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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대 부호에서 노점상까지...롤러코스터 같은 궈정리(郭正利)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세상은 참 변덕스럽고,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지요. 특히나 비즈니스 활동은 매우 큰 변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를 꿈꾸며 비즈니스에 뛰어들지만, 이 세상에서 스러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명의 상인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도 있고, 100억대 부호도 하루아침에 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비즈니스 사회이지요.
오늘 살펴볼 기사의 주인공은 한때 타이완 관광의 재벌이었고, 수십억 위안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특한 안목과 꾸준한 노력으로 자신만의 상업제국을 일구었습니다. 하지만, 투자 실패로 15억의 빚을 지게 되었고, 빚을 갚기 위해 다시 0에서 시작해 평범한 노점상이 되었다는데요, 59세에 길거리에서 쓰러져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날의 100억 부호
타이완의 길거리에는 '스타' 노점상이 있었는데, 그는 노쇠한 중년의 남자로, 포장마차에서 주로 참기름에 튀긴 닭을 팔았습니다. 이 노점상에는 이상하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었는데요, 그 사람들은 닭튀김이 아니라 이 아저씨를 보러온 것 같았고, 그 아저씨는 마치 스타같았다고 합니다.
그는 바로 타이완의 유명한 관광업계 거물로 100억대 부호였던 궈정리(郭正利)라고 합니다. 그는 1957년에 타이완에서 태어났으며,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집안형편이 유복했었는데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오래가진 않았고, 어릴 적 아버지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자 빚더미에 올라앉은 아버지는 가족을 두고 빚쟁이를 피해 밖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집을 나간 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죠.
궈정리는 어릴 때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도련님같은 생활은 얼마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이후에는 어머니 홀로 그와 남동생을 고생하며 키워주었고, 궈정리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 자랐습니다. 그는 성년이 된 후에 어머니와 동생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궈정리는 열정적인 노력파였고, 그의 학교 성적도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타이완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수많은 일을 했었는데요, 식당 종업원은 물론이고, 여행 가이드로도 일했으며, 심지어 파트타임 광고 촬영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경험들은 그가 이후에 창업을 하기 위한 사회 경험으로 축적되었습니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궈정리는, 1990년 타이완에서 '텐시여행사(天喜旅行社)'라는 이름의 한 여행사를 차렸습니다. 이 여행사의 주요 서비스는 럭셔리한 일본 여행이었고, 오직 일본 여행 노선만 서비스하였습니다.
그 몇 년 동안 궈정리는 사업을 아주 잘 했고, 그의 회사는 끊임없이 성장하였으며, 좋은 경영 실적 덕분에 그는 40억 타이완 달러 가량의 자산을 빠르게 축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궈정리는 명실상부한 타이완 여행업계의 스타였고,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습니다. 그의 사업이 성공하기도 하자, 일본 부잣집 영애의 눈을 사로잡았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진 뒤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 당시 궈정리의 인생은 충분히 휘황찬란하다고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사업은 나날이 빛났고,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으며, 하늘이 마치 그에게 어렸을 때 겪었던 고난을 배로 보상해주었던 것만 같았죠.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고, 유명한 고급 차와 시계를 찼으며, 값비싼 럭셔리 브랜드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재산은 그를 빠르게 상류사회로 발돋움 하게 해주었습니다.
투자 실패로 전재산을 날리고 15억의 빚을 지다
사실, 당시의 궈정리의 여행 사업은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었고, 그는 일본 럭셔리 여행의 선두주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비즈니스 지평을 넓히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동산 개발에 빠르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는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는 이치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거대한 전환점을 맞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게 되었죠.
타이완 부동산 투자에 실패한 궈정리는 모든 돈을 날리고 15억 타이완 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일순간에 궈정리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죠. 과거의 돈을 물쓰듯 쓰던 생활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궈정리는 100억 대 부호에서 빚더미에 앉은 투자 실패자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동산 투자 실패로 궈정리는 사업체마저 완전히 잃게 되었죠.
더 황당한 일은, 그의 아내도 일본으로 도망가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도망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삶이 추락하게 되자 위험을 버리고 일본의 부자 친정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투자에 실패한 후 가장 먼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것은 궈정리가 아닌 그가 아끼던 동생이었습니다. 그의 남동생은 이 생활의 격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일은 궈정리가 투자 실패를 한 것보다 더욱 그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였으며, 그는 비통해하며 한동안 엄청나게 살이 쪘다고 합니다.
궈정리는 한순간에 노쇠해버린것 같았고, 그 역시도 생을 스스로 마감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어머니에게 그런 고통을 다시 한번 겪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인하게 버티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궈정리는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빚들에 대해서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자신에게는 아직도 재기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금강경(金刚经)>에는 “一切有为法,如梦幻泡影,如露亦如电,应作如是观。”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부와 명예와 지위는 결코 사람이 영원히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한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손님들을 초대하고,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을 보고 그 누가 그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인생의 격변을 겪은 궈정리는 정상에서 한 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궈정리는 빚쟁이들에게 자신은 한 푼도 틀리지 않고 갚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주저앉지 않고 계속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전과 같은 화려함은 더 이상 실현하기 어렵게 되었죠.
이전에 궈정리의 인생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운전기사가 모시던 삶을 살았다면, 지금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궈정리도 이러한 차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밑바닥부터라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마요우지(麻油鸡)" 닭튀김을 만드는 솜씨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머니에게서 비법을 전수받은 후 노점 가판을 열어 닭튀김을 팔았습니다.
과거에 100억대 부호였던 사람이 투자에 실패해서 한 순간에 거리로 내몰려 마요우지를 파는 노점상이 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습니다. 궈정리는 아직도 타이완에서 조금 유명하다고 하는데요, 그는 일찍이 젊은이들이 숭배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 그의 유명세를 타고 그가 일하는 노점에 방문하였는데, 결코 그 기름진 닭 튀김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고, 사업이 망한 이 남자를 직접 보고싶어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언론에서는 과거의 관광업 재벌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언론을 향해 궈정리는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점상이 결코 녹록한 생업이 아니라고 여겼고, 그의 마음 속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궈정리는 마요우지를 팔면서도 적극적으로 옛 사업을 재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행업계에서 절대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도 서서히 다른 여행기관과의 협력을 모색하였고, 몇몇 회사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고 합니다.
궈정리는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전진하였지만, 그의 삶은 더 나아지거나 나빠지지도 않았습니다.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59살 때 그는 과로와 울화가 쌓여 결국 길거리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부담을 견디지 못한 궈정리의 일생은 화려함부터 바닥까지 온갖 희노애락을 맛보았던 전설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상업 제국을 일구었었지만, 그것을 결국 지켜내지 못하였지요.
타이완 관광업의 전설로 꼽히던 궈정리는 한때 100억 타이완 달러를 소유한 부호였지만 투자 실패 후 추락한 뒤, 노점상을 열어 닭튀김을 팔아 빚을 갚아나갔습니다. 그가 세운 텐시 여행사는 타이완에서 인지도가 높은 여행사였습니다.
그 역시도 타이완 관광업의 풍운아로, 그의 여행사는 업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1위 기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판은 전쟁터였고, 부동산 실패에 실패한 그는 전재산을 날리는 것은 물론 15억의 빚을 졌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궈정리의 삶은 투자를 실패하고, 사업이 망하고, 아내가 떠나고, 아끼던 가족이 죽는 등 숱한 충격 속에서도 용감하게 살아왔습니다.
궈정리는 재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지만, 결국 그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59세의 그는 피로가 누적되어 결국 길거리에서 과로사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하였지만, 그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태도와 꺾이지 않는 뚝심은 탄복할 만합니다.
<참고기사>
百亿富翁的跌落:投资失败负债15亿,妻子跑路,59岁的他累亡街头
正所谓风云变幻,世事无常,花无百日红。商业活动都是有着很大变数的,人人都想要梦寐以求的财富,但是在这个世界上,没有任何东西是会永垂不朽的。 无名之辈通过自己的努力打拼,可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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