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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쉐량(张学良)의 은인이자 원수인 리우이광(刘乙光)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 근대사에서 유명한 장쉐량(张学良)은 인생의 파란만장한 기복이 대단했다고 하는데요,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든든한 날개 아래에서 곱게 자란 영락없는 도련님이었습니다. 아버지 장쭤린(张作霖)은 이후 황구툰(皇姑屯)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폭사하였고, 그는 막중한 책임을 계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동베이(东北) 가업 덕분에 대내적으로는 여전히 위풍당당했고, 중원대전 후에도 화베이(华北)를 차지하여 아버지보다 더욱 강해보였습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오히려 멍청한 것 같기도 하였는데요, 먼저 중둥루(中东路), 나중엔 918까지, 끝내 고향 집까지 잃어버리고 국민들에게 호되게 욕을 먹었습니다. 만약 시안 사변이 없었다면 그의 명성은 아마도 끝까지 악취가 났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시안사변은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시점이자, 장쉐량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그 자신의 말로는 "내 평생 36세까지 살았는데, 그 이후에는 없어졌다. 그게 바로 내 생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국민들에게 "애국장군"이라고 불렸지만, 54년간의 구금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오랜 세월을 감시한 사람이 여러명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오래 함께했던 사람이 바로 리우이광(刘乙光)이라고 합니다. 리우이광은 장쉐량 옆에서 그를 24년간 지켜봤다고 하네요.
장쉐량은 시안 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장제스(蒋介石)를 모시고 난징(南京)으로 돌아갔지만, 곧 억류되고 말았습니다.
1936년 12월 31일, 국민정부는 장쉐량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하였습니다. 무력을 써서 군주에게 간언을 당한 장제스는 하는 수 없이 명목상의 처벌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37년 1월 4일, 국민정부는 다시 '특별 사면'을 발표하여 장쉐량을 처벌에서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이를 보아, 장쉐량이 장제스를 난징으로 돌려보낼 때, 틀림없이 약간의 보증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장쉐량이 자유로운 몸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쉐량이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장쉐량에게 허락된 활동 범위가 반경 1km에 불과하였고, 화장실에 갈때도 그를 감시하는 사람이 따라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감시하던 사람이 바로 리우이광 군통특무(军统特务)였다고 합니다.
1937년 1월 13일, 장쉐량은 장제스의 고향인 펑화시커우(奉化溪口)의 쉐떠우샨(雪窦山)으로 옮겨져 정식으로 수감되었고, 이후에 잇따라 안후이성 황산(安徽黄山)에 있는 "팅타오쥐(听涛居)", 장시성 핑샹(江西萍乡) "쟝웬(绛园)", 후시 위안링 펑황산(湘西沅陵凤凰山), 꾸이저우 시우원양 밍둥(贵州修文阳明洞) 등지로 옮겨지면서 아중엔 타이완 신주 칭췐(台湾新竹清泉)으로 옮겨기기까지 리우이광이 곁에서 그를 감시했습니다.
비록 장제스가 장쉐량을 위해 선택해준 곳은 모두 산과 물이 맑고 푸른 수려한 곳이었지만, 자유를 잃은 장쉐량은 기뻐할 수 없었고, 그를 대하는 리우이광의 태도는 삶을 더욱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친구들이 장쉐량에게 물건을 보내오면, 리우이광이 떼어먹거나 때론 몰래 착복하기도 하였습니다. 편지를 보내오면 리우이광은 장쉐량의 동의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먼저 뜯어보았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적지 않게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원래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정한 활동 범위는 1km였지만, 리우이광에 이르러서는 200m밖에 되지 않았고, 범위 밖으로 나가면 삼보일강(三步一岗), 오보일초(五步一哨)의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였습니다.
더욱이, 리우이광은 나중에 직접 가족들을 데려와 장쉐량과 함께 살면서 식사까지 함께하는 환경으로 만들어 장쉐량을 더욱 숨막히게 하였습니다.
그의 유일한 화풀이 방법은 쟈오쓰 샤오제(赵四小姐)를 향해 원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우이광은 장쉐량을 엄청난 범죄자처럼 여기며, 그가 탈옥하고 도망갈까봐,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봐 사사건건 제한하여 난감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쉐량은 자신이 못견디든 말든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때문에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1947년 10월, 리우이광이 휴가차 잠시 자리를 떴을 대, 장쉐량은 그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시를 썼습니다. 그러고 보면, 장쉐량은 리우이광을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1962년 리우이광이 안전국(安全局)으로 복귀할 즈음에 이르르자, 장쉐량은 오히려 대대적으로 그를 위해 송별연을 베풀어주며 장징궈(蒋经国, 장제스의 아들)까지 초청하여 모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장쉐량은 리우이광이 자신의 원수이자 은인이라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제 그가 가게 되었으니, 자신은 그에게 노잣돈을 좀 보태주려고 하는데, 역시나 자신의 작은 성의라고 하였지요.
마치 주객전도가 된 것 같은 석연치 않은 이 말에 장쉐량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고, 그가 보내려던 돈은 장징궈가 리우이광을 대신하여 완곡하게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쟈오쓰 샤오제는 장쉐량에게 리우이광이 당신을 25년간 감시하며 자유를 전혀 느낄 수 없게 했고, 평소에도 우리에게 극히 제한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왜 배웅을 해주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장쉐량은 그를 배웅해주는 것은 첫번째로, 리우이광에게 학대받던 날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고, 두번째로는 리우이광이 자신을 확실히 두 번 구해줬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첫번째는 1937년, 장쉐량이 억류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그가 쉐떠우산을 산책하던 중, 먀오까오타이(妙高台)에 도착했을 때, 장샤오셴(蒋孝先)의 미망인인 위안징즈(袁静枝)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장샤오셴은 장제스의 조카손자로 시안 사변에서 동북군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위안징즈는 이것이 장쉐량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훈련되지 않은 여성이 쏜 사격은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첫발을 목표물에 맞히지 못했고, 두 번째로 총을 쏘려던 중 리우이광에게 넘어져 장쉐량의 목숨을 구한 셈이 되었습니다.
또 한번은 1941년 5월, 당시 장쉐량이 퉁쯔룽강산(桐梓龙岗山)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어느날 그에게 맹장염이 발생하자, 수행하던 의사가 그를 검사해본 뒤 바로 수술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급한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수감된 곳에는 의료 시설이 마땅치 않아 외부로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당시 장쉐량은 무엇을 하고싶던 간에 모두 장제스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만약 장쉐량이 밖에 나가서 무슨 일을 벌인다면 리우이광의 모가지가 날아가는 셈이었지요.
하지만 당장 리우이광이 멀리 충칭에 있는 장제스에게 보고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리우이광은 마음을 먹고 곧바로 장쉐량을 병원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래서 응급처치를 받은 끝에 장쉐량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그러나 리우이광이 만약 고의적으로 타이밍을 놓치게 했다면, 장쉐량의 생명은 1941년에 이미 끝나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두 번의 목숨 빚 때문에 장쉐량은 리우이광을 은인으로 여겼고, 비록 송별회때 그에게 돈을 증여해주진 못했지만 1982년에 리우이광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땐 다소 자유로워진 장쉐량이 쟈오쓰 샤오제까지 데리고 문상을 가서 오랜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주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장쉐량의 말년에 기자가 리우이광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우이광도 그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었을 것이다. 난 아직도 그가 많이 그립다."
장쉐량의 인생 역정을 보면 원수와의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 은인과 원수의 경계가 그리 쉽게 구분되지 않기도 하는데요, 장쉐량에게 있어서 장제스는 은인이자 자신의 자유를 없애버린 원수이기도 하고, 리우이광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자, 옆에서 까탈스럽게 감시를 하던 간수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이미 바람처럼 불어서 사라진 뒤이므로,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기사>
张学良被刘乙光看守囚禁了25年,分别时却赠给他一笔钱,这是为何
张学良是中国近代的一个著名人物,他的人生跌宕起伏非常精彩,早期蛰伏在父亲的羽翼下,就是一个不折不扣的公子哥。后来父亲张作霖在皇姑屯被日本人炸死,他只能临时继承大任。 靠着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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