 동문 선배들과 멘토들과도 교제해야 합니다. 하지만 웨이용캉은 그런걸 할 줄 모르고, 자신의 일에만 혼자서 몰두하였죠.
사람을 사귈줄 모르는 것 말고도 더욱 심각한 것은 웨이용캉이 어머니를 떠나 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빨래를 할 줄도 모르고, 무엇을 먹어야 할 줄도 몰랐으며,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샤워도 어떻게 스스로 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해 겨울에 베이징에 눈이 내렸을 때, 웨이용캉은 얇은 옷을 입고 더부룩한 머리에 때묻은 얼굴을 하고는 괴짜처럼 베이징 천안문에 갔다가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말았습니다.
2003년, 중과원은 웨이용캉의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대학원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퇴직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자 한때 빛을 발하던 신동이 괴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가장 견디지 못했던 것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죽을 고생을 하며 아들을 신동으로 만들어놨더니, 결국엔 이런 결말이 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죠.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권고를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웨이용캉은 사람이 변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하루 종일 외출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몇 번은 심혈을 기울여 집 밖으로 나가보기도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모두 어머니가 찾아서 다시 데려왔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하던 그 천재가 이제는 완고한 문제 청년이 되자, 이웃들도 안타까워하고 웨이용캉의 어머니도 안타까워했습니다.
모든 고생과 희생을 감내하며 길러낸 아들이 타락하여 하루 종일 사람같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리자, 화가 나고 괴로워서 그의 어머니는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 아들을 향해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웨이용캉은 이미 어머니의 잔소리가 귀에 딱지가 될 정도로 들어와서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겠다는 생각을 한 그의 어머니는 외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반성하며 자신이 정말로 잘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웨이용캉의 옛 학우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그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그녀 또한 태도를 바꾸어 천천히 아들에게 집안일을 가르치며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관리하였습니다.
웨이용캉은 어머니의 세심한 지도 아래, 매일 침대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차를 따라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외에도 사회 각계 각층에서 웨이용캉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습니다.
그 중 웨이용캉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화룽현 인민대표대회 부주임 왕페이쥔(华容县人大副主任王佩群)과 그의 양어머니, 창샤 교육학원 신입생 모집처 주임 장진핑(长沙教育学院招生办主任张锦平)이었습니다.
웨이용캉은 매일 오전 화룽현 인대에 한나절씩 출근하고, 오후 시간은 자신이 알아서 책임진다는 동의를 하였습니다.
웨이용캉은 동료들의 컴퓨터 수리도 도와주었습니다. 사실 왕페이쥔의 의도는 그가 이곳에서 사회 생활과 사람 사이의 교류 방식을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교 능력을 높여주어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있지 않을 수 있게 하길 바랐던 것이었죠.
차츰 정상인이 되어간 웨이용캉은 스스로 빨래도 하고, 손님에게 차를 따라주고, 어머니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서 자신의 일정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장보기를 하면 싼 물건으로 잘 골라 사와야 한다는 것도 알게되자, 웨이용캉의 어머니는 흐뭇해했습니다.
장진핑은 웨이용캉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웨이용캉에 대해 항상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웨이용캉의 사정을 알게 된 그녀는 자신이 이 학생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녀는 특별히 전화번호를 남겨, 웨이용캉에게 직접 창사로 자신을 찾아와 독립 능력을 기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검은색 슬리퍼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타난 웨이용캉을 본 순간, 그녀는 반가움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고 합니다.
그녀의 집에 찾아오자, 장진핑은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게 예의범절을 차근차근 가르치고, 손님과 상대하고, 요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책에만 매달리지 말고 세상을 보게 하는 그녀의 격려와 지도 아래 웨이용캉은 점점 성숙해진 인간이 되어갔고 요리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2008년, 웨이용캉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는 예전의 신동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었고,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편이고, 아내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는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아주 좋아졌다고 하네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웨이용캉은 자신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며, 매일 퇴근하면 아내와 아이와 함께 집안일을 하고 놀러다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하고 싶은 소망은 있다고 합니다.
2009년, 그는 베이징 공업대학 대학원 진학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2년 뒤에는 난징의 한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에 취직하여 평범하면서도 알찬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를 보며, 중국에서는 교육계에 웨이용캉 같은 사례가 적지 않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공부에만 매달리게 해서 장래의 기본기를 등한시하는 중국 부모들의 교육 태도와도 관련이 깊다고 합니다.
성적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한 인격체로 독립적이고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도덕을 갖추는 등 기본기를 갖추는 것이겠지요.
<참고기사>
湖南神童13岁上大学,17岁上中科院,母亲却说:恨不得他死了
提起天才少年,大家脑子里都会冒出许多响当当的名字:95后天才少年曹原、15岁最年轻科学家谈方琳、围棋少年柯洁……在中国像这样赫赫有名的天才少年也许只有那么几个。 有很多都是“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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